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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자신의 ‘위안부’ 피해 사실을 국내외에 알리며 일본의 만행을 고발했던 평화인권운동가, 고 김복동 할머니가 끝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생의 마지막까지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진 못했지만, 신심 깊은 불자로서 자신보다 남의 아픔을 더 챙겼던 정의로운 삶은 남겨진 이들에게 큰 울림이 되고 있습니다. 

배재수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 기자 >

보랏빛 한복에 활짝 웃는 고 김복동 할머니의 영정이 운구차와 함께 서울광장을 떠납니다.

별세한 나이를 뜻하는 94개의 만장이 뒤따르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수많은 노란 나비의 물결이 고인의 마지막 발길을 추모했습니다.  

시민장인 영결식은 올해로 27년째 매주 수요 집회가 열리고 있는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치러졌습니다.

영하의 추위에도 많은 시민들은 생전에 준엄했지만 인정이 넘쳤던 김 할머니의 추모 영상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고 김복동 할머니 추모영상 현장음.

[“일본 대사는 들어라~ 내가 전 세계로 다니면서 동상을 세울테니”]

백지연(23, 서울 안암동) 인터뷰.

[“오랫동안 정말 많이 고생하셨는데 그리고 마지막까지 좋은 소식 듣지 못하시고 힘들게 가신 것 같아서 마음이 많이 아팠고요”]

시민단체 대표들은 김 할머니의 뜻을 이어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와 배상에 함께 나서자고 호소했습니다.

윤미향(정의기억연대 대표) 현장음.

[“일본 대사는 들어라 라고 했던 그 김복동 할머니의 목소리를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나비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본 정부는 들어라”]

별세한 김 할머니는 평화인권운동가이자 신심 깊은 불자였습니다.

김 할머니는 ‘위안부’로 끌려간 8년 동안 자신의 어머니가 양산 통도사에서 매일 했던 기도 탓에 살게 됐다며 “부처님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습니다.

그 때문 인지 평생을 자신의 안위보다는 전쟁으로 고통 받는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을 지키는 데 헌신하는 진정한 보살의 삶을 살았습니다.

<클로징스탠딩>
굴곡진 시대에 태어나 큰 아픔을 겪었지만 끝까지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고 김복동 할머니의 정신은 후대의 가슴에 오롯이 남았습니다.

BBS뉴스 배재수입니다.

<영상취재=장준호 남창오 허영국>

<영상편집=성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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