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기록한다.

인터뷰는 능동적 기록이다.

인터뷰어가 인터뷰이를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볼 때, 그 기록은 보다 선명해 진다. 기자로서 우리사회에서 일가를 이룬 많은 이들을 만나 인터뷰 했다. 개인적으론 정점에서 한발 물러난 80대의 원로들과의 인터뷰가 더욱 의미있게 다가온다. 많은 것을 이룬 이들의 지혜와 처신은 내 삶과 생(生)을 되새기게 한다. 특히 많은 것을 이뤘기에 그만큼을 정리하고자 하는 한 인간의 성찰도 엿볼수 있다.    

지난 18일 캄보디아 시엠립에서 지구촌공생회 이사장 월주스님과 마주 앉았다. 불교기자로서 지구촌의 척박한 곳을 많이도 다녔지만, 캄보디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세수 여든넷에도 지구촌을 종횡 무진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월주스님은 종단에서 익히 알려진대로, 불과 46살에 종단정치의 정점인 총무원장에 올랐고, 환갑 무렵에 다시 한 번 그 정점을 섰다. 과거 월주스님의 법명은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개신교 강원용 목사와 늘 함께했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월주스님 하면 종단 적으론 94년 종단개혁을, 사회적으론 민주화운동을 먼저 떠올린다. 필자 또한 그러했지만, 약 1시간의 인터뷰를 마치자 스님의 행(行)이, 본인이 늘 주창하던 ‘깨달음의 사회화’에 맞닿아 있음을 절감했다.

특히 타인에 대한 호기심과 감수성은 종단정치에서 일가를 이뤘던 스님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풍겼던 그것과 같은 듯 달랐다. 여든넷의 스님을 만났기에 그러할 수도 있겠고, 오히려 과거 종단정치 현장에서 있었을 때보다 구호활동을 펼치는 지금의 월주스님이 스님의 본래면목에 더 가깝지 않나 추측을 해봤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 자비행의 실천이 세수 여든 넷의 스님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보였다.    

지난해 가장 인상 깊었던 인터뷰이는 루이스 랭카스터 UC 버클리대 명예교수였다. 대학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했기에, 인터뷰 당시 87살 원로교수와의 인터뷰는 설레고 뜻 깊었다. 해외 국제학술대회에서 오다가다 몇 차례 인사만 나눴지만,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뜻밖에도 필자를 기억을 해 주어서 감사했다. 인터뷰에 앞서 랭카스터 교수의 한국인 제자로 동국대 교수에서 은퇴 한 후 미국에 선원을 개원한 진월스님의 안부를 물으며 거리감을 좁히려 노력했다.

통역자가 있었지만 직접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어에 있어서 전문가보다 한참 뒤떨어지겠만, 통역을 거친 인터뷰는 인터뷰어가 인터뷰이와 교감하기엔 한계가 있다. 고려건국 110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장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고려대장경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이견이 없었다. 질문이 한국불교의 세계화 방안에 이르러선 인터뷰가 삐걱대기 시작했다. 랭카스터 교수에게서 “한국 사람들은 내셔널리티에 너무 관심이 많다”는 핀잔을 들었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간화선이 세계에서 아니 미국에서 통할 것 같은가 재차 물었더니, 이미 명상은 서구사회에서 보편화 돼 있다며, 탈종교화 시대 국적을 떠나 불교의 발전방안을 고민해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공(空) 사상을 서구에서 강의할 때면 학생들이 허공 등을 떠올리지만, 한국의 교수들은 독창적인 방법으로 보다 쉽게 이를 가르친다는 깨알 같은 칭찬도 나왔지만, 내심 생각했던 관련 보도는 접어야 했다. 애초 주제가 고려대장경이었고, 그날 랭카스터 교수는 출국해야 하는 등 제약도 많았다.

30분 정도의 인터뷰를 마치며 일어서는 랭카스터 교수는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부쩍 늙었다는 소리를 많이 한다고 웃으며 이야기 했다. 그러나 랭카스터 교수는 지금도 여전히 해외에서 다양한 불교경전 전산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2017년 인터뷰를 했던 전 국가인권위원장 최영도 변호사의 경우엔 지난해에 별세 소식을 듣고 가슴이 먹먹해 지기도 했다. 재작년 11월 서초동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마침 그날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을 한 날이었다. 인사동에서 출발한 필자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마포 본사에서 출발한 카메라 기자는 교통정체로 1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영상 촬영 없이 1시간을 인터뷰 했고, 다시 카메라 기자와 함께 1시간, 2시간 넘게 인터뷰를 했지만, 인터뷰이는 불평 없이, 지친 기색도 없이 너무나 상세하게 인터뷰를 해 주었다. 인터뷰 이후 최 변호사가 별세하기 불과 한 달 전 쯤, 부처님오신날 법정공휴일 지정과 관련해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인터뷰를 했었는데, 이후 언론을 통해 접한 정정했던 이의 별세소식은 정말 뜻밖이었다.

국적과 분야, 업적은 달랐지만 원로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열정’과 ‘철저함’, '호기심'이었다. 여든 넷의 나이에도 월주스님은 오지의 학교 부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밝고 나서야 결정을 한다. 또 캄보디아에서 근무하는 처음 본 한국인 직원에 대해 세세한 관심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랭카스터 교수는 삼성으로부터 고려대장경 전산화 작업을 지원받았던 당시에, 몇 명을 어떻게 지원받았는지를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최영도 변호사는 집필을 시작하면 두문 불출하며 제대로 잠을 자지 않고 글을 썼다고 한다. 해당사진은 어떻게 해서든 구하고 이메일과 전화로 사진을 사용하겠단 허락을 일일이 받았다. 

지난 15일부터 20일 까지 5박 7일간의 지구촌공생회 캄보디아 교육시설 취재일정 동안 카메라 안과 밖에서 만난 사연들도 뜻 깊었다. 완주 안심사 일연스님은 평생을 강백으로 살았다. 사찰 내부에 화장실을 만드는 공사도 겨우 할 정도로 사찰 살림이 넉넉한 편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저 불사를 하고, 상좌들 공부 뒷바라지를 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고 회고했다. 중고등학교 후원을 결심하고 몇 번을 포기하고 싶었으나 그 때마다 도반과 신도들의 후원으로 학교를 후원할 수 있게 됐단 짧은 말 속에 그 간의 마음고생이 그대로 묻어났다. 

김연아 선수가 필리핀에 학교를 지었다는 기사를 보고 1억원을 후원해 캄보디아에 영주 초등학교를 지은 도영주 보살도 그러했다. 당시 7~8천만원이면 저개발 국가에 학교를 지을 수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나도 불자로서 불교국가에 학교 하나 짓겠노라 발심했다고 한다. 40년 동안의 공직생활을 마무리 하면서, 사회에 환원하고자, 또 생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후원을 했다고 한다. 자식이 있지만 자식 집사는데 보태지 않고 그 돈을 이국 땅 낯선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었다. 이러한 보시의 뜻을 이해하고 협조한 배우자 또한 대단하다 여겼다. 

100세 시대, 나는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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