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움’이라는 게 있다.

선배간호사가 후배간호사를 길들이기 위해 행하는 온갖 인격적ㆍ육체적 가혹행위 등 악질적 행동으로 후배간호사의 영혼까지 태운다는 의미로 ‘태움’이라고 한다. 즉, 다 태워버린다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말인가.

이런 못된 문화는 인명을 다루는 병원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용의주도함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시작됐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히 무조건 후배간호사를 괴롭히는 문화로 자리잡았다.

이를 참지 못하고 외부로 알리는 고발도 있지만 대개는 자신의 생명을 버림으로써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지난 5일에는 서울시 산하 서울의료원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평소 고인은 언니에게 “언니 나 오늘 밥 한 끼도 못 먹었다. 물 한 모금도 못 먹었다. 커피를 타다가 넘쳐서 혼나고 신발에서 난 소리 때문에 혼났다”며 직장 내에서의 괴롭힘을 호소해왔다고 한다.

고인는 2013년 3월 서울의료원에 입사했고, 2018년에는 병원내 ‘친절스타’로 선정됐다고 한다. 지난달 18일 간호행정부서로 발령을 받았고, 이 부서원들의 억압적인 분위기로 인해 힘들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유서에는 ‘직장사람은 조문을 오지 말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한다. 얼마나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이 싫었으면 유서에 그런 말까지 썼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족은 병원 내 괴롭힘 문화인 ‘태움’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진상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망 사건과 관련해 서울의료원 측의 대응은 매우 부적절했다. 고인은 이미 5일 사망했고 7일에 알려졌지만 서울의료원 측은 공식적으로 이를 밝히지 않았고 9일 새서울의료원분회가 추모 대자보를 붙인 후에야 구성원들이 이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발인 후에도 의료원장은 유가족을 만나주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야 어쩔 수 없이 면담을 했을 정도로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정황이 명백한데도 의료원 측은 시간을 끌며 빠져 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고인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까지 냈다는 것은 그 책임이 선배간호사나 의료원 측이 아닌 본인 스스로 져야 한다는 추잡한 발뺌에 불과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지난 11일에는 익산에서 간호조무사 A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났다.

A 씨는 메모지에 ‘동료들의 괴롭힘에 힘들다. 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있다. 내가 죽어도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A씨는 또 자신을 힘들게 했던 동료 2~3명을 실명으로 언급했다.

A씨는 간호학원 이론반을 마치고 간호조무사 자격을 얻기 위해 최근 익산의 한 한방병원에서 실습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 관계자들은 간호업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던 A씨에겐 입원실 침구정리 등을 시켰다고 진술했다.

결국 간호조무사가 되고 싶었던 A씨는 ‘태움’이라는 선배간호사들의 괴롭힘 속에 생을 마감했다.

병원 측에서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태움’ 때문이라는 것을 숨기고 싶겠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억압적 문화를 인정하고 이를 바로 잡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간호사들 사이에는 소위 ‘여왕벌’이 있고 그 여왕벌을 따르는 무리가 있어 여왕벌의 지시에 따라 후배간호사를 집단적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요즈음은 남자 간호사들에 대한 괴롭힘도 심각하다. 심지어 남자간호사 간 태움문화는 군대보다 더 가혹하다는 주장도 있다.

남자 간호사에 대한 태움은 '남자간호사를 쥐 잡듯 잡으면 다른 여자간호사들은 따라서 말을 잘 듣는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한다.

대한간호협회가 간호사 7천275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40.9%가 태움에 시달렸다고 답했다.

정부는 지난해 3월 ‘간호사 근무환경 개선 대책’을 발표했다. 신입 간호사를 괴롭히는 가해자는 의사든, 간호사든 의료면허를 정지시키겠다고 했다. 태움을 신고 및 상담하는 ‘간호사인권센터’도 운영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 그 이유는 아직도 관련 의료법 개정안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잠자고 있다. 의사협회 간호사협회 등 이익집단의 힘을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이 이길 수 있을까? 앞으로도 이 법은 통과되기 어려울 것이다.

‘간호사인권센터’도 ‘교육전담 간호사’ 제도도 보건복지부의 희망사항일 뿐 현장에서는 소가 웃을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는 ‘갑질폭로’,‘미투운동’ 등 제 목소리를 내면서 바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병원 내에서의 의료인들의 못된 문화는 그대로다.

의대교수가 학생을 두들겨 패는 것도 모자라 목봉체조까지 시키고 선배의사가 후배의사를 폭행하고 자신의 종처럼 부려 먹는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간호사 역시 질서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선배가 후배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하고 심지어 한번 찍히면 직장을 못 다닐 정도로 괴롭히는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모진 시집살이 한 며느리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자기 며느리에게 더 심한 시집살이를 시킨다는 말이 있다. 괴롭힘을 당해본 자로서의 노하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호사의 태움도 이런 잘못된 대물림의 산물일 수 있다. ‘나도 당했는데 너도 당해봐라’ 는 식이다. 이런 사고로는 해결할 수 없다. 좀 구차하고 민망하지만 모든 의료인들이 자신이 앞장서 태움이라는 저질스러운 짓을 없애겠다는 다짐이라도 해야 할까?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의사, 나이팅게일 선서를 하고 촛불을 들고 캡을 쓴 간호사라는 전문직 직장인이 이런 더러운 문화에 사로잡혀 동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음습함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천사의 미소 속에 감춰진 악마의 눈빛과 행동, 그들만의 ‘태움’은 언제쯤 없어질 수 있을까.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