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11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됐다. 일치감치 예고돼 왔지만 전직 대법원장이 범죄 혐의로 검찰에 출석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사법부를 이끄는 수장에서 범죄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한 양 전 대법원장은 이제 구속을 걱정해야할 처지에 내몰려 있다. 검찰 출석에 앞서 대법원 정문 앞에 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면서 국민들에게 송구하다면서도 사법농단 사건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보지 말아달라면서 억울함도 호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양 전 대법원장을 아는 이들 상당수도 마찬가지겠지만 필자 역시 양승태하면 가장 먼저 ‘산’을 떠올린다. 40여년 이상을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온 양승태 전 원장은 법조계를 대표하는 산악인으로 꼽힌다. 소문난 등산 애호가로 전문 산악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산을 잘 타는 것으로 유명하다. 필자도 양 전 원장이 현직 대법원장 시절 법조를 출입하면서 여러차례 등산을 함께 한 기억을 갖고 있다. 5년전쯤 양 전 원장을 비롯해 법원 행정처 간부들과 기자들이 함께 서울 근교의 산을 올랐을 때 저질 체력의 소유자인 기자들이 양 전 원장의 빠른 산행 속도를 따라잡으려다 크게 고생을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산 정상에 올라 막걸리를 마시면서 양 전 원장은 “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인생을 산에서 배웠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자연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배웠다는 양 전 대법원장과 사법농단 의혹의 정점으로 지목돼 검찰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된 지금의 양 전 원장의 이미지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생겨나고 말았다.

양 전 원장이 검찰의 포토라인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신이 근무했던 대법원 앞에서 입장을 밝힌데 대해서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한때 사법부의 수장이었던 자신을 따르는 후배 법관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면서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검찰에 대해 일종의 선전 포고를 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이처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제 관심은 양 전 원장의 친정인 법원이 과연 구속 영장을 발부할 것인가에 쏠려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받고 있는 혐의는 무려 40여가지에 이른다. 우선 청와대의 부탁을 받아 일제 강제징용 소송을 고의로 지연시키고 원고 패소로 판결을 뒤집어주는 등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댓글사건과 옛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 확인소송 등 청와대 관심 사건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판사 불이익 문건과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혐의도 있다.

이같은 혐의 때문에 양 전 원장은 사법부의 삼권 분립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정치 권력에 줄을 댄 주동자로서 국가 질서를 흔드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사법부가 망신창이가 되고 국민들의 불신을 받는 처지가 된데 대해 전직 사법부 수장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법원이 당시 정권과 교감하고 주요 재판과 사건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것은 입법부와 행정부간의 자연스런 협조 관계가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양승태 전 원장도 결국 적폐 청산이라는 대의 명분 아래 전 정권 부역자로 낙인이 찍히면서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과거 사법부에서 행해진 부적절한 행위나 관행들에 대해 양 전 대법원장이 도의적 책임을 질 수는 있지만 이것이 법적으로 처벌받을 사안이 되느냐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사법농단 의혹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각에 많은 이들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실체적 진실은 하나인데 이를 해석하고 재단하는 방법이 너무 많다는 불만도 터져 나온다. 분명한 것은 사법 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사법부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올바른 판결을 내리기 위해 밤낮으로 애쓰는 수많은 판사들의 초심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사법부는 이제 새 옷을 갈아 입고 국민 앞에 다시 서야 한다. 양승태 전 원장이 평소에 그토록 좋아했던 산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듬직하고 넉넉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사법부를 보고 싶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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