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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제작 영화사 집)이 공개한 티저 포스터.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이래 370만명을 돌파하며 아직도 고공행진 중입니다.

국가부도의 날이 이처럼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일까요?

국치의 날이라고도 불리우는 IMF구제금융을 받은 것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서 21년 전 그때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기 때문일 겁니다.

선임기자의 시선에서 영화 국가부도의 날, 그리고 IMF구제금융 당시 상황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양봉모 선임기자가 연결돼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주제는 좀 색다른데요. 영화 이야기예요?

[기자]

영화이야기지만 실화죠.

나라 경제가 무너질때 우리 관료들은 얼마나 얄팍했고 무능했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저도 영화를 봤는데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더라구요.

국가부도까지 남은 일주일의 상황 속에서 위기를 막으려는 사람(김혜수)과 위기에 베팅하는 사람(유아인), 회사와 가족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허준호)까지 1997년 IMF 위기 속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김혜수가 연기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은 가장 먼저 국가부도 위기를 예견하고 대책을 세운 인물이죠.

유아인은 경제위기에 개인투자자를 모아 배팅하는 금융맨 윤정학을 연기했구요.

허준호는 회사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가장 갑수 역을 맡았습니다.

밉상으로는 조우진 재정국 차관인데 당시 관료의 전형적인 모습, 매국노처럼 나옵니다.

영화에 나오는 수치는 영화적 설정이 아니라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다큐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앵커]

당시 IMF를 겪었던 사람들은 생생히 기억하겠지만 젊은이들은 잘 모르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IMF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이어갈까요?

[기자]

1997년 12월에 우리나라가 국가부도 위기에 처해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일입니다.

1980년 중반부터 이어진 호황기가 끝나고 기업들의 부도가 이어지면서 나라가 무너질 상황에서 IMF 관리 체제에 들어 갔고 2001년 8월 23일을 끝으로 IMF 관리 체제가 종료된 국가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앵커]

당시 우리나라가 IMF지원까지 받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을텐데요.

80년대 중반부터 IMF 직전까지 한 10년 정도는 우리나라가 엄청나게 잘 나가던 때 아닌가요?

[기자]

엄청나게 잘 나갔죠.

아시아의 네 마리용이라고 불리면서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함께 엄청난 호황을 이어가던 시기였습니다.

지금도 우리 경제가 가장 좋을 때를 꼽으라면 88올림픽이 열리던 때라고 말 하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는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구요.

나중에 우리나라보다 먼저 국가부도 사태를 맡게 되는 태국 필리핀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도 다 좋았습니다.

그 정점이 88년인데요.

이때는 3저 시대였습니다. 달러 금리 유가 이 세가지가 낮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3저 호황시대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달러 가치가 낮으니까 상대적으로 원화 가치가 높고 그래서 수출은 잘되고 금리가 낮으니까 기업들은 차입경영을 하게 되는 거구요. 유가가 낮으니까 공장이 잘 돌아가죠. 이 차입경영을 통해 공장을 돌리고 유가는 낮고 그러니까 많은 물건을 만들어서 수출을 잘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최대 호황기라고 할 수 있죠.

[앵커]

그런데 태국을 시작으로 잘나가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우리나라보다 먼저 IMF구제금융을 받게 되잖아요. 그 이유는 뭔가요?

[기자]

동아시아 국가들이 줄지어 부도사태를 맞게 된 이유에 앞서서 그때 당시 경제상황이 왜 좋았느냐를 좀 더 설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1985년에 프랑스·독일·일본·미국·영국간에 합의가 이뤄집니다.

이게 바로 플라자합의인데요. 이 합의는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엔화와 마르크화를 평가절상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레이거노믹스'실패에 따라 미국의 무역적자가 심각해지면서 미국이 일본 등을 압박한 합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미국은 무역수지 개선 내세우며 중국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플라자 합의에 따라 독일의 마르크화는 1주일 만에 약 7%, 일본의 엔화는 약 8% 정도 평가절상되었고, 달러 가치는 계속 떨어져 2년 후에는 약 30% 이상 평가 절하되었습니다.

이로인해 미국의 무역적자와 경제상황은 개선되었지만, 독일과 일본은 오랫동안 경제불황을 겪게 됩니다.

일본은 이때부터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합니다.

일본은 국내 생산에서의 이익이 줄어들자 값싼 동남아시아에 현지 공장을 세우고 투자를 늘려갔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에는 1985년 플라자 합의와는 반대로 엔화의 평가절하를 위한 G7 국가 간 합의(역플라자 합의)가 이루집니다.

이제 역전이 된 겁니다.

1995년 일본의 불황을 살리기 위해 '역플라자 합의'가 있은 후, 일본 경제가 살아나며 자본들이 다시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태국 정부는 투자에 흥미를 잃고 빠져나가는 자본에 대항해서 바트화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태국은 1997년 7월 '바트'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국가부도 사태를 맞게 됩니다.

태국 바트화에서 출발한 외환위기는 동남아시아를 휩쓸고 우리나라까지 삼키게 됩니다.

서로 비슷한 경제구조였기 때문입니다.

[앵커]

영화에서 보면 국가부도를 한국은행 김혜수는 알고 있는데 재정부 차관 조우진은 잘 모른 척 하면서 IMF구제금융을 받아야한다고 하고 있단 말예요. 정말 몰랐을까요?

[기자]

다 알고 있었죠.

우리나라는 수출국가잖아요. 그런데 95년 수출이 1천290억불이예요. 그런데 경상수지가 폭락합니다. 무역수지 적자는 물론이구요. 96년에는 환율이 올라갑니다.

그 유능한 관료들이 환율이 올라가고 경상수지 적자가 눈에 보이는데 나라 망하는 게 안보였겠습니까. 다 알고 있었죠.

특히 기업들이 연이어 부도를 맞습니다.

97년 1월 23일 한보철강 (현 현대제철) 부도

1997년 1월 30일 한보건설 및 한보그룹 최종 부도

1997년 3월 20일 삼미그룹 부도

1997년 4월 22일 진로그룹 부도

1997년 5월 20일 대농그룹 부도유예협약

1997년 6월 2일 한신공영그룹 부도

1997년 7월 15일 기아그룹 협조융자 신청, 사실상 부도

1997년 10월 15일 쌍방울그룹 부도

1997년 10월 16일 태일정밀 부도

1997년 11월 1일 해태그룹 부도

1997년 11월 4일 뉴코아 부도

1997년 12월 5일 고려증권 부도

1997년 12월 6일 한라그룹 부도

1998년 1월 14일 나산그룹 (현 인디에프) 부도

1998년 1월 18일 극동건설 부도

1998년 5월 12일 거평그룹 부도

1998년 7월 1일 한일그룹 부도

2000년 10월 30일 현대건설 1차 부도

2000년 11월 8일 대우자동차 최종 부도 처리

2000년 11월 10일 동아건설 부도

이렇게 대기업들이 무너지는데 정부가 국가부도사태를 몰랐을 리가 없죠.

[앵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손을 쓰지 않고 있다가 국가부도사태에 까지 이르게 됐는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

당시에 수출 사정이 나빠지면서 1996년 330억 달러 수준이었던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1997년 200억 달러로 급격히 줄어들면서 빨간등이 켜집니다.

그런데도 김영삼 정부는 ‘선진국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국민 1인당 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섰다고 난리를 치고 1996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죠.

그런데 수출 실적이 나빠지고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원화 가치가 떨어지자 국민 소득 ‘1만 달러’가 위협받게 되죠.

그래서 OECD 가입국의 체면을 지키지 위해 달러를 방출하면서 억지로 원화 가치를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했던 게 외환위기를 불러온 것입니다.

기업들은 무리하게 빚을 내는데 관치금융이 한 몫을 했고 정부는 OECD 가입을 지키려는 선진국병에 걸려서 나라를 망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앵커]

IMF구제금융의 원인을 정리해보면 1.외환 보유고 관리 실패, 2,환율 운용 정책 실패, 3.정경유착으로 인한 부정 대출, 4.금융기관과 대기업 부실 경영, 5.통치자의 무능, 이렇게 볼 수 있겠군요.

21년 전 일이지만 분통이 터지는데요. 당시 책임자들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돌아가셨죠.

김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에서 경제 위기의 책임을 관료들에게 돌렸구요.

경제 사령탑이었던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은 ‘외환위기 환란을 초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일상적인 정책 판단을 처벌하면 우리나라 경제정책 전부가 문제 된다”는 게 무죄 선고의 이유였습니다.

[앵커]

국민의 비탄의 길로 몰라넣고도 아무도 책임을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네요. 우리나라는 IMF구제금융에서 가장 빨리 졸업한 나라잖아요.

그 이면에는 국민들의 금모으기같은 국민적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자]

‘금가락지모으기운동’ 시발점이 돼 225톤, 21억7,000만 달러에 달하는 금이 모아졌습니다.

국민들이 금을 무상 기부한 것은 아닙니다. 기부를 하면 돈으로 바꾸거나 기부를 선택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국민 349만 명이 금을 내놨습니다.

가수 김건모는 트로피를 몽땅 기부 하였고 금 182돈 현재 시세 3천만원에 달하는 금을 기부했습니다.

그 금을 무역회사는 수출을 했습니다. 그러나 금은 98년 이후 몇 배나 상승하죠. 당시 금을 수출하지 않고 국가 금고에 넣었다면 국가 경제적으로 유리 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또 화가 나는 것은 대기업들이 금을 수출입 하는 과정에서 탈세를 저질러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이 2008년에서야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나 탈세에 관여한 대기업과 은행 관계자들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앵커]

21년 전 국가부도의 날을 되짚어 봤습니다. 가슴 아픈 일인데요.

현재의 우리 경제 사정도 녹녹치 않습니다. 선임기자의 시선으로 정리해주시죠.

[기자]

1997년 11월 21일 IMF 구제 금융 신청 이후 우여곡절 끝에 2001년 8월 23일 195억 달러를 조기 상환하면서 IMF의 관리 체제는 종료되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금모으기에 나서고 회사가 없어지고 길거리에 나앉은 국민들의 피와 땀과 아까운 목숨이 있었습니다.

IMF가 외적요인이든 내적요인이든 고통은 국민들의 몫이었습니다.

나라경제가 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관치금융 정경유착, 비효율적 경영 등이 자리합니다.

2018년 현재, 각종 경제지표는 나아졌습니다. 반도체 석유화학 등 5대주력산업이 수출을 주도하고 있고 경상수지도 높습니다.

하지만 체감 경기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경제는 10년 주기로 크게 변한다고 볼 때 앞으로 10년 후를 보는 촘촘한 국가경제전략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IMF구제금융같은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를 통해 현재 우리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이에 맞는 올바른 경제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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