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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 제주 관음정사 문화부장, 전 동국대 강사 혜달 스님

*앵커 : 양창욱 정치부장

*프로그램 : BBS 뉴스파노라마 [오늘 저녁, 우리 스님]

양 : 매일 저녁 한 분의 스님을 만나 뵙니다. 오늘 저녁 우리 스님 순서입니다. 오늘은 제주 관음사 문화부장이신 혜달 스님 만나 뵙겠습니다. 스님, 나와 계시죠?

혜 : 네 안녕하세요.

양 : 네 스님

혜 : 그런데 저는 관음사 문화부장이 아니고 관음정사입니다.

양 : 네, 관음정사 문화부장이라고 소개를 해 올려야 하는데 오타가 났네요, 죄송합니다. 관음정사 문화부장이신 혜달 스님 모셔보겠습니다. 어제 해월당 봉려관 큰스님의 발자취를 재조명하는 행사가 열렸다고 들었습니다. 우선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지만, 봉려관 스님이 어떤 분인지 소개해주시죠.

혜 : 네, 제주불교는 아픔을 안고 있습니다 사실은...

양 : 네.

혜 : 1702년부터 제주 목사 이형상이 불교를 해체시킨 다음부터 봉려관 스님께서 1907년 10월 8일 해남 대흥사에서 계를 받기 전까지 200년 동안 종교로서의 불교는 없었습니다.

양 : 아이고, 그렇죠. 참 아픈 역사죠.

혜 : 네.

양 : 무불시대라고 그러죠. 보통...

혜 : 네. 그런데 1909년 봄, 현재 제23교구본사 관음사를 창건하시면서 제주 불교는 싹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봉려관 스님께서 그때부터 무슨 일을 하시냐면 이제는 폐사된 사찰들을 다 중창하십니다. 법화사, 불탑사 등등 이렇게 많은 사찰을 중창하시고요. 새로운 사찰을 관음사를 중심으로 해서 동서남북에 창건 하십니다. 그리고 중간에 제주 중심지에 중앙포교당을 창건하셔서 본격적으로 제주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봉려관 스님께서는 관음신앙을 위주로 해서 근대 제주불교를 재건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 4대 관음성지가 있잖아요? 그래서 저의 생각은 제주 관음정사가 더해져서 한국 5대 관음성지가 돼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양 : 그렇군요, 한마디로 우리 봉려관 큰 스님은 제주 불교의 중창조이시죠.

혜 : 네.

양 : 이번 세미나에서 여러 가지 주제 발표가 있었던 것 같은데, 세미나 내용도 구체적으로 자세히 좀 소개해주십시오.

혜 : 이번에 세미나 발표에서 다섯 가지 봉려관 스님들에 대한 잘못된 내용이, 크게 다섯 가지가 있는데, 이걸 바로 잡았습니다. 이 다섯 가지 문제는 한 학자의 추측과 억측, 그리고 객관적인 시각을 잃어버린 억지 논리 전개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실은...

양 : 어떤 건지 한 두가지만 소개해주십시오.

혜 : 우선 봉려관 스님께서 계를 받고 산천단에서 운대사에게 가사를 받는다는 내용인데요, 그런데 이건 봉려관 스님께서도 이 스님이 누구이신지 모른다고 구술을 하셨고요, 후대 저희 스님들도 전부 그렇게 알고 있고, 제주도에 계시는 원로 스님들도 다 그렇게 알고 계시는데, 이 학자가 운대사를, 뜬금없이 어떤 스님을 하나 딱 갖다 붙입니다. 이 부분을 바로 잡았고요. 다음은 관음사 창건년도와 창건자에 관련된 것인데, 겁니다. 창건년도가 그 동안에 딱 정해지지가 않고 이설이 많았는데 '1909년 봄'으로 창건년도가 이번에 고증이 됐고요, 관음사 창건자로는 봉려관 스님이 거듭 확인됐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봉려관 스님 은사가 유장 비구니인데 이 학자가 봉려관 스님 은사를 느닷없이 비구를 갖다 넣습니다. 우리나라 비구니사에 비구니가 비구를 은사로 출가한 그런 일이 없습니다.

양 : 네, 그런 전례가 없죠.

혜 : 네, 그런 전례가 없는데 이런 부분, 또 봉려관 스님이 입적하게 된 원인, 입적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항일운동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봉려관 스님 입적지 문제가 있었는데, 또 이 학자가 갑자기 산천단 소림사라는 말을 해서 이것을 고증을 해서 관음사로 고증이 됐습니다.

양 : 그 학자분은 누구세요? 도대체?

혜 : 한 모씨라는 학자인데, 계속 봉려관 스님에 대해 맞지 않는, 근거를 가지고 말을 하면 저희가 수용할 수 있겠지만 전혀 근거도 없는 논리를 가지고 추측하고 억측해가지고 봉려관 스님 생애를 완전히 망쳐놓은 겁니다.

양 : 그 분은 왜 그러실까요?

혜 : 그러니까요. 저희도 왜 그러시는지, 모종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저 추측만 할 뿐이지 본인이 말을 안 하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양 : 네, 이번 세미나에서 또 무엇보다 주목됐던 게 봉려관 스님께서 1918년 법정사 항일항쟁에 독립자금을 전했다는, 이런 발표가 있었죠?

혜 : 네, 그런데 봉려관 스님의 항일운동,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들이 지금까지 좀 나왔습니다. 그런데 봉려관 스님부터 연구를 했어야 했습니다. 봉려관 스님께서 법정사를 창건하실 때 독립운동 투사를 숨겨주기 위해서 창건을 했다, 저는 그렇게 어른 스님들께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봉려관 스님께서 대흥사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은 모습을 보십니다. 대흥사에서. 그래서 법정사를 창건하셨고요, 방동화 스님이라고 계십니다.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역이시죠. 그 분이 후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방동화 스님께서는 법정사가 항일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음성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위험했을 때는 다 숨겨주고 양식이라든가 사람들을 보내야 할 때는 사람들을 보내주시고 자금도 보내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고, 이번에 좀 다른 구술이 나왔는데요, 봉려관 스님께서 방동화 스님께 군자금 모은 걸 갖다드리면 방동화 스님이 제주도 외에 있는 항일운동 조직에게 이걸 전달하는, 이 과정에 대한 구술이 이번에 새롭게 나왔습니다. 또 봉려관 스님께서 항일운동 하실 때 군자금을 제주도에만 전달한 게 아니고 대흥사에도 전달하십니다. 그래서 대흥사를 통해서 중앙조직으로 흘러들어갔는데 제가 그 부분을 보니까 1900년도에는 항일운동 자금이 원흥스님을 통해서 전달이 된 것 같고, 대흥사에 만장이 조직이 됩니다. 박영이 스님에 의해 이 만장이 조직된 다음부턴 박영이 스님을 통해서 중앙조직으로 흘러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박영이 스님은 봉려관 스님 시대에 제주도에 불사가 있었을 때 마다 여러 번 제주도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가 있었고... 그래서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나갔어요 독립자금이.

양 : 네네, 그렇군요. 봉려관 큰 스님의 항일운동, 이건 좀 더 연구가 돼야 할 과제이군요. 알겠습니다. 스님, 생방송 뉴스 시간 이라서 오늘 여기서 줄여야겠습니다. 제가 또 모시겠습니다.

혜 : 네, 감사합니다.

양 : 제주 관음정사 문화부장이신 혜달 스님과 얘기 나눠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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