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자, 고뇌하는 인간과 대면하다” 이 책을 제가 보고 든 느낌은 무엇보다도 독특하고 재미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섯 작가들과 그들이 쓴 작품의 주인공과 스토리들을 분석할 뿐 아니라 이 모든 내용을 장자의 시각과 불교의 시각에서 풀어내고 여기에 저자 자신의 인생과 시각까지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글이 가능했나요?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이게 저한데도 신비한 체험이었습니다. 쓰려고 계획을 잡거나 주제를 잡거나 플롯을 짜거나 그런 것은 없구요. 심지어 그 5명이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처음에 알퐁스 도데를 쓰다가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생각나고 가브리엘 마르케스를 쓰다가 다시 엔도 슈사쿠가 생각나고 엔도 슈사쿠를 쓰다가 카뮈가 생각나고 그랬는데, 어째서 그랬던 것일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제가 평생 불법에 관심을 갖고 철학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게 된 이는 제가 힘들어서 그랬어요. 마음에서 어떤 문제를 만나면 이 문제가 어떤 문제인지 알고 싶어서 불법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불교철학을 공부하고 나면서 아주 젊은 시절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불교에 관계된 책을 보거나 사찰에 가거나 불교에 관한 글을 쓰거나 뭘 하든 위로를 받았어요. 이 책도 그런 신비한 체험이면서 좀 인연이 독특하게 느껴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쓰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이번 책의 경우는 어쨌든 존재가 시킨 것 같다, 업이 한 일인 것 같다, 자연으로 한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도데 책을 읽고 있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내가 봐도 아름다울까. 이 사람이 어떻게 아름다움을,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캐내는 눈을 갖고 있을까 이럴까 그렇게 연구하다가 틀림없이 이 사람은 큰 아픔을 겪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아파 보지 않은 자가 보는 세상과 아픔을 겪고 아픔을 이긴 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다른 것 같아요. 그러다가 도데가 굉장히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스스로 승화시켰을까 관심을 갖고 작품을 유념해서 보긴 했는데 그게 어느 날 갑자기 써진 거죠.

2. 책에 등장하는 작가 5명의 특징을 한 사람 한 사람 예리하게 짚은 것 같습니다.

그게 저도 신비한 것인데요. 예를들면 마르케스 책을 대학 때 처음 봤으니까 30년 전 아닙니까. 그리고 나이 먹고 40 넘어 한 번 더 봤죠. 그런데 본지는 오래됐는데 그게 제 머릿속에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100년에 걸쳐 살아낸 그 후손들의 이야기가 독같이 전개되지만 그게 다 꿈이고 환이다 이거에요. 그야말로 불법의 공사상을 그리고 장자의 나비의 꿈을  마르케스처럼 잘 푼 문학작품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실 그 때 읽을 때도 감탄했습니다.

3. 서양에는 동양과는 사고방식도 많이 달라서 인간의 삶의 방식도 많이 다르다고 어렴풋이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텐데, 사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삶과 죽음 속에서 뭔가 고통을 겪으며 극복하려 애쓰며 살아갔다고 하는 점을 불교와 장자의 시각으로 풀어본 첫 시도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카뮈가 그렇게 하는 것은 불교의 고성제(苦聖諦)와 너무나 닮았죠.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자각하는 그 순간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대단한 명언입니다. 서양에 살든 동양에 살든 어떤 역사적 체험 속에서 살든지 간데 인간이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세상과 살면서 마주하는 문제들을 분석적으로 생각하느냐 관계적으로 생각하느냐 차이는 있지만 세상과 나의 관계를 고민하고 내가 만나는 문제를 고민하고 내가 누구냐, 무엇이냐, 세상은 어떤 것이냐, 그래서 내가 이 세상과 더불어 어떻게 사는 게 온당한 길이냐 이걸 고민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마도 공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뭔가를 배우기 위해 태어났고 이번 생이 무언가 기회를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뭘까를 탐구하면서 지난들을 돌아본 것이 이 책이에요. 그러니까 지난 날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돌아본 수많은 인연사들이 저는 최선을 다해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목적의식을 갖고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까 그 인연사들은 나의 삶의 일정한 흐름이었고 흘러간 거였는데, 그 인연사들이 나에게 뭘 알려주고 있더라는 거죠. 그 때 그 인연사는 이걸 알려주기 위해서 왔구나 그런 정리가 조금 되는 거죠. 그래서 제 과거 히스토리는 그런 맥락에서 들어간 겁니다.

4. 엔도 슈샤쿠 작품에서는 마리아 관음 얘기가 나와요. 억지로 개종했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다른 이가 볼 때는 변절했다고 하지만 그런 비난을 참아내지요. 마리아 관음이란 어떠한 것인지, 그것이 오늘날 무엇을 시사한다고 보시는지요.

그게 바로 역사죠. 일본의 역사죠. 물론 그 역사 이면에 담긴 일본 카톨릭 신자들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거의 서바이벌에 가까운 노력이 눈물겹고 어떤 면에서 아름답고. 지금도 그래서 그런지 일본 카톨릭은 세속화되지 않고 굉장히 고급하고 고상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보이는데, 마리아 관음 그게 일본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 모습이지요. 그 사람들이 고뇌했음을 보이고 그 사람들이 고뇌하면서 보인 뭔가를 저는 본 건데, 관음을 선택했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마리아의 아바타이지요. 버전을 관세음보살로 상정한 게 재미있잖아요. 관세음보살은 세음을 보는 보살님이죠. 세상의 소리를 듣는 보살이 아니라 보는 보살이고 지혜로 보고 구제하는 보살인데 일단 자비롭지요. 그런데 슈사쿠가 그런 말을 합니다.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은 다르다고. 그런데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전파된 종교적 분위기는 구약의 하느님입니다. 무서운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 그러나 신약의 하느님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죠. 뭔가 위로받아야 하고 자기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그런 하나님이 필요했다는 건데, 있는 그대로 봐준다는 것이 너무나 장자와 닮았다 싶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심판하는 보살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여기서 장자의 중요한 개념이 하나가 나옵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시비, 선악, 미추를 가릅니다. 각자 입장에서 가르지요. 이쪽에서 보면 이것이 이것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이것은 저것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각자 입장에서 보는데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누구나 각자 입장이 있고 그 입장에서 시비를 한다. 그런데 하늘에도 입장이라는 게 있는가, 그걸 장자가 이명(以明)이라고 하거든요. 하늘은 입장이 없기 때문에 명으로 밝힐 뿐 비출 뿐이에요. 밝히기 때문에 각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걸 인시(因是)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엔도 슈사쿠를 바라볼 때 하늘은 엔도 슈사쿠 입장에서 바라보고 마르케스는 마르케스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게 이명이 주는 시각이라는 거죠. 저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노력했는데, 물론 작가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죠. 다만 저에게 그렇게 보였고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싶었다, 이렇게 까지가 제가 알 수 있는 것이죠.

5. 각득기의(各得其意)를 말하면서 상정(相正)을 따지지 말고 자정(自正)을 하라는 내용을 끌어낸 점도 흥미롭습니다.

각득기의라는 말은 정자에게 있어서 핵심일 수도 있습니다. 장자의 기본 입장은 인간은 자연물이고 자연에 속해있어요. 자연은 다만 균형을 잡을 뿐 시비하지 않지요. 균형을 잡는 것을 천예, 하늘의 무지개라 표현해요. 천예의 조화 속에 사는 각 존재자들은 각각 자기 방식에 마땅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겁니다. 각자 생존의 방식, 실존의 방식, 사고의 방식이 다 있다는 거죠. 우리도 그렇지요. 모든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옳다고 생각한다고 안할 때 조차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는데 누가 누군가를 바꾼다는 것, 이게 상정(相正)이죠, 상대를 똑바로 하겠다는 건데 그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존재자 간의 관계망은 상정이 아니라 상존(相尊), 서로를 존중하면서 스스로 올바르게 될 것, 자정(自正)입니다. 거기에 맡겨라. 이게 장자가 권하는 방식인데 그게 대단히 엔도 슈사쿠나 여러 작가들에게서 그런 점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6. 이 책이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시는지요.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얻으면 되겠지요. 유마경에 보면 무진등(無盡燈)이라는 말이 나와요. 다함이 없는 등불. 등불의 불을 옆에 있는 사람에게 나눠주면 세상을 조금 더 밝힙니다. 그리고 또 밝혀요. 이렇게 점점 밝혀가면 내 등불은 전혀 손실도 없고 줄어든 게 없는 거지요. 바로 무진등과 같은 것이 사랑이고 세상과 제대로 이어지는 거고 정말 법을 전하는 거고 저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자기 마음이 행복해야, 브레히트가 그런 말을 했지요,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고, 스스로 마음이 커진 사람이 남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조금이나마 문제의식을 갖게 되고 자기 삶을 위로받고 자기가 받은 위로를 좀 나눠줄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7.앞으로 계획을 간단히 말씀해 주실까요.

저는 평생 시시하지 않은 것으로서 읽을 수 있는 불경이 산더미같이 있다는데 환희심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런데 환희심만 느끼고 읽지는 않았는데 그 읽기를 올해부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지난 여름부터 불전만 보고 있습니다. 선불교를 중심으로 보고 있구요. 선불교는 마음을 대놓고 중점 문제로 삼습니다. 어떤 불교도 마음을 중점적으로 놓고 삼지 않아요. 혹자는 유식이 있지 않느냐. 유식은 식을 애기하지 심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심·의·식을 분석하지 바로 선불교처럼 바로 직지인심 견성성불 하며 마음의 문제로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리달마부터 마음을 어떤 중심문제로 놓고서 모든 걸 푸는 게 그게 장자와 굉장히 접합점이 되거든요. 장자도 그렇습니다. 성심, 짓는 마음이죠, 성심에서 시작해서 허심으로 끝나요. 심의 문제에서 역시 선불교가 그 길을 가고 있더군요. 보리달마부터 황벽까지 마치고 유마경을 마쳤습니다. 그래서 임제까지 보고 나면 아마 금강경에 대해 다시 보면서 뭔가 인연따라 쓰게 되면 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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