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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2018년 8월 17일(금) 오전8시부터(라디오)
        (TV는 다음주 화요일 밤10시40분, 수요일 오후3시40분, 토요일 밤10시40분)
주제: 철학의 빈곤과 우리 사회의 극단적 사고
진행: 이각범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패널: 엄정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


엄정식:
"마르크스가 얘기한 철학의 빈곤은 보다 테크니컬한 뜻이었지만 요즘의 속물주의.물질만능주의와 연결할 수도 있을 것"
"철학의 빈곤은 너무 얕게 보고 좁게 보고 눈앞에 있는 것만 본다는 뜻"
"우리는 전근대.근대.탈근대가 동시에 존재, 철학이 빈곤하다 탓해서는 안되는 구조적 이유가 있어"
"오늘 우리는 단순히 철학의 빈곤이 아니라 일종의 질병을 앓고 있어, 질병의 실체가 뭔지 좀 더 고민해야"
"권리-의무 검증할 기회가 없으니 일단 저지르고 본다는 사고방식 팽배해져"
"대안을 내놓는데 서두르기보다 자신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작업부터 시작하자는 게 칼 포퍼의 핵심"

이한구:
"철학이 빈곤한 시대의 특징은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인 反정신, 감성적.충동적인 反지성, 자기중심적인 反사회"
"‘빈곤의 철학’을 쓴 프루동을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이라고 패러디하며 피상적이라고 비판"
"철학의 빈곤으로 너무 즉흥적이고 경박하고, 피상적이고 깊이가 없고, 시대가 혼란스럽고 어지러워"
"파편화된 현대사회에 구심점 생기게 하려면 ‘비판적 이성’ 고양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
"‘비판적 이성’이란 독단적.배타적.충동적 사고 반성해 열린 마음으로 논의하고 비판함으로써 진리에 더 다가설 수 있다는 태도"
"우리는 계몽주의가 생략된 채 근대시민사회로 넘어와, 지금이라도 진정한 계몽주의 운동 필요해 "

 

*오프닝*

이각범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님(이하 이각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칼 만하임(Karl Mannheim)이라는 사회학자는 사회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인간 사고(思考)의 근본적인 한계를 보았습니다. 이를 존재피구속성(存在被拘束性)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가지는 자기 입장이 사실은 자기 본래의 생각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만들어진 수동적 생각이라는 것을 대개는 인지하지 못하고 삽니다. 우리 사회에는 세대 간의 국가관, 세계관이 극명하게 차이 납니다. 그 이유는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세대에 따라 전혀 다른 사회적 경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뺏기고 삽니다. 보통 사람들은 평균 6분마다 한 번씩 휴대폰을 새로 들여다 본다고 합니다. 그만큼 생각은 잘게 쪼개집니다. 휴대폰으로 들어온 정보 중에서 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은 바로 거부하고, 나와 같은 생각만 좇아가다 보면 남의 생각을 수용할 수 있는 생각의 깊이와 넓이는 사라집니다. 근본은 놓치고 지엽만 추구하는데서 철학의 빈곤이 드러납니다. BBS 화쟁토론, 오늘은 ‘철학의 빈곤과 우리 사회의 극단적 사고’ 라는 주제를 가지고 전문가분들과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 1부 ]

이각범:
예, 오늘 이 자리에는 두 분 전문가 모셨습니다. 먼저 엄정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님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엄정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님(이하 엄정식):
안녕하십니까?

이각범:
그리고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님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한구 경희대학교 석좌교수님(이하 이한구):
네, 안녕하십니까? 네.
 
이각범: 
자, 오늘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 시대의 철학의 빈곤 참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에 언제부턴가 자리 잡았던 극단적 사고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협소하다보면 이것이 옳으면 저것은 틀리다 라고 하는 흑백논리에 빠지거나 네편 내편을 나누는 진영논리 같은 것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극적으로 치달을 때 우리는 사회 전체가 극단적 사고에 빠졌다 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시대 유독 철학의 빈곤이라는 단어가 탄식처럼 퍼져나가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흔히 얘기하는 철학의 빈곤 이거 어떻게 정리하는 것인지 두 분께 각각 여쭤보겠습니다.

엄정식:
철학의 빈곤이라는 말 자체를요 그 어떤 직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철학을 뭘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제 생각에 철학을 만병통치약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빈곤이 아닐 때가 없겠죠. 늘 질병이 있으니까. 그런데 철학을 일종의 전문적 지식이라든지 학문의 새로운 장르 이렇게 해석하면 좀 과장돼서 표현되는 적도 있다 더러 그런 생각이 드는 그런 거예요. 그래서 예를 들면 철학을 아주 크게 요새 얘기하는 사회학이나 경제학, 종교까지 다 포괄할 때는 모든 게 철학적 문제가 아닌 때가 없지 않습니까? 이제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손에 찬 시대가 없었다. 특히 예를 들면 이제 플라톤이나 뭐 아우구스티누스, 헤겔 이런 관점 특히 마르크스, 이런 포괄적 철학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늘 빈곤하게 보이겠죠, 시대가. 그런데 그러나 이제 철학의 역할을 조금 더 전문적으로 좁혔을 때 너무 과장된 표현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라는 거죠.

이각범:
예, 일단 과장된 표현이라고 하는 엄정식 교수님의 말씀이 지금 철학의 빈곤을 걱정하는 저희들을 상당히 안도하게 합니다만 우리 이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한구:
그러니까 철학의 빈곤을 말하는 이 시대의 특징에 대해서 전 우선 그 세 가지 특징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 시대는 균형 감각이 파괴된 극단의 시대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선 우리 시대의 특징으로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고 상업주의적인 특성, 그러니까 반정신적 가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는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충동적인 특징을 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역시 또 반지성적인 특징이다 이렇게 규정할 수 있겠고요. 세 번째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다, 말하자면 반사회적이다 라는 특징을 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런 특징들을 아울러서 우리 시대 철학의 빈곤이라는 그런 용어가 사용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각범:
예, 제가 철학의 빈곤이라는 단어를 제일 먼저 접한 것은 칼 마르크스의 도이치 이데올로기, 우리말로 ‘독일 이데올로기’ 라고 번역돼 온 그 책에 쓰여 있는데요. 그 책에서 지금 이한구 교수님 지적하신 세 가지 특징 중에서 가장 그 칼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은 것이 물질주의적, 그러니까 영어로는 snovish 라고 그러죠, 속물근성 그거를 뽑았는데요. 저가 20대에 이제 마르크스를 추종하던 사람으로서는 바로 이 지적이 아주 굉장히 예리하게 폐부를 찌르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철학의 빈곤이라는 것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균형 감각이 파괴되고 너무나 즉물적인 그러한 속물적 근성에 대해서 지적하시면 마르크스 때부터 아주 잘 지적이 되신 것 같고. 근대사회에 이르러서 감성적이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이고 또 너무 저 이기주의적이라고 그럴까요 또는 egocentric, 자기중심적인 그런 경향은 이제 20세기, 21세기 들어오면서 오히려 강화되는 것 같은데요. 철학사적으로 보면 이 철학의 빈곤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인 게 어느 때부터입니까?

이한구:
철학의 빈곤이라는 바로 그 제목의 책을 칼 마르크스가 1847년에 불어로 출간했습니다. 그래 이제 이때부터 철학의 빈곤이라는 용어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었는데 마르크스는 이 책을 바로 그 전년도에 나온 무정부주의자, 당시에 그 유명을 떨쳤던 무정부주의자 피에르 조셉 프루동의 저서 ‘빈곤의 철학’이라는 제목을 패러디 해가지고 ‘철학의 빈곤이다’ 이렇게 이제 그 제목을 붙인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각범:
프루동의 그 책을 패러디 했는데 사실은 프루동 비판서죠.

이한구:
그렇습니다.

이각범:
프루동이 철학이 빈곤하다.

이한구: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프루동을 비판하면서 결국 그가 과학적 변증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또 사변 철학에 빠져있으며 경제적 지식의 부족으로 교환가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유토피아주의에 서 있는 소부르조아 사회주의자에 불과하다 이런 비판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그 당시 프루동은 1840년대 ‘재산이라는 무엇인가’ 하는 그런 저서를 출간했었는데, 이 때 프루동은 재산이란 도둑질한 물건이다 라고 규정하면서 자본가의 사적소유를 원천적으로 이제 부정했습니다. 거의 그런 무정부적 사상은 제1인터네셔널 조직이나 또 파리 꼼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또 마르크스는 일변에 거기에 동의하지만 그러나 프루동의 그 사상은 여전히 피상적이다 하는 그런 비판을 가하면서 ‘철학의 빈곤’이다 이런 저서를 냈는데 그 때부터 사람들은 철학적 지식의 결핍으로 현실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다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철학의 빈곤이다 이런 내용을 쓰기 시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각범:
예,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들 얘기하는 부자 그러면 도둑질한 것이다. 그리고 레닌도 그 비슷한 논법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뭐냐하면 노동조합에 대해서 썼습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 뭐 우리로 치면 노조위원장들 이런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의 즉각적인 물질적인 이해를 도모하지 사적유물론적 관점에서 전체 역사의 흐름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오히려 반동이다 라는 게 레닌의 규정이었거든요.  그 때도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레닌이 이 철학의 빈곤이랄까 또는 역사인식의 부족 이런 걸 하는데 뭐 이걸 우리가 21세기적 상황에서 한국에 비춰보면 어떻게 생각하세요?

엄정식:
그런데 그래서 지금 말씀하셨다시피 그 철학의 빈곤은 조금 우리가 통용하는 속물주의에 대한 배경이랄까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 그런 거 보다 좀 더 테크니걸한 뜻으로 쓰지 않았나 저는 그렇게 이해했거든요.

이각범:
네, 마르크스나 레닌이

엄정식:
마르크스 예, 처음에 나올 때는.

이각범:
네.네.

엄정식:
그리고 그야말로 프루동이 철학의 빈곤한 모습을 보였다 라는 뜻이었으니까,

이각범:
그렇죠.

엄정식:
그리고 이제 마르크스가 그 역사주의로 넘어가는 헤겔적 관념론에서 역사주의로 넘어가고 또 경제학을 강조하고 사회학을 부각시키는 시점에서 나온 얘기라, 그 때 구체적인 얘기는 전 그렇게 이해했거든요. 철학의 빈곤이라기보다 이 사람이 우리 식으로 이해하면 무슨 실증주의의 과학적 실증주의랄까 나름대로 이해한, 그렇지 않으면 경험과학. 사회학이나 경제학, 구체적인 역사적 전개, 그런 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관념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제 그런 점을 지적한 것으로 저는 이해했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함축하는 의미는 뭐 요새 얘기하는 물질만능주의나 속물주의 하고 연결은 할 수 있지만 원래 역사적 철학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런 넓은 뜻은 아니었다. 문명비판적인 어떤 함축까지 지닌 건 아니었다. 저는 그렇게 이해했거든요. 그래서 보면 그런데 어떤 의미로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하고 격동기라는 점에서 그때도 상당히 유사했다. 그 시대적 패러다임이 급진적으로 전환되는 시기라 그 어떤 신념체계라는 게 서 있지 않고 가치판단의 기준이 흐려지고 막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이제 판단의 혼란, 이성적 그 말하자면 논리의 기준이랄까? 이런 게 흩어져버린 시대에 대한 비판으로 보기 때문에 그걸 어느 정도는 원용할 수 있다, 지금도. 그런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의 상황은 그 때 그 정도가 아니잖아요. 이게 저는 가끔 그런 표현을 쓰는데, 어떤 의미로 동과 서와 고와 금이 동시에 집약된 굉장히 격동하는 물결치는 그런 거의 유일한 땅이다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뭐 해외여행을 또 뭐 이렇게 학술교류 이런 걸 가봐도 우리나라처럼 모든 게 집약돼 있는 땅은 없다, 그렇게 격렬하게 갑자기.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가 자기 시대를 봤던 그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깊이와 넓이와 어떤 농도 같은 게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형편이다 저는 그렇게 보는 거거든요. 그래서 얼마든지 그 철학의 빈곤은 우리가 원용해서 넓게 적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저는 그렇게 보는 거죠.

이각범:
네. 그런데 아까 이한구 교수님이 일종의 그 마르크스류의 속물주의적 속성에 대해서 철학의 빈곤의 기본적인 하나의 중요한 속성이라고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적이고 충동적인 측면, 그리고 그 다음번에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역사와 사회에 대한 해석, 이 세 가지를 드시지 않았어요?  이거를 우리가 현재의 어떤 정치상황과 대조해보면 아시는 바와 같이 레닌이 러시아 혁명할 때도 대중을 선동해가지고 대중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아가지고 혁명을 성공하려 그러지 않고 조직된 폭력에 의해가지고 혁명을 하려고 그랬거든요. 마르크스류의 역사의 긴 문맥을 봐라. 이건 대중선동하고는 거리가 있는 겁니다. 그런 역사의 긴 문맥을 봐서 철학의 빈곤이다 하는 게 통하죠.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로 지적하신 감성적이고 충동적, 그리고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생각의 폐쇄성, 이것은 사실상 이 대중 민주주의 또는 포퓰리즘 민주주의 이런 데에서 사실은 잘 통하는 그 밑바탕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면에서 보면 21세기 한국적 상황과 철학의 빈곤이라는 것을 좀 같이 엮어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데요.

이한구:
예, 그래서 오늘 우리 상황과 연관해서는 저는 철학의 빈곤이라는 말을 세 차원에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는 이제 사람들의 행동이 철학적 지식의 부족으로 너무 즉흥적이고 경박하다 말이죠. 우리 사회의 시대적 분위기가. 또 사람들의 사고가 너무 피상적이고 깊이가 없다. 또 시대적 경향이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럽다는 이런 뜻으로 우리 시대의 상황에서 철학의 빈곤이 문제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이제 지적을 하면서, 뭐 일반 금방 말씀하셨지만 일반 대중들의 삶에서 철학이 빈곤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변론의 여지가 뭐 있다고 봅니다.

이각범:
그렇습니다.

이한구:
왜냐하면 모든 대중들까지 깊은 철학 통찰을 요구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사회를 이끌어 가는 엘리트 지도층까지 정말 그 지나치게 철학의 빈곤을 우리가 논의된다면 좀 문제가 있지 않나. 그래서 적어도 제 생각에는 어떤 분야에든지 지도층으로 나설려면 문학적인 상상력, 또 역사적 이해력, 철학적 통찰력을 어느 정도는 갖추어야 되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지도층을 비춰본다면 이런 자질들이 조금은 부족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결국 우리가 이런 현상을 통틀어서 우리 사회의 철학의 빈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각범:
네, 우리가 늘 조상님들로 부터 물려받은 이른바 군자지도, 군자의 도리 거기에서는 군자는 무엇보다도 수신을 시작해야 되죠. 그래서 남을 비판하기보다는 남이 갖고 있는 잘못을 혹시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먼저 들여다보고 늘 자기 자신에 대한 거울을 가지고 하는 그것이 에 군자의 기본인데, 우리는 현대의 군자란 결국은 이 사회의 리더가 되어야 될 텐데, 리더가 자신의 거울을 앞에 두고 사느냐 아니면 늘 남의 잘못만 비춰주는 소셜미디어만 갖고 사느냐 이것이 지금 현재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까 이한구 교수님 지적하셨듯이 철학적 지식의 부족, 그리고 너무나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방식 여기에다가 사회적 혼란, 이게 이 시대의 대중뿐만 아니라 가장 기본이 되어야 될 리더들의 철학의 빈곤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렇게 생각 말씀해주셨는데. 그러게 되면 결국에 이러한 리더들의 잘못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것 같습니다. 사회 전체가 자기 자신의 잘못은 돌아보지 못하고 남의 잘못만 지적하고. 심지어는 저는 이 사회에서 남을 비판하고 하는 태도가 마치 게임을 즐기는 것 같아요. 그 게임이 뭐냐하면 우리가 축구 경기에서도 우리 한국 팀이 뭐, 스웨덴이나 멕시코하고 싸우게 되면 무조건 이겨야 된단 말이죠. 지난 월드컵에서도. 그거는 모든 국민이 이 사람은 애국자다, 아니면 이 사람은 국가에 별 관심 없다 하더라도 일단 TV앞에 서면 다 자기편 이겨라 하고 하는데, 어떤 때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애국심을 발휘하는 유일한 때가 스포츠 경기, 국가대표 대항전 볼 때 그 때뿐 아닌가 하는 그런 자조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거는 일반 대중들보다도 리더들이 잘못해서 그런데요.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가 1987년 민주화 이후에 언론의 자유의 수준에서 아시아에서 제일이라고 하는 평가를 계속 그것을 전담해서 평가하는 프리덤 하우스에서 매년 그런 평가를 받았는데,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물어보나 뭐 또 그보다 더 나이가 든 직장인들한테 물어보나 한국은 엄청나게 언론 통제를 받고 있는 독재국갑니다 이렇게 대개 대답을 하거든요.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사태를 보기보다는 문제를 자기의 주관적 입장,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소셜미디어에 의해서 영향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데, 자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이거를 주관적인 판단을 객관적 판단으로 옮길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엄정식:
글쎄, 저는 아직도 철학의 빈곤이라는 말을 좀 더 선명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지금 얘기가 이렇게 전개되는 양상을 보면 철학을 굉장히 넓은 뜻으로 쓰는 것 같아요.

이각범:
네네.

엄정식:
지금 사실은 사회학이나 경제학, 정치학, 심리학 이런 분야들이 이제 상당히 잘 개발돼 있기 때문에 과거의 철학적 과제들을 다 가져갔거든요. 그리고 더 잘하고 있고 어떤 점들을. 그래서 그런 문제들을 전부 철학적 과제로 생각하면 뭐 한이 없다, 얘기가 이렇게 전개될 수가 없다 라는 거죠.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철학적 문제인가, 이 시대에 그거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우리가 철학적 대응을 할 수 있는 거지 모든 질병이 다 철학적 문제다 이렇게 생각하면 상당히 모호한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을까. 그런데 적어도 그렇다면 뭐 테크니컬하게 철학이 뭐냐 여기서 규정하려 애쓸 게 아니라 대체로 그런 뜻으로 쓰고 있지 않나 저는 지금 일단은 생각해봤는데. 사물의 본질이나 뭐 현상의 구조에 대한 궁극적 탐구 뭐 이렇게 테크니컬하게 할 게 아니라 좀 더 깊이 보고 사물이나 현상을 좀 더 깊이 보고 좀 더 좀 더 넓게 보고 좀 더 멀리 보려는 자세, 그렇게 규정하면 우리가 얘기하기가 좀 편하지 않을까. 지금 이미 거론했던 것도 철학적 주제로 수용할 수 있고. 그래서 그거는 듣기에는 쉬운 것 같지만 사실 조금 더 깊이 본다는 것은 좀 까다로운 얘기거든요. 이게 눈에 보이는 게 사물의 전부가 아니라 그 뒤에 진짜가 있다. 뭐가 그걸 움직이나 그걸 탐구하려는 애쓰는 그 자세 그걸 깊이 본다고 그러는 거고, 넓게 본다는 것은 예를 들면 파도가 칠 때 파도 하나를 보는게 아니라 옆에 있는 파도 그래서 그 바다의 움직임을 우리가 간파할 때 그게 넓게 보는 거고, 그리고 이것이 이제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어떤 필연적 인과성이랄까 그런 걸 간파할 때 예견할 수 있는 능력 즉 그런 능력을 일반적으로 저는 철학으로 규정하고 싶다, 보통 맥락에서 말이죠, 테크니컬한 맥락이 아니라. 이제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가 얘기하려는 주제가 이제 자연히 따라오지 않을까. 너무 너무 얕게 보고 사물을, 너무 좁게 보고, 너무 앞에 눈앞에 있는 것만 본다, 그런 자세 때문에 그런 자세 때문에 우리가 철학의 빈곤이라는 말이 이렇게 실감나게 되는 거 아닌가. 이제 그렇게 되면 저는 아까 말씀드린 것 중에 동과 서와 고와 금이 집약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 땅에, 그런 구조적 그 어려움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현대가 대체로 그런 특징을 다 공유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급속한 그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게 여과되지 않은 채로 삭혀지지 않은 채로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전근대적 농경시대의 사고방식과 신앙체계와 과학기술의 첨단을 걷는 어 그런 생활태도 이런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가지고 부딪히기 때문에 단순히 우리가 깊이 넓게 멀리 생각하지 않는다고 탓해서는 안 되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저는 그렇게 보는 거거든요.

이각범:
아, 예.

엄정식:
그런 점에서 좀 좁혀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이각범:
아까 저는 이한구 교수님이 프루동과 같은 어떤 무정부주의자의 빈곤의 철학과 마르크스의 철학의 빈곤을 얘기하신 것 있잖아요. 그게 이 시대의 철학의 빈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참 좋은 지적을 하셨다고 생각이 되는데, 물론 나중에 이제 레닌도 인식론적인 저작에서 숱한 무정부주의자들하고 이제 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한국의 상황을 아까 제가 여쭤봤는데요, 한국의 상황에서 이 둘이 토론을 붙인다면 무정부주의자와 칼 마르크스 또는 레닌이 토론을 붙는다면 뭐 이 같은 TV 토론장에서 마르크스 진영과 무정부주의자가 토론을 붙는다면 대중에게 훨씬 더 설득력을 갖는 것은 무정부주의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감성적으로 접근하거든요. 저 가진 자들은 다 도둑놈들이야 그러면 딱 해결이 될 텐데, 칼 마르크스나 레닌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이 복잡하고 긴 과정을 보라, 그래서 철학이 필요하다, 이렇게 설명하거든요. 예를들면 프루동은 가진 사람은 도둑놈이야, 적폐세력이야 이러면 아주 간단하지 않습니까?

이한구:
그렇죠.

이각범:
그런데 마르크스는 숱한 저작에서 굉장히 많이 강조하고 또 시간을 할애하고 페이지를 할애해서 쓴 부분이 자본주의가 인류역사 발전에 어떠한 기여를 하였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씁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인류의 역사적 진보가 어떻게 이뤄졌는가 하는 데에 대해서 쓰면서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새로운 미래 진보는 사회주의적인 발전으로서 이거는 새로운 그 대자적 계급의 일입니다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프루동이나 이런 사람들은 즉자적 계급으로서 현재 어떤 이익을 취하느냐 하는 거기에 집중해서 했다고 보면 대자적 계급의 관점을 강조했던 마르크스는 상당히 긴 역사적 관점을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더더군다나 철학의 빈곤을 좌우 양측의 입장에서 아우르더라도 무정부주의자들의 그런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이한구 교수님.

이한구:
우리 사회의 이 시대의 특성이랄까 이런 것 중에 좀 감성에 너무 치우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감성주의로 흐르니까 반이성주의죠. 그러니까 뭐 여러 현상에서 나타나는 쏠림 현상이라든지 또 즉흥성이라든지 말이죠 이런 것들이 정말 우리 시대 문제점의 하나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특히 포스트 모던 사회라고 불리는 현대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팩트(fact)에 대한 비중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1, 2년 전 아마 재작년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조사한 결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행한 단어가 탈사실, 포스트 팩트(post-fact)라고 거기에 보고된 적이 아마 기억이 나실 겁니다. 그런데 포스트 팩트라는 것은 결국 사실과 허구의 구별이 잘 안된다는 걸 기본으로 까는 것 아니겠습니까? 특히 우리 사회는 이런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정말 그 모든 논의가 너무 감성주의로 치우치고 극단화되는 이런 것이야말로 정말 철학의 빈곤을 나타내는 한 측면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 2부 ]

이각범:
지금 참 어떤 면에서는 이한구 교수님 무서운 지적을 해주셨는데, 현대 사회에서 작년에 발간되었던 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지에 포스트 트루스 데모크라시(post-truth democracy)라고 그랬거든요. 진실이 별로 상관되지 않는 민주주의에서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팩트에 기초해가지고 사실에 기초해서 진실인가 아닌가 봐야 되는데 팩트와 상관없이 내 마음에 들면 그거는 진실이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진실이 아닌 거가 되는 거죠.

이한구:
그렇게 되는 거죠.

이각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진실인가 아닌가 하는 것도 사람들한테 이제는 설문으로 해가지고 많은 사람이 이게 진실이라고 하면 그게 진실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새도 그런 여론조사 많이 있습니다. 저 미국에서 하는 갤럽조사 같은 경우에 이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해가지고 영어로 approve(찬성) 56%. disapprove(반대) 28%. 그러면 어느 것이 진실이든지 간에 56%를 대중이 approve 하면 그게 진실이 돼 버립니다. 참 무서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요. 이 과정에서 우리가 민주주의 그러면 자유가 중심인데 자유라는 것은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쌍의 개념이고 우리가 또 민주적 권리라고 할 때는 권리는 의무가 따르는 것이고 그리고 표현의 자유라고 할 때 JS 밀이 썼지만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자유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엄정식:
글쎄 말이죠.

이각범:
그런데 여기서 쌍의 개념에서 한 쪽은 다 없애 버린 채 나의 자유, 나의 권리, 그 다음에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권리, 이렇게 주장을 하면서. 법원에서도 그래요, 엄연히 거짓말한 것으로 인해서 온 사회가 소용돌이 속에 들어갔는데 법원의 판결은 알권리 차원에서 그러한 보도는 보장돼야 된다 이렇게 한단 말이죠. 그 보도가 진실이 아니라고 하나 알권리 차원에서 그런 보도는 보장이 되어야 된다 이렇게 하니까 결국은 팩트와 어긋난 이런 데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무책임이 여러 가지 형태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데, 이 무책임의 민주주의 이거 어떻게 바로 잡을지.

엄정식:
그래서 그거는 진짜 큰 문제인데 그런데 저는 철학의 빈곤하고 연관해서 결국 깊이 보지 않는다, 멀리 보지 않는다, 넓게 보지 않는다는 관점하고 연결시키려고 그러거든요. 내 자유를 생각할 때 깊이 보면 책임이 따르는 걸 알게 되거든요.

이각범:
그렇죠.

엄정식:
애들이 아니라면 아주 어린애들이 아니라면 당연하단 말이죠. 그게 얼만큼 자유를 누렸을 때 책임이 따라온다는 거를 알게 된다는 말이죠. 자유를 깊이 통찰하고 누렸을 때 꼭 경험 안해도 알지 않습니까? 권리를 어느 정도 누렸을 때 의무가 따라온다는 걸 깊이 보면 안다는 거죠. 그런데 깊이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의식이 약해지고 그걸 검증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하도 스피디하게 돌아가니까, 그리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기는 꼴을 너무 많이 보게 되고 검증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는 일단은 저지르고 본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해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이 있잖아요, 자기가 주장 안하면. 그래서 언제든지 뭐 사실과 허구의 구분은 있었지만 애매한 적은 늘 있었지만 지금처럼 그렇게 애매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저는 그렇게 보는 거거든요. 그거는 객관적으로 사실임을 검증하는 메카니즘이 있고 그것이 작동할 때 구분이 선명한 거지 작동할 겨를이 없고 마땅한 기제가 없을 때 그거는 너무나 애매한 문제다 말이죠. 그리고 철학적으로 깊이 보면 사실은 그 구분은 지금도 논쟁거리잖아요. 뭐 칸트가 얘기한 게 바로 그거 아닙니까, 그런 이분법적 구분은 없다. 그리고 지금 뭐 생물학자들이 대뇌 생물학자들이 그걸 검증해 내고, 개구리 실험이나 그런 걸 통해서. 그렇기 때문에 아까 포스트 모더니즘 말씀하실 때 그게 한 시대를 풍미하고 우리가 그걸 과학한테 기대했는데 토마스 쿤 같은 사람이 그거 아니다 라고 주장하고 이런 시대에 살기 때문에 단순히 철학의 빈곤이라기보다는 어떤 시대의 질병을 앓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게 정확한 진단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서둘러 찾기 보다는 질병의 정체를 구조적 원인을, 체계를, 좀 더 객관적으로 분석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질병의 그 말하자면 실체가 뭐냐 그런 고민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각범:
포스트 모더니티 말씀을 하니까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 아주 특징으로 작용하는 것이 사회의 원심력입니다. 그 전에는 모든 사회에 있어서는 적어도 사회의 구심력이 강력하게 작동해가지고 질서를 만들고 했는데 포스트 모던 사회에 있어서는 원심력이 작동하고. 이 원심력이라고 하는 거는 전체의 이해가 어떻게 될 것인가, 예를 들어서 5년 후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데에 관심이 모이지 않고 당장 이것이 내 편에게 이익이 되면 5년 후와 상관없이 해버리는 일종의 해체주의라고 그럴까요? 그런 경향이 심각하게 작동을 하고. 그런 디퓨전(diffusion)이라고 그럴까 아니면 해체라 그럴까 이걸 엄정식 교수님은 이것을 상당히 그 중요하게 지적하시면서 바로 거기에 깊이가 없는 철학 즉 철학의 빈곤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사회를 네편 내편 갈라가지고 전체적인 어떤 구심점을 갖고 있는 구심력을 갖고 있는 하나라기보다는 이렇게 해체 쪽으로 작동하는 이 원심력을 어떻게 제어해가지고 다시 현대사회가 하나의 구심점으로 통합이 될 수 있는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거가 어려운 과제인거 같은데요.

이한구:
아마 다 아시겠지만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열린 사회를 닫힌 사회와 구분하면서 자유사회, 자율주의 사회로 규정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닫힌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고. 그러나 이제 저는 현대 포스트 모던 사회의 열린 사회의 적은 단순히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라 정말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려는 태도 있잖아요. 그 진실을 추구하지 않으려는 태도야말로 열린 사회의 적이다.

이각범:
아, 네.

이한구:
저는 이런 식으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런 파편화된 현대사회를 다시 구심점으로 이렇게 질서화하려면 제 생각에는 비판적 이성을 고양시키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이제 비판적 이성이란 것은 독단적인 사고 또 배타적인 사고 또 충동적인 여러 사고방식에 대해서 결국 반성적 성찰을 가하는 태도가 아닌가 이렇게 규정하면서 포퍼도 비판적 사고의 요지를 잘 드러냈지만 우선 그런 태도는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지도 모른다 말이죠. 그렇지만 열린 마음으로 함께 논의하고 상호 비판함으로써 진리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그런 태도가 저변에 깔려야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각범:
예. 지금 비판적 이성 말씀하시니까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자기의 주장에 대한 절제, 그리고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 그런 생각에 대한 상당한 유보 내지는 상대편에 대한 존중 이런 게 필요할 것 같은데, 특히 칸트의 경우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엄정식:
포퍼가요, 포퍼가 비판적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자기가 소크라테스와 칸트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 전에 모든 사람들이 이성을 들먹거렸지만 그건 진정한 의미의 이성이 아니다. 감성인데 독단적 이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얘기를 했거든요. 그래서 미쳐 칸트가 분명히 하지 못한 얘기를 내가 마저 하겠다 라는 어떤 사명감, 철학적 미션 같은 거를 갖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포퍼 얘기를 조금 더 그 연장선상에서 해봄으로써 칸트를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성 중에서 우리가 두 가지 기능을 얘기하거든요. 특별히 사물을 몇 개 보고 그걸 체계화하는 그리고 거기 전체를 얘기하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이 있고, 그 능력의 결과로 나온 어떤 입장을 그것도 아니다 라는 비판적 기능으로서의 이성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사실은 이성 같지만 체계화하는 그거는 감성이 이성의 옷을 입은 거지 사실은 이성적 기능이 아니라는 게 포퍼의 입장이거든요. 그리고 그거를 본격적으로 철학사에 도입한 게 이성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제 칸트가 부각이 된 거고요. 그렇게 봤을 때 칸트도 또 마르크스 못지 않게 격동기를 산 사람이니까. 그래서 격동의 특징이 극단의 시대를 사는 거거든요. 너무나 다들 나만 옳다 그러지만 그게 비정상적으로 극대화되었을 때 혼란이 오지 않습니까, 구심점을 찾기가 어렵고. 그런데 그 때 우리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뭐냐를 처음부터 원초적으로 한번은 검토해보자고 얘기한 게 칸트라고 말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제 포퍼는 그 좀 더 일대 기능을 극대화해보자 그래서 과학의 특징을 그걸로 봤고요. 그런데 제가 포퍼가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냐 하면 다 옳다는 거예요. 네 주장들도 다 옳고 나도 옳고 다 옳고. 그럼 어떻게 되냐? 어떻게 되냐? 그러니까 이한구 선생님은 진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렇게 얘기했을 때 다 옳으면 어쩌라는 얘기냐? 그래도 그 중에 덜 옳은 게 있고 더 옳은 게 있을 것 아니냐. 그러니까 이게 대화가 작동하고 사회가 유지되는 거지 그게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래서 우리가 극단의 시대 말하자면 완전히 철학의 빈곤이 극대화된 시대에는 대안으로서의 뭐를 내놓는 게 아니라 일단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시 반성해 보는 거 있잖아요. 혹시 틀릴지도 모른다 그 작업부터 시작하자는 게 포퍼가 주장하는 이론의 핵심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꽤 오래됐지만 89년도인가 포퍼를 직접 만나서 한 2시간 토론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때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우리나라의 분단구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여쭤봤더니 너희들은 분단을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분단을 심화하고 있을 뿐이다, 각자가 옳다고만 주장하니까. 그래서 급선무는 분단을 약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혹시 양쪽이 다 우리가 틀릴 수도 있다 어떤 점은. 그런 사고 방식으로도 시작하는 그게 비판적 이성의 아주 하이라이트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우리도 모르게 그림자처럼 통일이 옆에 있지 않겠나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우리 시대 구석구석에 있는 극단의 양상들도 혹시 늘 옳지만 지금 이 사안에 대해서는 내가 틀릴 수도 있겠다는 그 의구심을 가질 때 거기서부터 실마리가 풀릴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그게 포퍼의 구체적인 입장이고 칸트가 미처 얘기 못했던 얘기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각범:
그런데 사실은 독재만큼 효율적인 체제가 없거든요. 그런데 독재는 늘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으로 옳음을 강조합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면 독재를 할 수가 없죠. 단순하게 얘기하면 민주주의란 내가 틀릴 수 있음을 가정하고서 하는 게 민주주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가령 예를 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남한과 독재의 왕조체제의 북한이 어떻게 하나는 절대적으로 나는 선이다 라고 얘기하고 또 이 쪽에서는 우리가 틀릴 수 있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할 때 그 대화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그게 항상. 포퍼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한구:
정말 그 비슷한 논리로 이제 포퍼도 비관용의 태도에도 대해서 관용할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좀 유사하지 않습니까?

이각범:
예, 그렇습니다.

이한구:
그 때 포퍼뿐 아니라 저 계몽주의 볼테르나 그런 사람들도 아마 비슷한 결론을 내린 것 같습니다.  비관용자에게까지 관용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게 함축의 의미를 드러내 본다면 정말 한 쪽은 비판적 이성으로서 내가 틀릴지도 모른다는 태도로 나가고 저 쪽은 독단적 이성으로써 절대적인 진리라고 치고 나올 때 비판적 이성이 너무 많은 양보를 해버린다면 그건 더 이상 진전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각범:
네, 뭐 일례로 통진당 해산하는 헌재 선고에 있어서 제일 많이 참조한 게 독일 헌법재판소예요. 독일의 공산당 해체 판결이었는데. 그 판결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게 뭐냐하면 모든 정치적 자유는 허용되어야 하나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는 체제를 전복하는 자유는 없다 그게 바로 그 관점이거든요. 그래서 민주체제 수호라는 차원에서 그 정당을 해체를 했는데요.

엄정식:
그런데 사실은 마르크스도 마르크스도 독재체제에 대한 신경질적인 거부감 같은 게 있었거든요.

이각범:
네. 그렇습니다.

엄정식:
그 편지에도 편지에도. 그런데 막시즘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그걸 종교적으로 신성시 해가지고 그걸 가장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이 독재체제다. 그것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일인 독재체제로  그게 구체적으로 나타낸 게 스탈린이면서 이제 죽 계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위험한 게 절대적 신념이 바로 내가 실천해야 된다는 그 자긍심, 자존심 때문에 종교화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절대로 타협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정치라는 것은 또 이 세상에서 결과를 내야지 종교처럼 저세상까지 끌고 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독재체제도 오래 못가는 이유가 결국은 결과가 말해준다는 거죠. 백성을 굶게 한다든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다든지 이런 것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는 이유가 저는 있다고 보는 거거든요. 그래서 독재체제와 민주체제의 대결은 서두르면 더 키워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인내력을 갖고 그야말로 이 쪽에서는 햇빛정책을, 저 쪽에서는 모기장 전술을 할 때 언젠가 끈기 있는 사람이 이기지 않을까. 그리고 이김의 문제가 아니라 적당한 선상에서 타협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때 해법이 나올 수도 있다는 그런 막연한 어떤 희망, 낙관주의 같은 거를 가져 봐야죠. 뭐 실제로 낙관주의가 낙관적 상황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이각범:
그렇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아이러니는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구상은 레닌이라는 혁명가가 없었으면 실현이 불가능했습니다.

엄정식:
그렇죠.

이각범:
거기서 현실적합성이라는 게 있고요. 또 모든 민주주의의 멸망은 민주적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그랬고 독일 바이마르 리퍼블릭이 그랬고. 그래서 우리가 바로 이러한 문제, 현실적인  적합성과 그리고 이상으로서의 자유를 어떻게 조화하느냐 하는 이 딜레마를 우리가 늘 갖고 있는데. 그래서 이거를 철학의 빈곤이라고 하는 것이 교육이나 언론에 의해 가지고 자꾸만 다음 세대로 이 재생산되면 그 결과는 철학이 빈곤한 세대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될 텐데, 이러한 현실적인 악순환이라고 그럴까요 이거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사상적인 처방은 어떤 게 있습니까? 사상적으로 볼 때.

이한구:
우리는 이제 전통사회에서 근대시민사회로 이렇게 넘어오는 과정에서 서구의 18세기에 전개되었던 그런 계몽주의가 좀 생략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말하자면 진정한 계몽의 시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타율적으로 근대시민사회로 넘어왔단 말이죠. 그래서 지금이라도 각 분야에서 진정한 계몽, 합리주의적인 그 운동이 한번은 반드시 전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각범:
아, 예.

엄정식:
특히 언론하고 교육을 이렇게 거론하셨는데, 아까 팩트하고 사실과 허구의 구분도 애매하다 그랬지만 그 구분을 애매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언론인거 같아요. 언론이 뭐 꽤 오래 전 얘기지만 월터 리프만이 언론의 신문의 기능을 수도 인바이런먼트(pseudo-environment)다 그런 표현을 한 게 있어요. 사이비 환경을 조성한다. 직접 우리가 검증되지 않은 것을 한번 걸러주는 환경 속에서 살면서. 그런데 그 환경에서 형성된 자아가 또 수도 셀프(pseudo self)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이비 자아다. 그러니까 자기가 진정한 의미의 자기를 만나지 못하면서 거기에 표류하면서 산다는 거죠. 그런데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능력이 있고 책임감이 있냐? 그건 아니다 라는 거야. 그래서 이게 보편적 현상인데, 더군다나 본질적으로 언론은 이게 대기업이다 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선정주의나 하여튼 이득 이런 거를 염두에 안둘 수가 없고 객관적 진리의 추구보다는 얼마나 이걸 많이 팔 수 있느냐, 정보를, 그런데 더 신경을 쓰고. 그런 구조 속에 현대인이 살기 때문에. 그리고 그거는 고전적인 언론이지 지금은 완전히 SNS며 인터넷을 통해서 그게 난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심각성을 우리가 일단은 분석을 통해서 절감해야 될 것 같고요. 그리고 또 하나 교육을 말씀하셨는데, 그거는 뭐 저는 교육학자라고 말할 순 없지만 한평생을 교육에 종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보면 교육도 그게 부채질을 하는 것 같아요. 진정한 의미의 교육은 존재하지 않고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면서 특히 산업화 과정에서 훈련만이 존재했다. 그런데 훈련과 교육은 다른 거거든요. 전사들을 산업 일선에서 전사들을 양성했지 언제 우리가 교육을 시도했냐. 그러니까 거기서 제일 먼저 생기는 문제가 사교육과 공교육이 구분이 안 되는 거거든요. 즉 전사를 훈련하는 거라면 사교육이 더 전문성을 갖고 있죠. 그런데 거기에 경제적으로 밀리니까, 효율적으로 밀리니까, 공교육이 그걸 따라간단 말이죠.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는 우리가 미래지향적인 인재양성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대처들만 하고 당장의 전리품이 뭐냐. 그래서 저는 그런 표현을 쓰거든요. 성곽을 책임지는 봉건 영주가 유고시에 대처할 수 있는 기사의 양성들이 아니라 리더들의 양성이 아니라 전사들을 훈련시켰을 뿐인, 그러니까 중심이 없고 그게 우리의 교육계의 모습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묘하게도 언론과 맞물려 가지고 정말 주인이 누군지 찾기 어려워진 상황에 있다. 둘 다가 사이비 자아를 형성하는데 공헌하고 있다,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싶은 거죠.

이각범:
네. 불교방송의 입장에서 보면 늘 깨어있는 마음, 자기를 성찰하는 마음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키(key)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오늘 토론 두 분 정말 감사하게 들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우리 사회가 철학의 빈곤이라는 늪에서 헤어나 가지고 진정한 리더가 형성되는 미래지향적인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오늘 토론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엄정식,이한구:
감사합니다.

이각범:
네. 오늘 토론에는 엄정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님 나오셨구요, 또 이한구 경희대 석좌교수님 나오셨습니다. 우리나라가 예전에는 인재를 기를 때 지성과 덕성 그리고 체육 이것을 다 강조하는 지덕체의 교육을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기능적 교육에 너무 치우쳤습니다. 그래서 전인적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우리는 철학 또한 빈곤의 늪으로 빠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우리가 근본으로 돌아가는 노력을 해야 되겠고 무엇보다도 자성의 시간을 많이 갖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경청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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