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S 전영신의 아침저널]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신주백 연세대 교수 광복절 특집 대담

□ 출연 :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 진행 : 전영신 기자

[인터뷰 내용]

▷전영신 : 암울한 일제 치하의 시대에서 벗어나서 빛을 되찾은 날, 73년 전 오늘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전영신의 아침저널에서는 광복절 특집으로 역사 전문가 분들을 스튜디오에 직접 모시고 감동적인 역사 이야기를 통해서 역사 공부하는 시간으로 마련을 했습니다. 먼저 자타가 공인하는 역사 전문가,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신주백 : 예, 안녕하세요?

▷전영신 : 독보적인 독도 연구자시죠.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님 나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호사카 유지 : 예, 안녕하십니까? 

▷전영신 : 두 분께서 서로 잘 아시는 사이시죠?

△신주백 : 잘 알기보다는 가끔 뵙죠.

▷전영신 : 두 분도 서로 인사 좀 나누시죠.

▲호사카 유지 : 안녕하세요?

△신주백 : 안녕하십니까?

▷전영신 : 오늘 감동적인 역사 이야기들 많이 해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일단 먼저 오늘이 73주년 광복절입니다. 우리가 왜 이 날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하는 건지 신주백 교수님, 먼저 그 의미를 짚어주시죠.

△신주백 : 네, 올해가 73주년인데 1945년 8월 15일을 기억하는 의미는 우리가 일제 치하에 35년이라는 고통스러운 역사를 겪었던, 어려울 때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무엇을 그 당시에 추구하면서 해방을 기억하고 해방을 생각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서로 간에 공유를 하면서, 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연례적인 기억의 날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영신 :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화하신 호사가 유지 교수님께서는 광복절의 의미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호사카 유지 : 저는 원래 일본 사람이었고요. 2003년에 한국 사람으로 국적을 완전히 옮겼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쪽에서 보는 관점하고 또 한국 쪽에서 보는 관점 양 쪽을 볼 수 있는 입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인으로 보는 광복절의 의미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라를 되찾은 날이지 않습니까? 그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고요. 다시 나라를, 그러니까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 의미를 정확하게 모든 국민이 알아야 되는 날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광복의 완성이라는 것은 역시 남북이 앞으로 통일이 되어야만 진정한 광복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일제강점기가 분단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 일제로부터 진정한 광복, 이것은 앞으로의 남북 화해, 그리고 통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뜻깊은 의미가 광복절에 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영신 : 일제 강점 시절에 독립투사들의 활약상, 일대기는 영화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할 만큼 참 감동적인 사연들이 많죠. 신 교수님께서는 독립운동가 중에 한 분을 꼽으신다면 어떤 분을 꼽으시고 어떤 사연이 있는지 좀 소개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신주백 : 글쎄요. 유명하신 분들은 워낙 많으니까. 예를 들면 김구 선생이라든지 이시영 선생이라든지 윤봉길 의사라든지 워낙 많잖아요? 그런데 요즘 독립운동가를 정부가 되새기려고 하는 흐름 중에 하나는 후손들이 잘 기억을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장에서 당시에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작은 씨앗, 밀알이 되고자 하셨던 분들에 대해서 국가가 기억의 책임, 국가로서의 의무를 다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최근에 나타나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 아닐까 싶어서. 특히 여성분들이, 그런 분들이, 어떻게 망자들 내지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것까지 성차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기억이 그다지 없는 존재들에 대해서 좀 관심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아내들이 했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살림이거든요? 독립운동하시는 내지는 독립운동에 관심 있고 연구하시는 분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독립운동가들은 이슬을 먹고 독립운동한 것으로 오해를 하세요. 사실은 그 분들도 인간처럼 먹고 자고 여가도 보내야 되고 그런 경우가 있잖아요? 뒤에서 그런 그늘의 역할을 해주시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일관성 내지는 지조를 유지하게 해주신 여러 여성 운동가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임시의정원의 의장을 지냈던 김봉준 지사의 아내 같은 분은 임정의 태극기를 본인이 한땀 한땀 직접 지어가지고, 꿰매가지고 이런 부분을 기억하도록 했다든지. 군자금을 모집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셨던 여성 독립운동가들, 최근에 국가에서 훈장을 주는 것으로, 표창을 주는 것으로 했죠.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전영신 : 여성운동가 202분을 새로 발굴을 하고 또 서울배화여고 재학 시절에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붙잡혀갔던 여학생들, 그런가 하면 또 여러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건국훈장까지 추서를 하고 이번에 광복절 포상자 중에 주요 인물로 선정하고 이런 노력들이 있지 않습니까? 

△신주백 : 예, 국가가 그런 부분을 기억해주고 되새기려고 했다는 점을 우리가 좀 알았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전영신 : 호사카 교수님께서는 어느 독립투사의 사연이 가장 감명 깊으셨어요?

▲호사카 유지 : 굉장히 많은 분들에 대해서 감명 받고 있는데요. 먼저 제가 한국에 와서 첫 번째 관여가 된 분은 유관순이었어요. 유관순 생가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아주 작은 전시실이 있어요. 거기도 지키는 분이 어떤 목사님이신데요. 거기 제가 방문했을 때 목사님하고 이야기를 해서 전시물에 대한 일본어 번역작업, 그것을 제가 맡아서 했습니다. 그때 제가 만든 일본어가 지금도 그대로 전시실에 붙어있어요. 거기에 가까이에 가면 들러서 산도 올라가고요,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또 나중에도 이 분에 대해서는 말씀 드리지만 조명하 의사라고 대만에서도 독립운동을 한 분이 계시고요.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윤봉길이라는 분이 일왕을 표적으로 삼은 그러한 의거로 임정 자체가 중국의 장제스에 의해서 인정받아가지고 이 흐름이 대한민국 설립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면 그 세 명에 대해서 저는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갖고 현재까지 왔습니다.

▷전영신 : 그리고 또 독립투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안중근 의사를 빼놓을 수가 없죠. 문재인 대통령이 내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서 북한과 공동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 이렇게 밝혔는데. 안중근 의사는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현장에서 체포돼서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됐다가 사형이 되셨죠? 

△신주백 : 예, 안 의사를 한국사회가 기억해야 되는 측면은 한 측면에서는 열사의 맥락이 있고요.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일본의 침략, 적어도 식민지화의 기도를 전 세계에 알렸다는 것도 있고요. 다른 한 각도에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본인의 희생을 통해서 희망을 줬다는 측면에서, 한국인들에게. 1910년대에 제가 조사한 바로도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가운데서도 가장 개인에 대한 인물전기가 많이 나왔던 사람이 안중근 의사였다, 라는 것이고요. 오늘날과 관련해서 이야기해보면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학계나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주목하는 것 중에 하나가 동양 평화론인 것 같아요. 안중근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한중일, 즉 동북아시아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3국이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국가 대 국가의 수평적인 관계, 민족 대 민족의 동등한 관계 속에서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이야기해갔다, 라는 측면에서 안중근 의사는 현재에도 미래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인물이 아닐까.

▷전영신 : 지금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효창공원에 마련되어 있지만 유해를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인데요. 안중근 의사가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죽어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이것이 최후의 유언이었는데. 그 유언을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유해 발굴 사업, 어떻게 잘 될까요? 어떻게 보세요?

▲호사카 유지 : 저도 뤼순 감옥에 가서 안중근 의사가 거기서 지냈던 방이라든가 그리고 사형 집행 장소라든가, 그리고 안중근 의사가 이 주변에 묻혔을 것이다, 라는 데를 한 번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발굴 사업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지 잘 못 찾은 그런 것이었다고 제가 들었습니다.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공동 사업으로 그것을 하겠다, 거기에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안중근 의사 자체가 황해도 출신으로 북한 출신이기 때문에 남북 간에 하나의 공동 발굴 작업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나 역시 현실적으로 지금 안중근 의사가 묻혀있을 곳이라고 추정되는 부분에 건물이 들어섰다는 그런 이야기. 저는 그것은 미확인, 완전히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도 좀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이 발굴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또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형제가 3형제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정근 씨, 그리고 공근이라고 두 번째, 세 번째, 그러니까 동생들이 있었어요. 이런 분들도 임시정부에 다 가담해서 상당히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도, 그러니까 안중근 의사까지 포함시켜서 모두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행방불명이 된 그런 부분이 있어서 오히려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3형제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신주백 : 안중근 의사의 유해 찾기 작업에서 유해를 찾으면 한국이나 북한이나 굉장히 좋은 의미가 있고 후손들에게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데, 찾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문제가 하나의 부담이 될 수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그것을 재개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되느냐, 라는 정치적인 맥락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할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호사카 선생님께서 그 맥락을 좀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조금 보충을 하자면, 남북 관계가 70년 넘게 단절이 된 상황에서 남북이 접점을 찾고자 하는 여러 방면의 노력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역사 쪽이 아닐까. 역사 인식은 단순한 단일민족론에 입각해서 이야기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를 하는데, 북한의 역사 인식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1910년대 까지는 남이나 북이나 존경하는 인물이 비슷합니다. 조금 다른 측면이 있지만 거의 비슷해요. 특히 1910년대 전까지 가장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홍범도와 안중근이에요. 그래서 남북이 접점을 찾는데 아주 적절한 대상이고. 현재와 같이 이렇게 긴장완화로 갈 수 있는 평화체제의 정착으로 가는데 대화의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 안중근 의사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본인이 남북 관계를 푸는 중요한 매개 고리가 된다고 한다면 그것도 본인으로서는 하늘에서 우리를 기쁜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영신 : 그리고 최근에 남북 화해 분위기의 연장선에서 북한이 고향이라 가려졌던 독립운동가들도 최근에 재조명이 되고 있는데. 어떤 분들이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도 좀 궁금한데요. 신 교수님, 어떤 분들이 계신가요?

△신주백 : 여러 분이 계시겠지만 그 중에 주목받지 못했던 분들 가운데 주목을 왜 못 받았냐, 라는 부분은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죠. 저 같은 경우는 후손이 없어서.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 각종 기념 사업회에서 기리고 있는 분들의 공통된 특징은 후손들이 그 분들을 기억해내기 위한,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면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 그렇지 않은 분들 가운데서는 교과서에 수록된 분들이 많이 기억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기억으로부터 소외당하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평안남도 용강 출신의 권기옥 지사 같은 경우에 독립군 군자금을 댄다든지.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기도 합니다만. 2000년대에 들어와서 알려지기도 했죠. 그 다음에 마찬가지로 임정 직후에 독립군 군자금 제공과도 맞물려 있습니다만 노영재 지사라는 분도 계시고요. 그 다음에 앞서 이야기한 김봉준 지사의 아내 같은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이렇게 독립군자금에 기여했던 활동도 있고 독립운동가들의 뒤에서 살림을 책임지면서 안정된 독립운동활동을 할 수 있도록 유지하는 데 기여를 하신 분들. 그런데 이런 분들은 사실 중요한 것은 기록이 안 남는다는 거에요.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기억하려고 자료를 찾고 더욱더 이 분들의 일생을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 싶습니다.

▷전영신 : 호사카 교수님, 이제라도 북한 출신의 독립투사들이 재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큰 일 아니겠습니까?

▲호사카 유지 : 예, 그래도 사실상 아주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은 북한 출신이 상당히 많습니다. 예를 들면 박은식 선생, 황해도죠. 김구, 이승만 다 황해도입니다. 그리고 안중근도 황해도이고요. 그리고 제가 한때 유한양행의 유한대학이라고 있거든요? 거기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유한대학을 설립한 유일한 씨도 평안도 출신이고요. 안창호도 평안남도이고요. 굉장히 북한 출신이 많습니다. 그리고 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분은 아까도 조금 이야기했지만 조명하라는 사람인데요. 이 분도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대만에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러나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대만으로 가기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유는 대만을 찾는 일본 왕족들이 많았기 때문에 왕족을 노리는 하나의 독립운동을 계획했던 것이 아닌가, 이것도 앞으로 좀 많이 연구를 해야 되는 부분인데요. 조선에는 일본 왕족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위험했기 때문에. 그러나 대만에는 33차례나 갑니다. 그리고 대만의 신으로 되어있었던 사람이 요시히사라고 해서 왕족이고요. 그 요시히사는 일본의 수신(修身)이라는 도덕교재가 있었어요, 당시에. 일왕을 찬양하기 위한 교재였어요. 그 수신 교과서에 메이지 일왕 다음의 신으로 게재되어 있었던 사람이 대만의 신이었던 요시히사라는 사람이었는데요. 그 사람의 조카를 척살한 사람이 조명하라는 사람입니다. 1928년에 대만에서. 그 사람에 대해서 김구 선생님이 언급을 해서 이것이 이봉창, 그 다음에 윤봉길이 바로 일왕을 노리는 그러한 독립운동으로 연결됐다, 라는 차원에서 조명하의 대만에서의 의거라는 것이 상당히 다시 한 번 평가 받아야 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며칠 전에 자손 분이나 조명하 의사 연구하는 분들과 함께 조명하 의사 연구회를 출범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이 역시 황해도 출신입니다.

▷전영신 : 예, 알겠습니다. 광복절 특집 대담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와 이야기 나누고 있습니다. 이제 매년 광복절을 맞는 심정이 사실 개운치만은 않은 것이, 또 진영갈등, 반목의 골을 체감하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대한민국의 나이를 두고 진보 진영에서는 올해가 99주년으로, 보수 진영에서는 건국 70주년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일단 문재인 대통령은 내년을 건국 100년으로 기념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입니다. 정치권에서 또 다시 논란이 재 점화되고 있는데요.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일부터 봐야 되느냐,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일을 건국절로 봐야 하느냐. 이 부분은 결국은 정치권에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학계에서 담당을 해야 될 부분인데요. 신 교수님께서는 어떤 의견이세요?

△신주백 : 우선 몇 가지 사실 확인을 해야 되는데. 작년에 대통령께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쓰시면서 발언을 했지만 정부가 이번에 발족한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위원회에서는 건국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쓰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좀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하나를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하고요. 두 번째는 건국이라는 문제를 이야기를 할 때 이것이 지나치게 정치적인 성격으로 가고 있다, 라는 부분에서 좀 아쉽고요. 세 번째는 이 문제를 당시 사람들은 왜 건국이라 하지 않고 광복절이라고 했을까,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1948년 8월 15일 당시 조선총독부 예전 청사일 수도 있고 나중에 정부종합청사가 되는 곳에서 할 때 플랜카드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썼어요. 왜 정부수립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그것은 남과 북이 따로 정부를 세우는 것은 임시적인 것이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서 정부수립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거에요. 당시 분들이. 그것을 주도한 사람이 건국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존경하시는 이승만 대통령이셨다, 라는 측면을 이야기해야 될 것 같고요.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후손들의 선택의 영역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이야기를 하면 된다. 48년에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한 것이 국가냐, 아니냐, 로 이야기한다면 국가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사회과학적 이론으로는. 그러면 건국 아니냐, 그렇게 했을 때 그렇게 볼 수도 있죠. 그런데 예를 들면 대한민국 48년 8월 15일 수립된 정부의 헌법에 우리는 3・1운동과 임정의 부분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헌법에 제정되어 있으면 정식적인 맥락에서 우리는 식민지라는 상황이 있으니까 19년을 가지고 우리가 건국을 삼으면 되는 것 아니냐, 라고 하면 그것은 되는 거죠. 중요한 것은 역사를 내세워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나 정치적인 관점을 국민들에게 관철시키려고 한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논쟁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라는 것이고. 그 숨은 베이스에는 자신들이 복권시키고자 하는, 내지는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인물이나 역사관을 국민들에게 요구하고 어떻게 보면 강요하고 있는 행동이다. 그래서 제발 논쟁에 정치인들은 안 끼어들었으면 좋겠다. 이런 정도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전영신 : 호사카 교수님은 어느 쪽 이야기가 맞다고 생각하세요?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호사카 유지 : 이것은 제 개인의 연구하고 있는 내용으로 말씀드리자면, 아까 이야기를 한 조명하 의사의 왕족을 노리는 그러한 독립운동이 시작되어서 그 다음에 이봉창, 윤봉길로 이어졌습니다. 조명하에 대해서는 김구 선생님도 언급을 했고요. 이 내용이 윤봉길의 의거를 알게 된 당시 중화민국의 장개석, 장제스가 감격을 해서 그때까지 무시를 하고 있었던 임정,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이에요. 그 다음에 이것이 어디로 이어지느냐, 임정의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몇 사람이 장제스를 찾아가서 카이로 회담으로 당신은 출석해야 된다, 1943년, 거기서 코리아, 한국의 독립이라는 것을 연합국하고 약속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해서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처칠하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함께 회담을 하면서 그 중 하나로서 적당한 시기에 코리아, 그러니까 한국의, 노예상태에 놓여 있는 코리아를 해방시킨다, 이것이 결정되는 것이죠. 그 연장선상에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임정의 연장선상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라는 것이 하나의 역사적인 맥락으로 보면 확실하다고 저는 보고 있어요. 여러 가지 정치적인 논란이 있다 하더라도 바로 1919년 임정의 수립이 대한민국까지 이어진다, 라는 면에서 저는 헌법에 기재되는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점으로 세우는 것이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맞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신주백 : 진행자 분, 제가 잠깐 끼어들어서 죄송한데 호사카 선생님 발언에 대해서 보조, 보완을 좀 하자면 이런 것 같아요. 1948년과 19년을 선택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남북 분단의 상황이 반영된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남과 북의 체제우월경쟁, 역사적 체제우월경쟁의 중요한 포인트 중에 하나가 역사적 정통성을 어느 쪽에 두느냐, 이고 누가 더 우월한가, 역사성에서, 이 부분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경쟁이 벌어지는 여파로 남쪽 내에서의 두 정치세력 간의 이해관계의 차이인데. 결과적으로 보면 분단의 산물이거든요? 그래서 분단을 넘어서는 관정에서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정통이라는 것에 얽매이다 보면 정통은 무엇을 전제로 하냐면 비 정통에 대한 배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 논쟁이 지나치게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다는 맥락이 아니고 나와 다른 세력에 대한 배제, 내지는 배타가 혹시 개입할 여지가 많아지는 부분에서 저는 상당히 우려를 느끼고 있는 것이거든요? 제발 이 부분이 화합으로 가는 역사인식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전영신 : 사실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건국절이라는 개념이 없이 광복과 건국을 혼용해왔는데 여기에 정치논리가 교수님 말씀처럼 개입이 되면서 이것이 갈등하고 반목을 유발한다면 차라리 임시정부 수립일하고 광복절을 따로 기념하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요?

△신주백 : 그러니까 1949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있었던 49년의 4대 국경일 제정 때 이 날은 광복절이야, 라고 네이밍을 딱 합니다. 그것 자체를 받아들이면 되는 거에요.

▷전영신 :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최근 호사카 교수께서 일본은 엄청난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사과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다면서요?

▲호사카 유지 : 예, 저는 올해 4월에 위안부 자료집을 냈습니다. 일본 고문서를 3년 정도 번역하면서 450개 정도 번역했는데요. 그 중에 중요한 80개 정도를 한국어 번역본으로 냈고 거기에 해설을 붙였습니다. 그 내용으로 보면, 그리고 일본 병사들의 증언도 많이 모았습니다. 그 내용으로 보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말씀하신 내용들이 다 일치하는 거에요. 그 증언하고 일치하는 내용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 측에서는 중간 업자들이 인신매매를 한 것이다. 일본정부나 일본군은 관계가 없다, 그런 식으로 발을 빼는 것이죠. 그것의 일본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업자들에 대한 문서가 또 발견됐어요. 그런데 그것은 일본 정부가 업자들을 선정하면서 너희들은 자발적으로 했다고 해야 된다, 그런 식으로 극비로 해라, 그런 문서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업자 자체를 확실하게 일본정부하고, 일본군이 선정하고, 그러나 너희들이 자발적으로 했다, 우리는 관계없다, 이렇게 하라는 문서 자체가 존재합니다. 고문서입니다. 이런 것들이 점점 밝혀지는 것이죠. 그리고 일본 병사들이 당시 위안소를 많이 사용했잖아요? 그런데 그 일본병사들이 조선인 여성을 당시에 만나서 조선인 여성들이 굉장히 많이 호소를 했어요. 나는 속아가지고 여기에 왔다, 도쿄에 가서 1년 간 공장에서 일을 한다고 듣고 응모를 했는데 남쪽으로, 남쪽으로 와서 버마, 지금 현재 미얀마까지 왔다, 여기서 위안부가 되라고 강요를 당해서 돌아갈 수가 없다, 울고불고 일본 병사들에게 호소한 거에요. 그러니까 그 일본 병사는 헌병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헌병이 그런 것을 바로잡아야 하잖아요? 그러나 헌병에게 이야기를 해도 전혀 개선된 것이 없어요.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일본군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대로 나뒀던 것이고요. 업자들에 대해서도 그대로 나뒀다는 것이 굉장히 많은 고문서에서 발견되고. 그리고 또 하나 말씀을 드리면 어떤 고문서에서는 위안부 한 사람당 일본 병사 100명을 배정한다,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당 100명이 매일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많은 분들이 하루에 70명한테 당했다, 라든가 50명한테 당했다, 라든가 많은 증언을 하셨어요.

▷전영신 : 그런 것들이 다 문서로 남아있는 거네요?

▲호사카 유지 : 문서로 남아있는 거에요. 그런데 지금까지 그러한 것을 많이 확인을 못했어요. 그러나 이번에 정확하게, 하면 할수록 이것이 일치가 되는 거에요. 좀 많이 늦었다는 감이 있어요. 생존자가 지금 27명밖에 없는데요.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밝혀야 되고. 그리고 북한의 위안부 문제는 전혀 해결된 바 없습니다. 남한의 문제만 외교적으로는 무엇이라고 하기 어려운 위안부 합의라는 것에 발목이 지금 잡혀있는데요. 그러나 일본하고 북한 사이에서는 북일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청구권 문제라든가 기타 모든, 그러니까 65년에 남한하고 했던 문제는 다 북한에서는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의 연구내용을 북한에 많이 알려주고 북일 수교할 때 많은 참고가 되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전영신 : 북한과 함께 풀어가야 될 문제들이 참 많아 보입니다. 올해 광복절은 일본의 패전일이기도 하죠. 아베 총리는 올해도 야스쿠니 신사참배 대신에 공물료를 봉납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호사카 교수님, 먼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해주시죠.

▲호사카 유지 : 야스쿠니 신사라는 곳은 일본이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 만든 그러한 군국주의의 상징입니다. 일본에서, 그 신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죽은 전사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신으로 만들어서 계속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야스쿠니 신사이고요. 거기에 전범 7명도 합사되어 있기 때문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는 것 자체가 전범을 신으로 간주하여서 지금도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서 반성이 없다, 라는 하나의 행위입니다. 아베 총리는 거기에 참배를 하지 않지만 항상 공물을 바치고 있다는 것은 대외적으로는 나는 참배하지 않고 있지만 대내적으로는 참배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우리 쪽에서는 그 의미를 잘 알고 일본에 대해서 경계심을, 야스쿠니 신사라는 곳을 봐도 계속 경계심을 가져야 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영신 :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광복절의 의미와 기억해야 될 부분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숙제들에 대한 이야기 나눠봤는데요. 시간이 벌써 마무리할 시간이 됐습니다. 너무 시간이 짧습니다. 오늘 어떠셨는지 신주백 교수님 한 말씀 해주시죠.

△신주백 : 오늘이 73주년 광복절인데 대통령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 지는 참 기대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8월 15일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남북 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항상 던지는 기념일로 발언을 하셨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1945년 이래 73년 만에 우리에게 처음으로 분단이라는 구조가 변동될 수 있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제발 이 부분이 지속돼서 정말 구조가 변동되는 결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고 그런 바람을 8월 15일에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영신 : 호사카 유지 교수님도 한 말씀 마무리로 해주시죠.

▲호사카 유지 : 역시 현재까지는 분단의 아픔이 있었지만 진정한 광복이라는 것은 역시 남북 간의 평화, 그 다음에 통일로 완성된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이 그러한 확실한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영신 : 광복절 특집 전영신의 아침저널 오늘은 역사전문가 교수님 두 분 모시고 감동적인 역사 이야기 나눠보는 시간으로 마련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신주백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교수, 그리고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와 말씀 나눴습니다. 두 분 오늘 이렇게 휴일 아침에 직접 나오셔서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주백 : 고맙습니다.

▲호사카 유지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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