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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이 시대의 선사,설악산 호랑이 설악 무산 대종사의 영결식이 지난 30일 봉행됐습니다.

불교계가 무산 대종사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는데요. 전경윤 기자 나와있습니다.

질문 1.이 시대의 큰 어른이었죠 . 설악 무산 대종사가 우리 곁을 떠났는데 지난달 30일 그러니까 지난 수요일에 영결식과 다비식이 봉행됐죠 ?

답변 1.그렇습니다. 평생을 수행 정진과 전법 교화에 바친 설악 무산 대종사는 지난달 26일 법랍 62년, 세수 87세로 원적에 들었는데요.

그제 영결식이 열린 신흥사 설법전 앞 특설무대는 큰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한 스님과 불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무산 스님의 영결식은 사부대중의 애도 속에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됐습니다.

조계종 종정 진제 대종사는 무산 대종사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선사로 수행자의 참모습을 후학들에게 보였다고 추모했습니다.

[진제 대종사 / 조계종 종정]

"무산 대종사께서 남기신 팔십칠의 성상은 선과 교의 구분이 없고, 세간과 출세간에 걸림이 없던 이 시대의 선지식의 발자취였습니다"

평생 도반으로 지낸 원로 스님들은 무산 대종사의 원적에 애도하면서, 생전 모습을 회고했습니다.

특히 총무원장 설정 스님은 종단 주요 스님들에 대한 각종 의혹 제기로 어려움에 처한 종단 현실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드러내면서 대종사의 지혜가 더욱 그립다고 말했습니다.

[설정 스님 / 조계종 총무원장]

["종단 현실과 세상살이가 힘들수록 더욱 대종사님의 지혜가 절실할 것입니다. 사바세계를 떠나셨지만, 변함없이 용기를 주실 것으로 믿고 정진하겠습니다.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과 나에게 꽃을 던지는 사람을 함께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신 스님의 말씀..."

중앙종회 의장 원행 스님, 전국 선원수좌회 공동대표 의정 스님, 교구본사 주지협의회 회장 성우 스님 등은 조사를 통해 무산 대종사의 원적을 애도했습니다.

영결식에 이어 무산 스님의 법구는 금강산 건봉사 연화대로 옮겨져 다비식이 거행됐습니다.

스님과 불자들은 육신의 옷을 벗어던진 무산 스님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설악 무산 대종사의 49재 가운데 초재는 오늘 설악산 신흥사에서 봉행됐습니다.

초재에 참석한 사부대중은 설악당 무산 대종사 원적을 추도하고 스님의 유훈을 잘 받들어 나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초재에는 신흥사 주지 우송스님과 사제인 도후스님, 지원스님,도반인 정휴스님, 마근스님 등 문도 스님들,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영진스님 등과 기본선원 수좌 스님, 신도 등이 함께 했습니다.

무산 대종사의 49재는 초재를 시작으로 백담사와 낙산사,만해마을,진전사,건봉사를 거쳐 7월 13일 신흥사에서 막재를 봉행할 예정입니다.

질문 2]스님의 원적 소식이 알려진 후,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SNS 계정에 글을 올려서 화제가 됐었죠?

답변 2.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SNS를 통해 무산 스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는데요.

그 글 중 일부를 잠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제야 털어놓자면 스님께선 서울 나들이 때 저를 한번 씩 불러 막걸리 잔을 건네주시기도 하고, 시자 몰래 슬쩍슬쩍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주시기도 했습니다. 물론 묵직한 ‘화두’도 하나씩 주셨습니다. 살아계실 때도 생사일여, 생사를 초탈하셨던 분이셨으니 ‘허허’하시며 훌훌 떠나셨을 스님께 막걸리 한잔 올립니다.”

문 대통령과 무산 스님의 깊은 인연이 녹아 있는 이런 내용의 글이 게시가 됐고요.

또 문 대통령은 청와대 불자모임인 '청불회'를 통해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며 위로의 뜻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질문 3.설악 무산 대종사는 정관계 인사 등 사회 각 분야의 인사들과 친분이 깊었고 많은 존경을 받은 스님 아닙니까 ?

답변 3.설악 무산스님은 시인으로써 문학계 인사들과의 친분은 말할 것도 없이, 문재인, 손학규,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 등 정관계인사들과 돈독한 친분을 쌓았습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김진태 전 검찰총장, 김희옥 전 헌법재판소장 등 법조인들은 스님의 선시를 높이 평가하고 대단히 아낀 것으로 유명합니다.

설악 무산스님은 정치인들을 만날 때 마다, “놓음으로써 스스로를 건지라”고 당부했습니다.

특히 스님은 흥망성쇠와 굴곡이 심한 정치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살뜰히 챙겨준 반면, 소위 잘 나갈 때는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무산 스님을 기억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스님이 대통령이나 지역주민이나 똑같이 대했고, 나라걱정을 많이 했다고 전합니다.

질문 4.스님은 동안거와 하안거 결제와 해제때 서릿발 같은 법문으로 후학들에게 늘 모범을 보여온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죠 ?

답변 4.지난해 하안거 해제법회 현장에서 스님의 법문은 참석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스님은 당시 법문을 통해 “나는 대중 여러분 한번 바라 보고 대중 여러분들은 나 한번 바라보면, 나는 내가 할 말을 다했고 여러분들은 오늘 들을 말을 다 들은 겁니다. 날씨도 덥고 하니 서로 한번 마주보고 그랬으면, 할 말 다하고 들을 말은 다 들은 겁니다. 오늘 법문은 이게 끝입니다.”라고 설했습니다.

30초 정도 밖에 안되는 촌철살인 같은 법문도 법문이지만 주장자 대신 손뼉으로 법문을 마친 설악 무산 스님은 일체의 설명과 사족없는 법문만을 남긴채 홀연히 법상을 떠나 강한 울림을 남겼습니다.

질문 5.무산 스님은 또 뛰어난 글 솜씨로도 유명하지 않으셨습니까?

한글 선시 분야를 개척한 대표 시인이기도 한데, 스님이 생전에 남기신 작품들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시죠.

답변 5. 네 맞습니다. 스님은 속명인 ‘조오현’을 필명을 사용하셨는데요. 오랜 시간 문학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오셨습니다.

1968년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1977년 첫 시집 ‘심우도’를 출간했고, 50 여 년 동안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시며 현대시조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아지랑이’와 ‘아득한 성자’가 있습니다.

특히 올해 4월엔, 등단 50주년을 맞아 문집 '무산 오현 선시'가 출간돼 관심을 모았습니다.

무산 스님의 대표작 33편과, ‘시인 조오현’을 평소 존경해온 문인들이 스님을 주인공으로 쓴 인물시(詩)와 인물 단상 글들이 담겨 있습니다.

스님의 문학적 성취와 업적을 평가하는 후학들의 연구 활동도 활발히 이뤄져 왔습니다.

스님의 심오한 문학세계를 다룬 ‘설악 조오현 선시조 연구’ ‘조오현 선시 연구’ 등 박사학위논문을 비롯한 연구논문만 수십 편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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