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 국회의사당 로텐더 홀에서 구면인 일본인 외신 기자와 마주쳤습니다. 드루킹 특검법, 홍문종‧염동렬 의원 체포동의안 처리를 앞두고 취재진이 장사진을 친 현장에서 스님처럼 빡빡깎은 머리 스타일의 그는 금방 눈에 들어왔습니다. 1년 전 청와대 근처에서 딱 한번 밥을 먹은 게 전부지만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한 그는 난데없이 ‘태영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탈북자인 태영호 전 주영 북 대사관 공사가 인근 의원회관에서 북한 권력층의 실상을 담은 회고록 출간 기자회견을 열어,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여야간 다툼을 체크하는데만 정신이 팔려있던 저는 중요한 기사꺼리를 놓친 듯한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그와 작별했습니다. 이후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특검법 가결, 체포동의안 부결이 이뤄졌고 대한민국은 이내 이들 뉴스로 뒤덮였습니다. 반면 ‘태영호’ 관련 기사는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키워드 검색을 해보니 몇 건은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 일본 기자가 속한 외신과 달리 ‘태영호 기자회견’을 국내 언론이 외면했다는데 내심 안심(?) 하면서 큰 고민 없이 관련 뉴스를 방송 아이템에서 생략했습니다. 하지만 하루 뒤 북한은 태영호 기자회견을 이유로 들어 다음날인 16일 열기로 한 남북고위급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했습니다. 순풍에 돛단듯 순조롭던 남북간 대화 분위기가 일순간 얼어붙었고 싱가폴 정상회담을 앞둔 북미 관계에도 다시 빨간불이 들어온 시점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출판사가 기사 참고용이라며 미리 택배로 보내줘 책상 한 쪽에 놔둔 태영호작 <3층 서기실의 암호> 증정본을 집어들었습니다.

   북한이 남북고위급회담을 중지시키며 “천하의 인간 쓰레기가 국회 앞마당에서...”란 성명을 내놓자 우리 언론은 그제서야 전날 태영호 전 공사의 회견장 발언을 앞다퉈 복기했습니다. 태 전 공사는 회견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와 진정성을 전면 부정했는데, 여러 발언 가운데 “김정은 쇼맨십은 아버지(김정일)와 다르다, 완전한 비핵화란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부분이 특히 북한 지도부를 자극한 것 같습니다. 태영호 회고록에 담긴 일부 내용도 ‘최고 존엄’을 모독했다고 여긴 듯 합니다. 542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 <3층 서기실의 암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김정은은 권력 획득 과정에서 카리스마를 창출하지 못한 것에 더해 태생적인 콤플렉스가 있다, 스스로 백두혈통임을 내세우지만 김일성의 인정을 받지 못한, 갑자기 튀어나온 이상한 백두혈통이다...(중략)...신격화는커녕 지도자로서의 정통성과 명분이 부족한 김정은이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핵과 ICBM, 그리고 공포정치다...(중략)...김정은은 또한 성격이 대단히 급하고 즉흥적이며 거칠다. 그러면서 두뇌와 논리가 있는 편이다. 이것은 그의 과격한 행동에 성격적인 측면과 전략적인 측면이 존재하며 때로는 그 두가지 혼합된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의미다...(중략)...그의 카리스마는 이제 추락하는 것만 남았다.’ 이런 글로 북한의 격한 반응을 초래한 지 보름이 지난 지금, 태 전 공사는 국정원 자문위원에서 돌연 사퇴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3층 서기실의 암호>는 각종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단숨에 1위로 올랐습니다.

   요 며칠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요동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격 취소 발표로 벼랑 끝에 몰렸던 북미정상회담의 불씨는 거듭된 반전을 거쳐 뒤살아난 듯 합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변덕스러움과 냉혈적 승부사 기질에 판이 언제 어떻게 흔들릴 지 불안하긴 여전합니다. 태영호 회고록에 따르면 성미 급하기로는 김정은 위원장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파국’을 선언하면서 결과적으로 주도권을 움켜쥐었습니다. 며칠간의 이 과정을 보며 저는 ‘태영호 회고록’처럼 미국 저널리스트 마이클 울프가 쓴 책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도 꺼내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을 묘사한 부분을 유심히 들여다봤습니다. 477페이지에 담긴 내용입니다. ‘백악관의 모든 고위 참모들에게는 대통령 트럼프를 대하면서 품게 되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있었다. 그가 ‘왜’ 자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케이티 월시는 이렇게 분석했다...(중략)...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끊임없이 뭔가를, 그게 무엇이든 쟁취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그가 반드시 승자처럼 보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트럼프와 핵심 참모들의 치부를 드러낸 마이클 울프의 한글 번역서는 지난 3월 14일, 북한 권력 핵심부의 실상을 폭로한 태영호의 회고록은 5월 15일, 이렇게 두달 간격으로 공식 출판됐습니다. 충동적이며 성미 급한 ‘닮은 꼴’ 지도자가 맞붙을 세기의 담판을 앞두고 두 신간 서적은 좋은 참고서가 될 듯 합니다. 더불어 어느 외신이 ‘세계에서 가장 변덕스런 두 지도자’라고까지 표현한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드러나지 않은 성격과 기질에도 관심이 뻗칩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북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할 수 밖에 없는 대한민국 지도자의 승패가 어쩌면 좀 더 ‘디테일한’ 부분에서 좌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 대통령과 가까운 현 정부 핵심 인사가 언젠가 사석에서 이렇게 귀뜸한 것이 뇌리에 남습니다. “문 대통령은 일을 지나치게 서두르는 측면이 있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를만큼 출력이 높아진 미-중 관계에서 차분하고 신중한 이미지의 중재자 문 대통령이 운전대를 잘 조절해 나가길 바랍니다./이현구 정치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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