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자를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대학에서도 강의를 하고 집필과 연찬에도 정진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먼저 <장자, 제자백가를 소요하다>를 내시게 된 인연을 말씀해 주실까요?

네, 대단한 계획을 가지고 쓴 건 아닙니다. 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이렇게 한 생각 나는 것도 인연이고 또 저렇게 한 생각 나는 것도 인연인데, 이 책을 쓸 때는 아마 두 가지 생각이 인연이 된 것 같습니다. 하나는 십 수년 동안 교양강의를 했어요. 제자백가 강의를 했는데 강의하면서 적절한 교재가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고, 또 하나는 장자를 공부하고 나서 장자의 시각을 가지고 제자들의 사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자의 시각이라는 건 뭐냐하면 모든 존재자가 각각이 마땅한 게 있다는 거에요.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살고 또 자기가 생각하는 게 옳다고 대체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 각각도 자신은 옳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느 사상이 더 우월하고 어느 사상이 더 열등하고 그런 건 없는 건데, 그 각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점을 그 사상가의 입장에서 장자의 시각으로 살펴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2. 젊은 시절 운동권, 유물론적 철학에 심취되어 있다가 한계를 느끼고 차츰 서양철학을 넘어 동양철학까지 섭렵하게 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게 선회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1980년대 초반에 대학에 입학을 했고 젊은 시절을 통째로 80년대 격동의 시기에 제가 청춘을 보냈습니다. 아주 힘들게 산 시절이었는데, 매우 집중된 상태로 요즘 표현대로 치열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제가 옳았다고 생각했던 것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잡념의 범주에 집어넣고 살았지요. 그런데 특히 제가 옳다고 생각했던 문제, 진리에 대한 문제 이런 게 강고했는데, 20대 말쯤 그러니까 80년대 말쯤 돼서 서서히 구멍에서 무슨 물이 새나가는 것처럼 뭐가 자꾸 빠져나가는게 느껴졌어요. 제일 핵심적인 것은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이념이 갖고 있는 이면의 문제, 뭐랄까 보편적인 인간애가 빠져버린-저는 그걸 계급적 이기주의라고 표현했는데-그 문제와 또 하나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빠져버린 유물론적 입장이죠, 그러니까 구체적인 인간이 빠져버리고 그냥 관념화된 인간, 관념화되고 추상화된 인간만 존재했지요. 저에게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그 문제가 해명이 안되고 있는데-제가 스스로 그걸 ‘철학적 파산’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내가 옳다는 생각과 신념체계가 누가 무너뜨린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서서히 무너진 거죠. 그러면서 허해져 버린 거죠. 그럼 어찌할 것인가.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생각한 사람들, 선지식들의 생각을 좀 공부해 보는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생각을 하고 공부하는 쪽으로 학문하는 쪽으로 마음을 두고 늦은 나이에 학문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한 십년 동안은 용맹정진 공부에 몰두한 것 같아요. 책도 게걸스럽게 보고 뭔가 나에게 답을 줄 것 같은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멀어도 쫓아가서 묻고 그랬습니다. 젊을 때는 지적 호기심이 컸기에 상당히 많은 걸 공부했던 것 같아요. 적어도 헤겔이나 서양철학의 일반이라든가 이런 것. 그런데 공부를 시작하면서 유가, 도가, 불교철학, 또 서양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데리다라든가 하이데거라든가 라깡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4. 철학적 파산이라 하셨는데 사회적인 배경이나 연관은 없었나요?

1990년대에 1991년도에 소비에트 러시아가 해체가 되지요. 그리고 중국에는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고 동구에서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이런 여러 사건들이 있긴 했으나 저는 사실 거기에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면에서 무너진게 더 큰 문제였어요. 내가 이걸 분명 그 때 옳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의문이 생긴거죠.

5. 유교식으로 말하면 중용, 불교식으로 말하면 중도랄까 이런 생각을 제가 해보는데, 제자백가들이 보면 쓴 글을 보면 일관적인 흐름이 중(中)을 두고 제자백가들을 배치하신 것 같아요. 이상쪽으로 맹자와 노자, 현실쪽으로 순자와 한비자, 그 위에 메타철학으로 장자를 두고요. 어떻게 이런 안목을 얻으시게 된 건지요?

원래 제가 전공이 국어교육학입니다. 국어선생님을 했었는데 허해지고 나서 뭘 공부할까를 생각하다가 처음에 교과서를 좀 봐야겠다, 우리 조상들의 교과서, 조상들의 교과서가 사서삼경이지요. 이런 역사서와 문학들을 보다 보니 감동적인 부분이 있었어요. 첫째는 문사철이 종합돼 있어 그 풍부함이 말할 수 없었고, 또 하나는 인간에 대한 강고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공부하고 노력하고 수양하고 학문하면 이상적인 상태, 그러니까 성인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믿음이 보였어요. 제가 예전에 갖고 있던 믿음이 붕괴된 이유 중에 하나가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회의였는데, 여기에서는 아주 너무 당연하게 철학적 토대를 가지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절대로 어떤 기계적인 어떤 물질의 운동법칙으로 인간을 설명하지 않고 인간을 마음을 가진 존재, 그리고 그 마음의 바탕에 아주 굳건히 받치고 있는 본성에 대한 신뢰, 이런 게 같이 있었어요. 그 부분에 깊이 감동을 받았고 그러면서 30년째 공부를 하고 있는 거죠. 젊었을 때는 한문공부를 같이 해야 하니까 맹자는 뭘 주장하는 거야, 순자는 이런 얘기를 하는 군, 한비자 너무 지독하다, 뭐 이렇게 저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논문을 쓰고 나서야 그 이전에 20년 동안 공부해 온 이 사람들이 다르게 보였어요. 있는 그대로 보인다 할까. 공자의 고뇌는 이런 거였구나, 한비자는 이런 고뇌를 했구나, 순자는 그렇구나, 이렇게 각각의 고뇌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어떤 지형도가 그려지더라구요. 자연을 있는 그대로를 강조하는 철학과 뭔가 인간이 노력을 해서 뭘 얻어야 한다는 두 부류가. 그게 천(天)과 인(人)으로 대표되는 개념이 세워졌지요.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이었어요. 모든 인간은 동일한 본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인간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인 본능에 영향 받는 존재다 라고 보는 경향, 그러니까 성선(性善)과 성악(性惡)이겠지요. 말하자면 굉장히 먹장구름이 낀 하늘이 언제나 시꺼멓다고 보는 견해가 있고 그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언젠가 밝은 태양을 만날 거라고 믿는 입장이 있었던 건데, 그런 입장들이 흥미로왔어요. 그러니까 이건 사태가 다른 거냐, 보는 사람의 관점이 다른 거냐, 그러니까 동일한 사태를 놓고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른 인간관과 세계관이 나타나는게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자기가 보는 만큼 세상이 나타나니까, 순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게 사실 자연스럽고 한비자의 눈에는 또 그렇고 맹자나 공자도 노자도 그렇구나 하는 것을 장자를 보고 나서 제가 얻은 안목이지요.

공자식으로 생각하면 중용이고 불교식으로 하면 중도다, 중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비슷하죠, 공자는 중용(中庸)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라 표현하고 장자는 양중(養中), 중을 길러라 이렇게 말합니다. 표현도 조금 다르고 내용도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공자의 중용은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하늘을 추구하는 이상주의가 있고 우리가 땅을 딛고 사는 현실이 있지요. 이상과 현실, 우리가 따라야 하는 자연과 인위, 형이상학적 욕구와 실질적 욕구, 우리 몸도 그렇죠, 우리의 정신적 욕구와 몸의 필요. 이런 양쪽을 잘 균형 잡아라. 이 중이란 게 일종의 거울 같은 것이거든요. 딱 가운데 자리에 놓아라가 아니라 한 쪽에 무거울 땐 이 쪽에 중심을 두고 이런 게 저는 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유위와 무위, 이렇게 저는 나눈 거죠. 그런데 불교의 중도는 또 다른 것 같아요. 있음에도 빠지지 말고 없음에도 빠지지 마라. 그러니까 유무 양변에 빠지지 마라는 거죠. 있음에 집착하면 있음에 빠지게 되고 없음에 집착하면 공에 빠지면 공을 등지게 된다는 거지요. 있는 게 아니니까 집착할 것도 없지만 없는 게 아니니까 무시할 수도 없는 게 바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실상이다. 그러니까 양변을 떠나 균형을 잡아라, 이게 불교의 중도라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양중은 조금 또 달라요. 장자의 양중은 기본 전제가 우리 모든 존재자는 가까이 이어져 있든 멀게 이어져 있든 깊게 이어져 있든 얕게 이어져 있든 삼라만상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걸 전제합니다. 마치 인드라 범망계 같은 거죠. 이어져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걸 별도로 내세울 수가 없다는 거에요. 관계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겁니다. 불교의 무아와 같은 이야기에요.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5백년 전에 쓰여진 장자인데 어떻게 이렇게 흡사한지 저도 놀랄 때가 많습니다. 나라는 게 별도의 존재인 줄 알고 나를 지나치게 현시하면 능동과잉이 되겠고 그렇다고 나를 숨기는 건 수동과잉이 되겠지요. 내세우는 거나 숨기는 거나 결국 나라는 걸 강고하게 세우는 데서 비롯되는 겁니다. 그래서 양중이라는 장자의 개념은 부득이 양중이라고 하는 것처럼 상황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내가 이런 의식을 내고 저런 결정을 하긴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필요에 의한 것, 관계적인 요구에 의한 것일 뿐 나라고 하는 존재는 언제나 중도를 지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불교식으로 보면 업대로 사는 거겠지요. 저도 나이 먹을수록 업력을 많이 느낍니다.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살아진 거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가 양중의 핵심으로 잡은 것은 나를 세우지도 않고 나를 숨기지도 않는 게 바로 거울 같은 마음이에요. 다만 나에게 오는 인연을 비출 뿐 그렇게 거울같이 마음을 쓰는 것, 이것을 양중의 요체로 장자는 봅니다.

6. 장자와 선불교의 접점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장자 철학을 강의를 하다보면 선불교와 너무 비슷하다는 말씀 많이 듣는데 당연한 말 같아요. 왜냐하면 시작부터 그랬으니까. 선불교는 중국에서 탄생했고 중국화된 불교입니다. 인도불교가 아니에요. 인도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화엄종, 천태종, 정토종, 선종 이렇게 발전을 하는데 흥미로운 건 선종에서 더 종파로 발전한 게 없어요. 당(唐)대에 시작해서 송(宋)대에 크게 발전하지요. 그 이후에는 거기서 머무는데, 엄밀하게 보면 선불교 자체가 붓다를 아버지로, 장자를 어머니로 해서 태어났다고 말할 만큼 장자의 영향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냐 얘기하려면 오래 걸리니까 간단하게 하면, 맨 처음에 사실상 불교가 들어올 때부터 노장을 격의해서 들어왔어요. 격의(格義)란, 불교가 들어왔는데 ‘공(空)’ 이게 무슨 말이지? 그 이전에 노자가 ‘무(無)’라고 했으니 아 그럼 무라는 뜻인가 하면서 노자와 장자의 틀을 이용해 불교를 받아들인 거죠. 그걸 격의불교라고 하는데, 선불교는 이거하고 차원이 달라요. 노장을 이해의 도구로 쓴 것이 아니라 불교에 선풍(禪風)이 들어가버린 겁니다. 어떻게 선풍이 들어갔느냐. 우리가 붓다의 팔만사천 법문은 다 대기설법이라고 하니까 불경을 읽을 때 굉장히 헤아려가며 읽어야 합니다. 어떤 대상에게 어떤 말씀을 하신 건지 헤아려가며 들어야 되지요. 그런데 선불교는 달라요. 선불교는 굉장히 특징이 명료하지요. 그러니까 직지인심 견성성불 하라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언어문제, 불립문자 교외별전이 바로 언어문제를 제기한 거죠. 언어문제는 장자에서 시작을 합니다. 장자적인 언어문제에서 일단의 두 개가 나오죠. 그러니까 불립문자 교외별전 이 두 가지가요. 세 번째가 직지인심 견성성불 아닙니까 굉장히 활달한 기풍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고(苦)가 굉장히 강조돼요. 인생이 고, 삶이 고, 실존적 고뇌 이렇게 강조가 되지요. 그런데 선종에서는 고에 대한 강조보다는 굉장히 진지하지만 활달하고 유쾌한 이런 풍이 있어요. 그런 풍은 사실상 장자에게서 온 겁니다. 장자의 그런 기풍을 처음 세운 사람이 저는 혜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마음을 만져주지요. 그런 면에서 유희적인 면모도 강하고 시원시원하지요. 조금 더 이론적인 부분은 복잡하게 들어가야 하는데 전체적인 기풍이나 풍모는 그런 영향인 것 같습니다.

7.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오늘날 동양사상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문제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아울러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지혜에 분별지와 반야지가 있다고 말하지요. 분별지는 우리의 생활, 이해관계, 편리, 이런 걸 위해 쓰는 지능이고, 반야지는 존재의 실상과 본원,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지죠. 장자에서도 이분법적인 분별지를 버리고 참된 지혜를 찾아야 실상에 결합해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근대 과학혁명이 발달해 온 것을 보면 분별지를 정점에 갖다 올려놓는 거죠. 인간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뇌를 극대화시켜서 쓰는 건데, 인공지능은 그런 분별지, 사실상 흐름에서 절정에 해당한다고 하겠지요. 문제는 분별지를 쓸수록 인간이 행복해지기보다 반대로 가는 경향이 많은 것 같아요. 분별지를 쓴다는 것은 오히려 실상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아까 선은 실상에 가까이 가는 거라고 했는데 이건 더 멀어지는 쪽이죠. 그래서 분별지를 강화하면 강화할수록 세계와 나는 멀어지고 인간과 인간 사이는 첨예하게 대립되지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그것이 내 개인적인 탐욕이나 이해관계와 편리를 위해 사용하느냐, 아니면 내 존재의 욕구, 뭔가 이 세계의 실재에 도달하기 위한 깨달음에 쓰느냐 다를 것 같은데, 그거야말로 중용이 필요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균형을 잡는 게 필요하겠지요.

젊은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달라 하면 할 말이 참 없지만 강의할 때 늘 이런 말은 합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마라. 남들 눈치를 보면서 스스로 왜곡시키지 마라. 누가 뭐라하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자기의 길을 가라. 자기에게 맞는 길을 찾으라. 불교에서는 이 삶을 고라고 한다. 세상이 전부 다 가시밭, 돌밭길이라는 거에요. 이 가시밭과 돌밭길을 없앨 수 없는데 가야 한다. 이 때 어떻게 하는게 가장 합리적이고 현명한 일이냐. 튼튼하고 질긴 가죽신을 신어라. 일종의 그게 저는 마음의 가죽신, 마음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이런 힘든 세상을 살면서 마음공부를 하는 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8. 앞으로 계획을 짧게 말씀해 주실까요?

그런 건 없는데요. 제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삶의 원칙이라면 인연따라 사는 겁니다. 인연따라 사는 건데 그게 계획이죠. 정말 다행인 건 제가 죽을 때까지 읽을 수 있는 불경이 산맥처럼 버티고 있다는 거에 환희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읽을 수 있는 마음공부할 수 있는 만큼 읽고 공부하고 그럴 겁니다. 지금은 전등록과 금강경을 붙잡고 있습니다. 공부해서 깨달음을 얻겠다 해탈을 얻겠다 이런 생각은 잘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덜 괴롭습니다. 고통을 없애려고 하지는 않지만 덜 괴로울 수 있으니까 덜 괴로운데 도움이 되니까 공부가 저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공부할 수 있도록 이렇게 만들어 주신 제 업에도 감사하고 부처님에게도 감사하고 장자에게도 감사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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