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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2018년 5월 25일(금) 오전8시(라디오)
     *TV는 다음주 화:오후9시, 수:오후3시40분, 토:밤11시
진행: 이각범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패널: 이홍규 카이스트 명예교수, 김성철 경주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이홍규
:우리 사회 갈등이 심한 이유 중 하나는 압축적 성장에 따른 불평등... 교육도 공심을 길러내는데 실패“
“교육이 오히려 분별심과 아상을 강화하는 현실...이걸 완화하는 사회적 기제가 발전돼야”
“‘다르다’는 인식의 문제이고 ‘틀리다’는 가치의 문제...역지사지.자타상환법 수행 필요해”
“아담 스미스도 공감을 강조한 ‘도덕감정론’ 저술... 화쟁사상이 서구 대가들 사이에 이미 자리잡고 있어”
“화쟁사상은 개인적 수행을 사회적 해법으로 연결시키는 하나의 다리... 정치.언론 등 각 부분에서 화쟁 방안 고민 있어야”
“경쟁과 협력은 늘 함께 하는 것, 생태계적 경제 시스템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경쟁과 협력의 조화가 관건”
 

김성철
“화쟁이란 갈라져 싸우는 것을 조화롭게 해소시키는 것, 용어는 달라지나 기본정신은 부처님 깨달음과 똑같아” 
“부처님은 ‘승가의 화합’을 강조하고 원효스님은 ‘사상의 화쟁’을 제시... 불이중도(不二中道) 맥락에서 수렴”
“자본주의 인간간 자체가 탐욕의 주체로서의 개인, 우리 헌법도 개인 중심의 조항들로 가득해”
“‘이념가’와 ‘실리가’가 균형 이루도록 노력할 때 갈등 조절 가능한 사회가 될 것”
“불교의 무아(無我)를 알 때 탐욕과 분노의 감정 해소 비로소 가능해”
“지나친 경쟁 사회화에는 신자본주의 무분별한 도입도 원인... 예술조차 경쟁 영역화”


이각범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이하 이각범)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우리 사회는 갈등 수준이 매우 높은 사회입니다. 왜 한국처럼 잘사는 나라에서 갈등과 반목이 그치지 않는가 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아는 세계인들의 상당히 깊은 의문사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갈등과 반목을 극복하는 법에 대해서 오늘 같이 논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으로 인해서 고통에 빠진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대상을 탐닉하는 탐욕, 그러한 탐욕이 채워지지 않으면 생기는 분노, 그리고 탐욕과 분노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무지함, 이러한 세 가지가 고통의 원인이어서 부처님께서는 탐진치 삼독을 극복하는 대열반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화쟁(和諍)은 그러한 탐진치를 극복하는 과정이고 또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화쟁을 이뤄내서 탐진치 삼독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오늘 이것을 주제로 전문가 분들과 토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이각범 :

네. 안녕하십니까? 오늘 화쟁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제목으로 전문가 분들 오셨습니다. 이홍규 카이스트 명예교수님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홍규 카이스트 명예교수(이하 이홍규) :
안녕하십니까 ?

이각범 :
김성철 경주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님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성철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이하 김성철) :
반갑습니다.

이각범 :
반갑습니다. 불교인들이 같이 모여서 오랜 간만에 불교적인 주제로 논의해 보는 자리가 되겠습니다. 오늘 주제가 화쟁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화쟁 과연 어떻게 이룰 것인지 총론적으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에 선승의 깨달음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부처님께서 그 깨달은 바를 화쟁사상과 어떻게 연결지을 수 것인가 김성철 교수님 말씀해 주십시오.

김성철 :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일단 화쟁이 뭐냐고 할 때 물론 프로그램 이름이기는 하지만은 ‘화’가 조화롭게 만든다든지 이런 뜻일 겁니다. ‘쟁’은 싸움이고요, 말씀 ‘언’자가 들어있기 때문에 말에 들어간 싸움을 조화시킨다 아마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흔히 일미(一味)란 말을 합니다, 한 맛이라고. 부처님 가르침부터 지금 현대의 선승에 이르기까지 다 한 맛으로 불교를 수행을 하고 그 다음에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핵심이 뭐냐고 할 때 부처님의 깨달음도 중도(中道)를 깨달으셨다. 첫 번째 설법이 중도를 설법입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요. 중도가 뭐냐하면 요새말로 푼다면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사상적으로는 흑백논리에서 벗어나는 거고요. 그런까 흑이다 백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사유의 그런 어떤 작동방식이 있는데 사유에서 벗어나서 깨달음을 얻게 되고요. 그 다음에 실천적으로는 나와 남을 나누는 이분법, 자타 이분법일수도 있겠죠. 그런 이분법에서 벗어날 때 자비심이 생기고요. 뭐 그렇게 간략히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그게 보통 중도를 불이중도(不二中道) 그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불이. 둘이 아니다 할 때, 둘은 나눠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나눠지지 않는다, 구분해선 안 된다는 그런 가르침인데, 그 불이중도가 부처님의 깨달음이었고. 현대에 간화선 수행할 때 우리 조계종 수행하실 때 선방에서 간화선 수행을 하십니다. 그 때 화두를 들을 때 예를 들어서 조주 ‘무’자 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개에게 불성이 있냐? 없냐?’ 할 때 조주스님께서 “무(無)”라고 답을 하셨는데 그 때 ‘무’자가 없을 ‘무’도 아니고 있을 ‘유’도 아니고 ‘유무’도 아니고 ‘비유비무’도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게 화두를 드는 방식이데, 요점은 생각을 중도의 궁지로 몰고가라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다시말해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그게 화두 드는 방식이고 그럴 경우에 끝에 가서 화두가 타파되면 ‘우리의 생각이 다 엉터리구나.’ 하는 걸 자각합니다. 그래서 생각가지고 만들었던 여러 가지 종교적, 철학적 의문들 이게 다 해소가 됩니다. 그래서 이 부처님의 첫 설법도 중도였지만 2600년 지난 지금까지의 그런 불교수행도 중도로 일관합니다. 그런데 화쟁이라고 할 때 저는 ‘화’자를 아니 ‘불(不)’자에 해당하고요, ‘쟁’을 두 ‘이(二)’ 자에 해당한다 생각합니다. 그런까 불이하고 불이, 중도, 둘이 아니다, 화쟁하고 같은 뜻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싸움을 갈라져 싸우는 것을 조화롭게 하듯 둘 다 해소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화쟁이라고 할 때 용어는 다르지만 기본정신은 부처님의 깨달음과 똑같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적용하는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지 시대가 달라졌고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각범 :
우리 김성철 교수님이 화쟁에 대해서 불교학적 관점에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일반 사회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는 이 갈등, 반목, 질시, 투쟁 이런 것들이 왜 우리 사회에서 유독 심한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원인은 무엇인지, 이런 것을 한번 이홍규 교수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이홍규 :
예. 지금 김 교수님이 불교사상의 아주 본질적인 명언을 잘 해주셨는데, 기본적으로 모든 시대나 갈등이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심각하냐 아니면 그 사회가 관리 가능한 정도의 갈등이냐 이런 것이 문제가 될 텐데. 우리나라의 최근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한 상황으로 자꾸 가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질문하신 구조적인 면에서는 네 가지 측면을 지적하고 싶은데요. 첫 번째가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아주 압축적으로 한 40~50년에 걸쳐서 하다보니까 여러 가지 한강의 기적이라는 기적도 만들었지만 또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모순적 상황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평등, 특히 지역. 계층 이런 데에 여러 가지 불평등적인 요소가 있고 그것이 이제 갈등으로 표출된다고 볼 수 있죠. 특히 민주화에 따라서.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지금 현재 경제적 트렌드인 것 같습니다. 뭐냐하면 경제가 굉장히 복잡하고 경쟁이 아주 치열해지고 속도가 굉장히 변화의 속도가 빠릅니다.

이각범 :

이홍규 :.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분별심이 강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굉장히 대립적 일 수 밖에 없고, 그 다음에 굉장히 조급해지고, 그런 면에서 불교 오늘 화쟁을 얘기합니다만 소위 원효스님이 얘기하신 대승기신론에서 얘기하는 ‘생멸문’이 너무 강해지고 있는 상황이 이쪽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굉장히 갈등이 증가할 수 밖에 없다 하는 거고요. 사회적으로 또 하나는 디지털, SNS 이런 것도 접합이 되면서 집단화가 굉장히 진행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집단 이기주의화 경향을 보이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측면에서도 갈등이 안날 수 없고요. 또 한가지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교육시스템. 여러분들이 말씀을 하시고 계시지만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소위 교육계 콘텐츠라는 것이 굉장히 암기식이고 단답식 위주식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것은 결국 시민정신이 뭐고 도덕이 뭐고 법치주의가 뭔지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거든요. 일종의 공심이라는 부분을, public mind 라는 부분을 결국 교육이라는 시스템 내에서 해내지를 못하니까, 그런 심성을 가진 우리 자신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각범 :
예. 우리는 지금 현재 사회구조적으로 볼 때도 갈등의 요소가 줄어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증폭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아주 미묘한 시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시 근본적으로 부처님 사상으로 돌아가서 부처님 당시에도 종단에 대해서 물론 화쟁이라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화합하라’고 하는 말씀을 여러 차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그 말씀과 원효대사께서 말씀하신 화쟁이라는 것, 이것은 어떤 연관에서 우리가 현재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김성철 :
화합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때가 대상이 승가를 대상한 것입니다. 우리가 불법승 삼보를 얘기하는데 삼보 중의 승이 상가의 음사어입니다. 상가는 대중집단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통체라고 풀어도 되고요. 그래서 불교의 특징 중 하나가 공동체를 아주 중시하는 겁니다. 공동체를. 공동체가 와해되면 그게 바로 갈등이고 또 문제가 생기고 나중에 와해가 되면 불교의 종파가 갈라지기도 합니다. 부파가. 그러기도 하지만, 그걸 항상 경계하시면서 공동체가 분열을 일으키는데 그런 어떤 역할을 했던 죄를 지었을 경우에 중죄로 처벌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부처님 율에 보면, 파승가화합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장 심한 죄가 승가에서 추방하는 죄가 하나 있고요, 또 두 번째가 파승가화합죄가 들어가는 승잔죄라는 겁니다. 추방은 안하는데 가장 엄한 벌인데, 그게 분열을 일으킬 때 갈등을 일으킬 때. 그래서 항상 화합을 얘기하셨습니다. 제 생각에 승가가 공동체고요. 또 하나 우리 인간이 넓혀가서 모든 생명의 세계에서 어떻게 보면 최강자가 되었거든요. 가장 강한 그런 포식자라 해도 되고요. 그 비결은 사회성에 있다고 봅니다, 사회성. 내 혼자 힘으로 이루어 진 게 아니고 남이 이룩한 여러 가지 노하우를 말을 통해서 전수받아서 문명이 누적이 되가지고 이제 인간사회가 가장 강력한 이런 사회가 되었는데, 사실은 이 자리에서도 우리가 입는 옷이든지, 컵이든지, 종이든지, 어느 하나 내가 만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말고 다른 생명체는 까치든지 뭐든지 다 자기가 만든 집에 살고 자기가 구한 먹이를 가지고 먹고 삽니다.

이각범 :
네..

김성철 :
인간만이 인간은 삶의 99%이상이 타인에 의존해서 사는 그런 동물인데 그런 인간의 본질 이 불교에 들어와서 승가를 이룬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과 악이 있고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잘 할 경우에는 선, 남을 해치면 악이고요.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사람이 최상의 존재로 등극하게 되는 비결이 화합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깨는 것을 엄하게 하지 않았나.

이각범 :
원효대사께서 말씀하신 화쟁사상은 거기서 어떤 연관이 있죠.

김성철 :
부처님 당시는 화합이었고요, 원효스님께서 실제 말씀하신 것은 그런 대중의 어떤 분열보다도 어떤 사상적인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불교가 2600년 전에 인도에서 탄생해가지고 중국을 거쳐서 한국까지 들어왔는데 그게 온갖 불교가 다 들어옵니다. 그러다보니까 실제로 인도에서 1000년 이상 걸리면서 발전한 불교인데 순서도 나중에 발달한 게 먼저 들어오기도 하고 반야경 계통이 먼저 들어옵니다. 후대에 나온 건데. 그러다보니까 하나의 불교인데 도대체 혼동이 되고.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제 사상적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원효스님께서 깊이 사상들을 깊이 통찰하시고 ‘취지는 다 마찬가지다. 하나 다를 게 없다.’는 그런 의미에서 이 화쟁의 가르침을 펴셨는데, 그 저술이름이 ‘십문화쟁론’입니다. 그 저술을 쓰셨고요. 십문, 열가지 그런 어떤 분야에서 다툼을 이설을, 다른 이론을 화해시킨다 이런 뜻입니다.

이각범 :
네.

김성철 :
그래서 일단 원효스님의 화쟁은 그런 불교사상에 대한 얘기이고 일반 부처님의 화합에 대한 얘기는 승가 대상에 대한 얘기입니다. 어쨌든 그 핵심은 사상이든, 실천이든 핵심은 처음 말씀드렸던 ‘불이중도’, 나누지 말라는 그런 것까지 수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각범 :
네. 아까 이홍규 교수님께서 우리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형성되어진 갈등의 그 원인, 그리고 그 갈등에 대한 치유보다는 갈등을 증폭시키는 여러 가지 기제에 대해서 말씀하셨거든요. 그 중에서도 맨 마지막에 제시하신 교육에서 ‘교육이 갈등을 치유하기보다는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제 개인경험을 말씀드린다면 이른바 386 세대의 마지막 학번과 90년대 학번의 처음시기에 서울대 사회대 학생학장보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학생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는 지금 사회대 학생부학장이라고 그러죠. 그 역할을 학교에서 보직으로 했었는데 그 때 제가 신입생들을 위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회를 만들고 신입생들에게 상당히 적어도 하루 종일, 입학식 하자마자 한 1박 2일 정도로 신입생들에게 민주시민으로서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이른바 민주시민교육을 해서 지성과 덕성과 리더십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을 하고자 했습니다. 거기의 핵심은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분법으로 선과 악을 억지로 나눠서 보고 그것을 통해가지고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반목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고 이 독재의 경험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민주체제를 갖췄으니까 민주시민으로서 자유와 책임이 둘이 아니고 권리와 의무가 둘이 아니고 그리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같은 게임을 하는 게임 당사자다 이것을 얘기하고 싶었죠. 비유하자면 우리가 고속도로를 달릴 때 차가 많이 막히면 짜증을 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게 구조적으로 보면 짜증낼 일이 아니거든요. 차가 많이 몰리지 않는다면 그 거리에는 고속도로를 놓지 않습니다. 많은 차가 몰려들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이미 놨고 그리고 더 많이 사용하면 더 빠른 길이 생길 것이고. 그래서 지금은 서로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어떤 의미에서는 동업중생으로서 서로가 같이 사는 게임을 하는 거고, 유명한 우리나라 축구선수에게 독일에서 일본선수와 경쟁해서 저널리스트에서 의도적으로 아주 얄궂은 질문을 했는데, 일본 선수가 경쟁의식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물었는데 우리나라 대표적인 축구의 간판 선수가 뭐라고 했냐면 “그 선수도 아시아를 대표하는 축구선수로써 우리가 아주 선의로 최선을 다해 서로 좋은 결과를 얻기 바란다.” 축구라는 것도 게임이다 이거죠. 같이 둘이 다른 편에서 오늘 싸우겠지만 이걸 죽고 죽이는 서로 상대편이 있어야 게임이 산다 이런 생각인데, 게임에 동참하는 동료다 라는 생각보다는, 어쨌든 이기고 보자는 하는 생각이 갈등을 만드는 원인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홍규 :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구조, 그 중에서도 특히 교육이라는 것이 부처님 말씀으로 하면 일종의 아상(我相)을 굉장히 강화시키는 그런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각범 :
네,

이홍규 :  
그러다 보니까 각 개인으로 봐서는 분별심을 강화하고 아상을 강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사회가 제대로 되려면 사회현상이 그렇게 트렌드가 잡힌다 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완화시키는 어떤 사회 기제가 발전이 돼야지 되는데, 그것이 예를 들어서 가정도 마찬가집니다만 학교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고요 사회에서의 언론이든지 여러 가지 사회적 공기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고요 그럴 텐데, 그 쪽 부분의 기제들이 전혀 작동을 못하고 있다, 그것이 한국 사회가 지금 당면한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과연 한국 사회가 진지하게 그 문제를 어떻게 들여다보고 어떻게 할 거냐. 아까 계속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개인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세상, 공동체인데, 이 공동체와 또 개인의 수월성하고를 어떻게 조화할 것이냐. 거기서 조화의 어떤 의미에서의 합일점이라고 그럴까 그런 것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한국사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각범 :

네, 우리가 흔히들 하는 얘기지만 ‘입장이 다르다.’ 하는 것하고 ‘입장이 틀리다.’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죠. ‘입장이 다르다.’ 라고 하는 것은 같은 사물을 봄에 있어서 시각이 다르다는 얘기고 ‘입장이 틀리다.’는 나는 올바른 입장에서 보고 있는데 저 사람은 다른 입장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틀리다는 거고 다분히 주관적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의 같은 공동체로서 살려면 ‘입장이 다르다.’ 라고 이해해야 될텐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학생들에게 1박 2일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학교측에서 실시하는 것은 학생회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됐고, 대신 학생회가 주관하는 2박 3일의 오리엔테이션이 일어났는데 그때 신입생들이 뭘 토론했느냐 라고 보니까, 우리의 올바른 주장을 펴기 위해서 학교에서 극복해야 될 틀린 입장의 교수들, 그리고 그 교수와 맞서는 방법, 이 학교의 여러 가지 모순을 끌어내는 방법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주 집중적으로 하고, 그리고 흔히 요새 말하는 역사교육도 아주 철저하게 받고 왔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 같이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동업중생이라는 의미를 갖춰야지 화쟁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데 ‘입장이 다르다.’ 라고 하는 것과 ‘입장이 틀리다.’ 이 차이를 어떻게 보시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김성철 :
‘다르다’ 라고 할 경우에는 안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건 당연히 남을 인정하게 될 수도 있는데, ‘틀리다’ 라고 할 경우에는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하면서 배격하게 되고 물리치게 됩니다. 그 때 이제 싸움이 생기고 갈등이 생깁니다. 그런데 저는 불교 가르침 중에 요새 쉬운 말로는 역지사지한다는, 입장 바꿔 생각하기 이게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인데. 티벳불교에서 수행법 중에 자비심을 강화시키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자타상환법이라고 합니다, 자타. 나와 남을 상환 바꿔보기 이렇게 됩니다. 그 수행을 한참 몇 달 동안 합니다. 어떻게 하냐면 비단 다른 사람만이 아니고 내가 접하는 모든 생명에 대해 길을 가다가 개미를 보고 바라보면서 개미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취하고요, 예를든다면 모기가 날아올 때 우리가 내 입장에서 볼 경우에는 새벽에 모기가 날아오면 참 불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든 지간에 불을 켜고서 잡아야지만 편하게 잠을 자는데 입장을 바꿔가지고 모기 입장이 될 경우에는 식사하러 왔다가 나중에 손바닥에 탁 압사합니다. 온 우주가 다 무너집니다 모기입장에서. 그래서 티벳불교는 그렇게 심지어 미물조차도 내가 입장을 바꿔가지고 생각하는 훈련을 시킵니다. 물론 당연히 사람에 대해서 입장을 바꿔가지고 생각하는 이것은 당연하고요. 그래서 그걸 자타상환법, 나와 남을 바꿔보기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 수행이 오래 무르익으면 어떻게 변하냐 하면 처음에는 원수를 보면 불쾌하고 화가 났는데 나중에는 원수의 모습이 보이면 ‘그가 참 어떻게 됐나 걱정스럽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내 마음이 개조될 때까지 입장 바꿔 생각하는 그런 훈련을 시킵니다. 그래서 저는 요새 갈등이 심한 이유가 다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그래서 자기만 생각하고 이런 문화가 너무 팽배하니까 그렇게 된 것 같고, 아마 근본원인은 자본주의 자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자체가 사실은 자본주의 인간관이 탐욕의 주체로서의 개인을 인간으로 삼거든요. 공동체가 아니고. 그래서 어떤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나라 헌법 만들어 진 지가 60년이 되었는데 헌법정신이 헌법이 개인중심의 헌법입니다. 모든 조항 전체가 다. 그게 요새 와서 모든 사람들의 행동 속까지 다 지배하는 그런 시대가 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각범 :

 
김성철:
그래서 저는 ‘입장이 다르다, 틀리다.’ 할 때 ‘틀리다’는 점에 대한 어떤 반성이 있어야지만 갈등이 없어질 텐데 그러려면 항상 역지사지에서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교육이나 훈련을 많이 시키면 어떨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마 가끔 정기교육은 아니지만은 시각장애인 체험을 한다든지 아마 그런 경험을 가끔 하는 걸 제가 봤습니다. 그런게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각범 :
김성철 교수님 모기 이야기 하시니까 제가 주말이면 산사에서 참선을 하는데요. 부끄러운 얘깁니다만 참선을 할 때 모기가 물면 화두가 끊어지니까 제가 화두를 제대로 들기 위해서 참선 때 입승스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미리 방에 있는 모기를 잡아버리거든요. 그래서 그거는 사실은 절에서도 금하는 일인데, 그러나 저는 그것을 작은 생명을 위해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놓치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그 값을 받더라도 여러 대중들을 위해서 모기를 잡는 게 더 낫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김성철 :
만약에 그러시다면 부담이 크실 겁니다. 많은 중생을 제도하셔야 되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만.

이각범 :
네, 그렇게 하는데 정말 이 깨달음에 갈 길로 나가는 데에 있어서 화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 힘든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잠시 전해드리는 말씀 듣고 뒤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2부)

이각범 :
네, 화쟁, 이것도 우리가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쟁을 통해서 우리가 개념을 형성해서 우리 의식에 문제를 보는 하나의 눈을 형성하고 있는데요. 이 ‘입장이 다르다.’ 하는 것이 ‘틀리다’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인식하는 것을 방금 김성철 교수님도 지적하셨습니만 이것이 화쟁사상의 입장에서는 정말 우리가 어떻게 봐야 될지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홍규 :
제가 이해하는 화쟁사상의 어떤 의미에서 현대적 해석은 바로 ‘다른 것이 틀리는 것이 아니다.’ 하는 주장을 아마 화쟁사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원효대사께서도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실제로 적용할 거냐 이러는데 있어서 굉장히 많은 논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상을 보면 아까 가치판단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가치판단을 자기하고 다른 의견을 가치판단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선악의 문제가 되버리고 그 선악의 문제이기 때문에 틀리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기본적으로 서양의 지식체계하고 동양의 지식체계하고 근본적인 차이에서 온다고도 보여지는데요. 서양의 과학적 지식체계라는 것이 일종의 절대주의적 관념을 갖고 있고요 동양의 소위 앎이라는 것은 굉장히 상대주의적 관점이라고 보여 지는데. 그러다보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좀 선하게 관점에서 보려고 하는 굉장히 어떤 의미에서의 사고의 습관에 빠지는 것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상대를 항상 공격을 하게 되죠. 상대가 주장하는 것은 적이 되니까요. 그래서 그것이 요새 진영주의 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만은 일종의 자기진영 속에 되고 자기진영 속에 빠지면 현대심리학적 용어를 빌리면 일종의 확인 증거 찾기의 편향, 바이어스를 보여주는 거가 되는 거죠.

이각범 :
예.

이홍규 :
그러니까 자기 진영을 계속 강화시킬 수밖에 없는 아주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하면 굉장히 아상을 강화하는 그런 프로세스에 들어간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것을 해소를 하고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해결책을 찾을 거냐. 그것이 아까 김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미 불교가 가지고 있는 어떤 중생심, 자비심 이런 것이 결국 그렇게 그 분별과 대립을 완화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게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아까 김 교수님께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이렇게 분열과 대립을 많이 조장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그것에 대해 찬동합니다만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아담 스미스의 얘기를 한다고 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화쟁이라고 우리가 얘기하는 요소도 아담 스미스도 얘기를 했다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는데요. 왜 그러냐면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보다 한 17년 전에 먼저 쓴 도덕감정론에서 소위 sympathy, 동감이라는 얘기를 하거든요. 사회의 동감이라는 것이 있어야지 사회가 굴러갈 수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이런 동감을 사회가 유지하고 만들어내느냐.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나중에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어떤 철학적 기반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 것들이 이미 화쟁사상이 서구에서도 그런 대가들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각범 :
예,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거기서 제일 핵심 개념이 지금 이홍규 교수님 말씀하신 동감 아닙니까? 동감에 대해서 서울시장을 지내신 조순 박사님은 뭐라고 그러셨냐면 “아담 스미스의 동감이야말로 유학을 하는 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공자님이 말씀하신 역지사지의 개념과 같다.” 같은 일을 함에 있어서 어떻게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해가지고 같이 시장의 행위자로서 행동하느냐, 이것이 다 공통으로 누리는 복지·복리의 근원이 된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동감이라는 기초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동양에서도 그랬답니다. 어떤 백정이 소를 잡는데 쇠고기를 먹으면서 백정이 소를 잡으면서 살생했다고 욕하지 마라. 그리고 아담 스미스도 도덕감정론에서도 그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사람들이 좋은 고기를 먹고자 하면 백정 내지는 푸줏간 주인으로 하여금 좋은 고기를 만들어라 라는 법을 만들 것이 아니라 좋은 고기를 생산하면 당신이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 하는 기제를 만들어 주는 것이 모두의 복지에 해당된다. 이것이 뭐냐하면 모두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욕심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그리고 정의에 대해서 독점하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시장과 전체적인 심성의 기초 위에서 경제정책을 펴야지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경제를 할 수 있다 하는 이런 점에서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고용을 늘리고자 하는 정책이 오히려 실업을 증가시키는 이런 어떤 상황과 결부 시켜봐서도 맞지 않은가 생각하고, 민주주의라는 것도 어떤 정의롭고 민주적인 세력과 정의롭지 못하고 독재적인 세력, 이것은 옛날에 군부 독재 시절에 가능했던 이분법인데, 그것이 무너지고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도 그 이분법에 있어서 적어도 우리 사회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다시 한 번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화쟁사상을 한번 다시 깃들여 봐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화쟁사상을 생각할 때 새롭게 시작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과학기술을 통해가지고 다시 한번 화쟁사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데, 김성철 교수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성철 :
뭐 제가 자본주의, 탐욕, 어떤 중심으로서의 개인이라는 인간관 하에서의 자본주의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거기에 대한 반발로 물론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나지만 실패하거든요. 그것도 옳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그래서 저는 생각에 불전을 보면 앞으로의 대안이 이제 어떤 암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냐하면 부처님 탄생하신 다음에 관상을 보는 사람이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하거든요. 세속에 계시면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하시면 부처님이 되신다고, 그 두 가지가 우화적인 신화적 얘기지만 실제 사람의 길 두 가지를 갖다가 집약해 놓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부처의 길은 제가 말을 붙였는데 ‘이념가’의 길이고 옳고 그런 것을 따지고 하는 길이고, 전륜성왕의 길은 황제나 어떤 정치권력가의 길이거든요. 여기는 ‘실리가’의 길입니다. 사람이 살 때 자기 인생을 설계할 때 어디를 갈 것인가 할 때 실리가와 이념가의 두 길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앞으로 미래사회도 그런까 공산주의 같은 경우에는 이념가가 지배를 했다가 실리가를 제압을 했는데 나중에는 자가 당착에 빠지거든요. 겉모습만 이념가일 뿐이지 실제로 권력이 돼서 새로운 계급, 유고의 밀러 반젤라스가 하는 사람이 말했던 ‘새로운 계급’이 되어 버립니다. 어쨌든 그게 대안이 될 수 절대 없고요. 그래서 저는 미래사회의 대안이라면 이념가와 실리가가 균형을 이루는 어떤 사회만이 영원한 대안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나와가지고 다 평화롭고 갈등이 아무것도 없고 이런 경우는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항상 힘의 균형이 균등할 때 그 때 실리가가 너무 판을 치면 옛날 1800년대 유럽처럼 여러 가지 전쟁이 일어나구요. 또 반대로 이념가가 너무 판을 치면은 조선시대도 사실 이념 사회거든요. 그 때 먹고 살게 없습니다. 다들 살기 때문에.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은 안하고 다들 이념만 얘기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이념가와 실리가가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우리가 꾸려나갈 때 매번 어떤 갈등은 항상 생겨나고요. 그걸 해결할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4차 산업시대에 가장 중요한 게 저는 4차 산업 이전부터 정보통신 문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터넷하고 컴퓨터하고 스마트폰 같은 기기가 생기면서 지금 아주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집니다. 뭐냐 하면 요새 아마 가끔 TV프로그램에서 현대판 노예든지 이런 말이 나오면서 난리가 납니다. 요새 미투 운동도 마찬가지고요. 옛날에는 후미진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몰랐던 그런 고통 받는 사람들이 지금은 다 노출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저는 굳이 앞장서지 않더라도 앞으로는 이념 쪽의 어떤 성향이 강하게 사회를 조명하는 그런 정의로운 사회를 지켜 나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4차 산업의 긍정적인 면이고요. 그래서 양쪽의 균형을 이루는 그런 식으로 정책이 구상되고 이제 그렇게 모든 사람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추구할 때 사회가 갈등이 생겨도 항상 조절되는 그런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각범 :
예, 아까 부처님께서 전륜성왕의 길을 가시느냐 아니면 부처의 길로 가시느냐 그 갈림길에서 부처의 길로 가셨다 하는 말씀 하셨는데. 저는 전륜성왕의 길은 현세에서 모든 중생들이 안락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실질적인 물질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 또한 상당히 중요한 공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역사적 상황으로 보면 세종대왕께서 전륜성왕으로서 우리나라에 참 좋은 공덕을 보여주셨고 며칠 전에 5월 15일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기념해서 스승의 날로 한 거 아닙니까? 세종대왕께서는 우리의 전륜성왕으로서 민족의 스승으로 자리 잡고 계시고, 또 인도에서도 아쇼카 왕이 전륜성왕으로 꼽히고 있는데 아쇼카 대왕만 하더라도 집권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집권한 뒤에도 수많은 정적 제거에 독재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그러나 아쇼카 왕이 했던 인도의 통일, 그리고 인도의 문물을 일으킨 큰 공로는 전륜성왕에 해당된다 이렇게 봤던 거죠. 저는 이 둘이 현세적인 중생을 구제하느냐 중생을 궁극적으로 최고의 최상승의 경지에서 구원하느냐 하는 차이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결국은 이 화쟁사상을 통해가지고 우리가 개인적인 수행을 하는데, 이 개인적인 수행을 어떻게 사회적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그런 경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까 김성철 교수님도 전륜성왕 말씀도 하시고 또 부처의 길도 말씀 하셨는데 화쟁사상이라는 것을 놓고 보면 이런 개인적 차원의 수행과 사회적 차원의 실천이라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이홍규 :
네. 저는 화쟁사상이 그런 개인적 수행을 어떤 면에서 사회적 해법으로 연결시키는 하나의 다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가 민주주의 민주주의 많은 얘기를 하는데요. 사실은 민주주의는 그냥 하나의 시스템일 뿐입니다. 거기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가 없는 거죠. 하나의 절차고 하나의 시스템이죠.

  

이각범 :
네.

이홍규 :
이 사회가 어떤 의사결정을 할 것이냐 하는 시스템인데, 그런데 결국 그 내용이 뭐냐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사회적 규율을 만드느냐 그것이 결국 핵심적인 문제라고 보고. 사회적 규율은 법치일 수도 있고 도덕일 수도 있고 도덕과 법치가 사회적 규율의 기본적인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그런 도덕과 법치를 어떻게 잘 만들어 낼 거냐 하는 것이 결국 초점이고. 그런데 전통적으로 우리 동양에서 보면 소위 그런 측면에서는 예치가 법치라는 개념보다 예치가 공자께서 말씀하신 그 예의 개념에 있어서의 예치가 발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종의 비제도적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무너져 버린 거죠. 지금. 서구화 산업화를 하면서 무너져 버렸는데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세울 거냐 하는 측면에서 아까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교육을 어떻게 세울 거냐, 교육을 다시 어떻게 세울 것이냐 하는 문제이고. 그 다음에 사회의 경쟁규칙을 어떻게 세울 거냐. 뭐 교육은 아까 말씀드려서 그렇습니다만 사회 경쟁규칙이라는 것은 지금 엄청난 여러 가지 사회적 담론들이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공정성에 관한 문제, 최근에 갑질 논란이 굉장히 많습니다만 갑질 얘기, 그 다음에 거짓 얘기, 그 다음에 막말 얘기, 숱한 논란들이 진행이 되고 그것이 도덕과 법치의 문제하고 아주 직결 돼있는 문제이다 하고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할 거냐. 그 다음에 과연 사회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컨트롤 하고 누가 할거냐, 정치가 할 수 있는 거냐, 아니면 정말 언론이 해야지 되는 거냐, 지식인들이 발 벗고 나서서 새롭게 나서서 틀을 정말 밤잠을 안자고 그것을 쟁론에 붙여야지 되는 거냐, 그런 여러 가지 이제 논의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건 뭐 어떤 의미에서는 방향은 확실히 옛날 원효대사께서 이미 제시를 한 것 같아요. 한국의 현대적 민주주의에 있어서 과연 어떤 민주주의가 되어야지 될 것이냐 것은 화쟁사상에 이미 나와 있다고 봅니다. 과연 우리가 그걸 어떻게 실천할 거냐. 우리가 과연 선악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니라 과연 서로 같이 사는 공동체에서 어떻게 화쟁 회통 할 거냐, 그런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각 부문들이 다 특히 정치와 언론 부문에서 고민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이각범 :
네, 지난한 문제가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선악의 이분법 구도에서 벗어나자 이렇게 얘를 하는데. 지난주 신문에 참 재미있는 여론조사가 나왔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아주 유명한 정치인이 대부분이 있죠 큰 사건에 연루가 돼서. 그런데 그 사건을 선악의 개념으로 하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렇게 됐을 거예요. 그런데 그 분의 지지률은 더 상승했습니다. 그래서 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 라고 정치적으로 문제되는 분의 지지율은 상승했느냐 그것을 신문이 재미있게 분석했는데, 그 분이 알고 보니 실세더라. 그 전에는 그렇게 실세인지 몰랐는데 여러 활동을 보니까 실세더라 해서 유권자들이 기왕이면 실세인 정치인을 지원하자 이런 감정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이 국민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도덕적인 관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질에 있어서는 누가 힘을 갖고 있느냐로 이걸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그걸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기사를 보고 무슨 책 제목을 생각했냐면 라인홀드 니부어 라는 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모럴 맨 앤 임모럴 소사이어티(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라는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 그런데 어떻게 보면 임모럴 맨 앤 모럴 소아이어티 그렇게 바꿔도 되지 않는가, 개인은 굉장히 부도덕한데 이 사회는 도덕하기를 바라는 그런 것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정적으로 치우치다 보면 모두 이제 감정이 앞서는 사회가 됐는데 정말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 판단이 잘 안 되는데요. 요즘 세상에 너무 감정이 앞서는 문제, 이것을 화쟁사상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김성철 :
감정 하면 세 가지일 겁니다. 불교에서 감정을 포함해서 번뇌라는 말을 씁니다. 번뇌. 탐욕, 분노, 교만 이 3가지 감정이 있는데, 불교에서는 항상 지혜를 강조하거든요. 감정보다도 지적인 것을 더 중시합니다. 보통 삼독이라고 할 때 세가지 독인데 탐욕, 그 다음에 분노하고, 어리석음을 얘기합니다. 탐진치 이렇게 얘기 합니다. 치심이 뭐냐 하면 어리석음이 뭐냐 하면 가장 핵심이 ‘내가 있다.’ 라는 생각이라고 얘기합니다. 나를 구심점으로 삼기 때문에 잡아끄는 마음이 내가 가지려는 이게 탐욕이구요. 나한테 해롭다고 생각하면 밀치는 마음이 분노고요. 그래서 실제로 밀고 끄는 마음이 감정인데 그 근본 원인은 ‘내가 있다’는 인지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인지. 그래서 실제 감정보다 더 깊이 있는 인지를 나의 어떤 세계관을 개조할 때 정화시킬 때, 다시 말해 불교에서 흔히 얘기하는 무아(無我)를 알 때, “아 내가 없구나, 구심점이 여기가 아니구나” 이것을 알 경우에 밀거나 잡아당기거나 하는 그런 감정이 많이 해소될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교육을 할 경우에 많이 좋아질 것 같고요.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우리 사회가 비교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이 교수님 서두에 말씀 하셨지만 다 경쟁 구도거든요. 전체가 다. 기업이든 어디든 평가하고 교수 강의평가, 일제고사 봐서 학생들 성적 평가. 심지어 경찰 활동하시는 분들 같은 경우에도 성과를 봐서 체포율 가지고 인사고과에 매긴답니다. 그래서 아마 거기에 저항도 하다가 지금은 그대로 진행되는 것 같고요. 요새는 은행이나 우체국에 가더라도요 직원 말을 믿지를 못합니다. 전에는 은행이 공신력이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가면 펀드 좀 하시죠 이렇게 합니다. 카드 하시죠. 왜냐하면 본인들 실적이 있기 때문에. 옛날 같으면 고객을 위해가지고 많이 조언을 했는데 요즘엔 본인 실적이 먼저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가 심한데 큰 이유가 아마 신자유주의를 무차별하게 도입하지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더 얘길 한다면 심지어 경쟁구조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TV 프로에서 노래 경쟁하는 프로가 있을 겁니다. 예술조차도 경쟁을 합니다. 뽑히는 사람을 보면은 막 크게 소리 지르는 가수가 뽑힙니다. 그런데 실제 음악은 조용한 음악도 있고 슬픈 음악도 있고 다 있는데 그걸 경쟁시키면 말하자면 빨주노초파남보 중에서 어떤 색깔이 가장 우수한가 이렇게 물어보는 겁니다. 당연히 빨강색 뽑거든요. 뭐도 모르고요. 그런데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에 팽배해 있는 경쟁문화 또 신자유주의 경제 원리는 너무나 타당할 것일 겁니다. 그런데 교육,행정,문화까지 심지어 아마 여러분 짝이라는 프로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짝. 남자 여자, 미혼 남녀 만나가지고 파트너 선긋기 하는 건데.

이각범 :
죄송하지만 저는 못 봤습니다.

김성철 :
그런가요. 그게 왜 폐지됐냐면 마지막에 프로에서 여자 하나가 없어졌는데 가보니까 프로그램 찍는 당일 날 목을 매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겉보기에는 우리가 즐거워요, 누가 실패하고 누가 짝이 지어지고 하는 게. 실제 당사자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경쟁 속에서 이기고 진다 할 때 가수들 노래 경쟁도 지면서 내려갈 때 신사적으로 얘기하지만 참 너무 힘들고 마음속에서는 그럴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혀 우리가 감상만하고 역지사지 하지 않는 그런 문화가 너무 팽배해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해서. 하여간 아마 전 세계에서 자살률도 제일 높고 OECD 중에서요 그 다음에 출산률도 제일 적죠. 그게 뭐냐 하면 사람살기 힘들다는 얘기에요. 힘들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런 경쟁 문화를 심지어 예술까지 점령한 경쟁 문화를 식히는 운동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자연히 이기적으로 사는 그런 마음도 없어지고 남을 배려하고 갈등도 해소되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각범 :
문화혁명 시대, 중국의 문화혁명 시대에 경쟁을 없앴습니다. 교육에서 일체 시험을 못 보게 하니까요. 그러니까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겼냐면 베이징대하면 중국에서 상당히 명문대 아닙니까? 베이징대 공과대학에서 2차 방정식을 못 푸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덩샤오핑이 문화혁명에 실패하고 난 다음에 집권하고 썼던 중국의 과학기술과 교육 혁명에 대해서 쓴 논문이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한 때 문화혁명에 심취했던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나오는 모든 자료를 모든 자료라고 제가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히 많은 자료를 접했던 한 사람으로서 봤었는데, 덩샤오핑이 경쟁은 교육에 반드시 있어야 된다. 그래야지 우리가 보다 더 잘 교육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서 선별하고 그런 사람이 중국을 이끌 수 있는 바로미터를 삼을 수 있다. 경쟁 없애는 것은 교육 전체를 죽이는 것이다 다만 경쟁을 시키는 방법에 있어서 경쟁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경쟁을 시켜야지 학교의 교사의 입장에서 경쟁을 시키고 학생을 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교묘한 문제를 내가지고 학생들에게 골탕을 먹이는 교육을 하지 말아라. 상당히 중국의 지도자로써 괜찮은 분석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참고로 제가 고등하교 3학년생 한번 설문을 돌린 적이 있어요. 그리고 똑똑한 학생들을 모아가지고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의 똑똑한 학생들이 뭐라고 대답했냐면 당연히 경쟁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는 시험문제, 또 우리가 하고 있는 학교에서의 이 경쟁은 너무나 평가 수준이 낮아가지고 정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못주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시스템을 만들어 달라 그래서 이걸 보면 학생들도 정말 선두에 나서는 사람들은 제대로 경쟁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교육이라든지 이런 면에서 우리가 정말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시장에서의 제대로 된 경쟁이 잘 승화되도록 해야 하는데, 이게 시장에서의 경쟁 말하자면 게임이 아니라 죽고 죽이는 일종의 사생결단이 되가지고 우리 사회의 큰 갈등을 만들지 않는가 생각을 하는데요.

이홍규 :
예. 지금 말씀하신 경쟁하고 관련해서는 저는 경쟁이라는 용어보다 과다한 물질주의적으로 불리는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돈이나 물질에 너무 집착하는 문화가 형성이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이제 경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 중심의 논리지만 상당히 그것이 퍼져나간 것은 확실한데 그런데 우리가 경쟁과 협력을 이것을 어떤 면에서 따로 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경제에서는 무조건 경쟁만 있고 다른 부문은 완전히 협력만 있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굉장히 잘못돼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경제에도 경쟁과 차별이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죠. 그렇지 않다 그러면 경제에서 수월성을 확보 방법이 없습니다.

이각범 :
그렇죠.

이홍규 :
결국 경제에서는 수월성 확보하는 것이 지금 글로벌 경쟁체제에서는 무지하게 중요한 얘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경쟁체제가 아주 기반이 되야 하는 것은 확실한 거죠. 경제가 경쟁체제라고 그래가지고 협동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면 어떤 기업이 하나 무엇을 생산을 하고 가치 창출을 하려면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있습니다. 거기에 협조를 다 얻어야지 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협동성에 대해서 관심을 안두고서는 가치창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4차 혁명도 그것이 굉장히 요체라고 보는데요. 4차 혁명의 굉장히 중요한 특징은 일종의 생태계적 경제체제로 시스템으로 바뀐다 하는 겁니다. 생태계적 경제시스템은 뭐냐면 우리가 보통 생태계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경쟁과 협력이 동시에 진행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경쟁 원리를 작동시킬 거냐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어떻게 협력 메카니즘을 만들어 내는 그런 제도와 도덕적 윤리를 만들어 낼 거냐 하는 그런 고민을 해야지 되는 거고. 아마 미래사회에서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고민의 대목이 그런 사회적 조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고민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 말씀만 더 드린다면 4차 산업혁명은 소위 융합연구라고 그러거든요. 융합적으로 일어나는데 그런 융합생태계에서 어떻게 할 겁니까? 뭐 완전히 공산주의 사회처럼 협력만 하라고 강요를 할 겁니까 아니면 완전히 과거의 사회처럼 경쟁만하라고 강요할 겁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거든요. 어떻게 경쟁과 협력을 조화시킬 거냐 그건 바로 우리가 가장 명심해야 할 대목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각범 :
4차 산업혁명 말씀하시니까 융합이 떠오르는데 참 좋은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원효사상의 화쟁에 대해서 불교학적 관점에서 오늘 아주 좋은 말씀해 주신 김성철 경주 동국대 교수님, 그리고 카이스트의 이홍규 명예교수님 사회경제적 입장에서 말씀 잘 풀어주셔서 두 분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김성철, 이홍규 :
감사합니다.

이각범 :
제가 서울대 사회대 학생학장보 시절에 학교에서 지성-덕성 리더십을 함양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서울대생과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의 학생들을 표준집단과 실험집단으로 나눠서 사회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한결같이 서울대학에서는 선거가 민주주의의 요체다 라고 얘기했고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 학생들은 법치가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법치 아래에서 모두가 공정한 경쟁을 하고 합당한 대접을 받는 사회가 민주적 사회라는 사회적인 합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거를 통해서 이기고 지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사회, 이것이 화쟁의 사회적 실천이라고 보고 오늘 두 분 말씀을 잘 듣고 토론 마무리 짓겠습니다. 감사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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