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S 전영신의 아침저널 - 화제 인터뷰] 차명숙 5·18 광주민주화운동 고문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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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 차명숙 대구·경북 5.18 동지회 공동대표 (5·18 광주민주화운동 고문 피해자)
□진행 : 전영신 기자

▷전영신: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이 광주 시위대와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했던 그날 계엄군의 만행을 가두방송으로 알린 분이 계십니다. 그때 나이가 열아홉. 계엄군에게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던 열아홉 소녀였는데요. “하얀 속옷이 까만 잉크색이 되도록 고문이 당했다.” 어느 정도로 참혹했을지 고초의 시간을 짐작케 합니다. 그렇게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온 시간들 시간은 흘러 흘러서 38년의 세월이 지났고요. 마침내 용기를 내서 그들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겠다, 진실을 알리겠다 나선 분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큰 박수로 맞이해 주시죠. 차명숙 씨 전화로 만나보겠습니다. 차 선생님 안녕하세요? 

▶차명숙: 네 안녕하세요.

▷전영신: 예 정말 어려운 결정을 해 주셨습니다. 

▶차명숙: 아니요 뭐 글쎄요. 마음 속에 늘 있었던 거라서 어려운 결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그냥 38년 동안 가슴 속에 들고 있었던 거를 좀 끌어내서 내려놓고 싶다라는 생각이 더 깊었을 겁니다. 

▷전영신: 그간에 마음의 무게가 어느 정도 되셨을지는 가히 짐작을 할 수 없겠습니다마는 일단 먼저 지금 어디에 사시고 어떤 일을 하고 계신 지부터 좀 소개를 해 주실까요.

▶차명숙: 네 지금 경북 안동에서 살고 있고요. 거기에서 제가 홍어를 조금 팔면서 살고 있습니다. 

▷전영신: 지금 대구·경북 지역 5.18 동지회 공동대표도 맡고 계시는데 광주에서 안동으로 주거지를 옮기신 건가요? 

▶차명숙: 아닙니다. 저희가 이제 원래 담양이 고향인데 그때 당시에 엄마랑 와서 간첩이다, 딸이 뭐 간첩이다, 어떤 폭도다 뭐 하여튼 그런 식으로 담양에서 굉장한 비판을 많이 받으셨던 거 같아요 잠시 들렸다가. 그래서 그때 당시 오빠랑 본적을 다 서울로 올리는 상황이 돼서 주소가 서울로 됐어요.

▷전영신: 그러셨구나.

▶차명숙: 그래서 출소하자마자 서울로 갔습니다. 

▷전영신: 그러셨군요.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힘드시겠지만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그 시간으로 함께 거슬러 올라가봐야 될 거 같습니다. 

▶차명숙: 아이고.

▷전영신: 죄송합니다. 그래도 증인, 증언들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요. 당시에 19세 소녀셨어요. 학생이셨던 거예요? 

▶차명숙: 아니요. 만으로 19살이고 그전에 제가 이제 우리는 양재나 그런 거를 배우는 세대예요.

▷전영신: 양재학원생이셨군요.

▶차명숙: 예 그렇죠. 양장점의 옷을 맞추고 하는. 거기에 학원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전영신: 그러면 80년 5월 18일 그날의 기억 지금 어떻게 남아 계세요? 

▶차명숙: 80년 5월. 그렇죠. 저는 인생을,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이고 꿈 자체가 이제 사라져버리는 그런 5월. 그리고 목표, 어떤 목적이 없어졌죠. 그때 당시에 모든 사람이 아마 버스 안에 있었던 사람이 그 어린 중학생까지 죽어도 우리는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아이들에 대한 그런 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죠 5월을 생각하면. 그 어린 아이들이 어쩔 때는 누님, 몇날 며칠 같이 있었던 사람이에요 학생이었어요 하는데 그 당시 있었던 아이들이 살아있었을 때는 이렇게 만나지만 제가 이렇게 찾아오면 아 살아줘서 고맙구나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 한마디 외에는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5월, 젊은 아이들의, 저에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고.

▷전영신: 그런 날이셨어요.

▶차명숙: 지금까지 살고 있죠 무게를.

▷전영신: 그날 가장 처음 맞닥뜨렸던 이상한 기억, 공포의 순간 어떻게 기억이 되십니까? 

▶차명숙: 18일날 오전에 트럭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는데 빨간 색깔이 바퀴에 흘러져 있을 때 ‘아마 바퀴에 페인트를 누가 부었나 봐 저렇게 빨갛지, 빨갛지?’ 오전이었어요 잠깐. 그래서 저희는 그냥 페인트일 거야 페인트일 거야 했는데 그게 피였던 거죠.

▷전영신: 피가 흘러서 자동차 바퀴를 다 적실 정도로.

▶차명숙: 그래서 그걸 계속 증언을 했는데도 그 증언을, 본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했지만은 확실한 증거가 없었는데 작년에 기록이 있었어요. 그래서 아 사실이었구나 그게 제가 제일 큰 충격이었는데 말을 하여도 진실이 아닌 것처럼 보였던 거죠. 그게 저희가 이제 그게 페인트라고 얘기를 했지만 그게 피였던 거죠.

▷전영신: 그래서 당시에 가두방송.

▶차명숙: 그게 제일 큰 충격이었습니다. 

▷전영신: 예 그러셨어요. 가두방송을 하셨어요 거리방송. 그 당시 계엄군에게 점령되고 정말 삼엄한 상황이었을 텐데 어떻게 거리방송에 나서겠다 좀 이런 대단한 결심이셨을 거 같아요. 엄청난 용기를 내셨어야 되는 거 같은데.

▶차명숙: 저희도 물 떠다주고 주먹밥 갖다 주고 옷 갖다 주고 치약 갖다 주고 막 그렇게 같이 움직였었어요. 딱 보고 있다 한 게 아니고. 같이 움직이고 또한 그랬는데 계속 아시다시피 뭐 방송국이 불에 타고 전화, 신문 그런 게 차단되기 시작하는 거죠, 하루하루하루 지나면서. 그게 18일날 그런 상황을 보면서 자동으로 그런 얘기가 계속 나왔잖아요 18일날 저녁에. 19일날이 딱 되죠. 그래서 방송을 해야 된다라는 어떤 그런 분위기를. 그래서 그냥 생각한 게 모금도 됐고 또 나이가 많은 사람, 언니고 동생이고 뭐 오빠고 모금이 되면서 마이크 지금 말하면 확성기죠. 확성기를 우리가 찾자 어디 있니, 전파사에 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거고 또 여성들이 여자들이 딱 보니까 여자가 하는 게 좋겠다 그래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려진 거고요. 그야말로 광주 시민과 민초와 민중이 한 거죠. 그때 당시에 17일날 계엄 전국 확대가 됐지 않습니까? 계엄 하에서 살기 위한 인간들의 본능, 지켜야 된다는 본능 어떤 그런 게 작용하지 않았나 지금 세월에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전영신: 그렇게 가두방송 하고 하시다가 계엄군에게 끌려가셨어요. 거기에서 겪은 일 이야기를 해 주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차명숙: 그렇죠. 지금 열흘간의 생각이 지금 멈춰버렸는데요. 저는 헌병대라고 생각했는데 보안사 대공분실이었어요. 굉장히 계단이 깊다, 폭이 굉장히 좁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내려갔는데 37년 만에 가봤는데 그 계단을 못 찾았어요. 38년 된 얼마 전에 그 계단을 찾은 거죠.

▷전영신: 아 찾으셨어요? 

▶차명숙: 네 굉장히 가기 싫은 곳이지만 가야겠다. 가서 부딪쳐야겠구나. 그래서 가게 된 거죠. 그러고 저희가 상무대로 옮겨지는데 조그만한 방에 문이 하나도 없었던 기억.

▷전영신: 문이 없고.

▶차명숙: 계속 고문받는 소리, 가끔 이렇게 큰 사무실 넘기면 창문이 아주 작은 창문이 있었다라는 그런 기억. 뭘 먹었는지 없는 기억. 그렇지만 어쨌든 그때는 여자고 남자고 죄를 뭐라고 하면서 총 뒷부분으로 그걸로 그냥 때리죠. 때리면서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냥 잤으면 좋겠구나. 잠이라는 건 죽음을 표현하는 거잖아요. 죽어버리면 죽어버리면 하..모든 게 다 끝나죠, 기억, 생각,  고통. 굉장히 잠을 굉장히 잠을 원했던 거 같습니다. 너무너무 등짝을 때리니까 등이 왼쪽 등이 어깨가 빠지죠. 그 피가 이렇게 계속 맞았던 데 계속 맞고 계속 맞고 하면 찰싹찰싹 피와 살이 닿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무너무 힘들었죠. 우리가 광산경찰서로 가는데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전 회장님인 이애신 총무님이 왜 얘들이 이 모양이냐 그래서 등을 이리 보니 엎드려서 보니 그 등이 잉크색으로 다 물들어져 있더라는 거죠. 그래서 병원으로 다시 옮겨지면서 그 어린애들이 다같이 병원에 옮겨지면서 이래서 애들이 죽기가. 어떤 그 저희도 고문과 계속 맞게 되면요. 그거를 잊어버려요. 너무 아프니까. 때린 데 또 때리고 또 때리면 그냥 하나, 아 그만 멈췄으면 좋겠다라는 생각. 잠을 좀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 아픈 속에서도 그 생각을 했다라는 거는 고통, 그에서 넘어서서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들었다라는 거죠. 말로 어떻게 표현을 하겠습니까.

▷전영신: 그렇죠. 거기에서 그럼 얼마 정도의 기간 동안 갇혀서 고문을 당하셨던 거예요? 

▶차명숙: 저희가 한 보안대에서 한 상무대까지 경찰서에서 6월 4일날 광산경찰서 여성들이 다 이렇게 이동이 되죠. 그 사이에 저희 같은 경우는 간첩이라고 몰리기 시작하죠. 여성 두명하고 남자들은 서너명 몰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이 간첩이라는 자백을 받기 위해서 6월 4일까지 제가 물어봤는데 내가 경찰서에 몇 시에 왔니 그러니까 5월에서 6월 4일날 광산경찰서 들어왔고 제가 기록을 보니까 7월 26일까지 그렇게 조사 과정이었더라고요.

▷전영신: 왜 간첩으로 오인을 받으셨던 거라고 생각하세요? 

▶차명숙: 그러니까는 이제 방송도 할 수 없는데.

▷전영신: 가두방송을 했고.

▶차명숙: 가두방송을 했고 어떤 본인들이 볼 때는 계속 여성, 남자들이 걸어가면서 정보가 실시간 빨리 이렇게 정보가 나오는 거였죠. 지금 제가 생각하면 모든 방송은 정보가 빠른 거 같습니다. 그 정보가 빨리 들어오니까 저희들이 정말 간첩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거는 제 생각일 뿐이고 간첩을 만들어야 해서 만들었던 거 같습니다. 

▷전영신: 그렇죠. 만들어낸 거죠 고문을 통해서. 

▶차명숙: 만들었고 필요했고.

▷전영신: 그 당시에 여성들도 많았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얼마 전에 전남도청에서 안내방송하던 김선옥 씨도 폭행과 고문당하고 성폭행까지 당했던 사실 세상에 알렸습니다. 

▶차명숙: 그렇죠. 본인이 그렇다 하시니까. 

▷전영신: 예 집단 성폭행당한 여고생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승려의 길을 택했다는 증언도 나왔고요. 또 집단 성폭행 얘기도 구술 자료집을 통해서 확인이 됐는데 이런 얘기들 들으시면 어떤 마음 드세요? 

▶차명숙: 80년이면 38년이지 않습니까? 그때 뭐 인권이 있었습니까? 인권이 없었잖아요. 그리고 뭐 어떤 보호도 없었고. 그러한 부분에 제가 어떤 뭐라 할까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어야,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고. 또한 어린 아이가 동생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잔혹행위가 있었다는 거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를 해야 될까요. 모든 일에는 힘이 약한 사람, 힘이 없는 사람이 먼저 희생물이 되는구나. 그래서 그럼 어떻게 될까요? 인권이 우리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가 인권과 모든 거를 바로 민주 목소리를 높여서 모든 게 그렇지 않습니까? 여성들이 항상 가운데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은 모든 역사 속에는 여성들이 항상 가운데 있었죠. 그러나 그 소수의 여성들만 기록이 됐고 수많은 여성들은 그렇게 소리 없이 인권도 유린당하고 잔혹행위에. 물론 생각하지 않고 싶고 그렇게 제 집에서 나오고 싶지 않지만 그런 상황들이 속속히 드러났다면 얼마나 힘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유린을 당했는가라는 걸 짐작이 가슴 아프게 뭐라고 표현할까요? 창자가, 창자가 시리다고 표현을 할까요, 그런 거 같습니다. 

▷전영신: 우리 차명숙 선생님 비롯해서 힘겹게 용기를 내신 이들의 증언 더는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인 듯합니다.

▶차명숙: 그렇죠 그렇죠.

▷전영신: 3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방송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 거 같습니다. 

▶차명숙: 그렇죠. 교도소 안에서도 굉장히 정신이상자, 이상한년 그랬던 기억이 있었어요. 아, 이게 정말 철저하게 여자를 여자들을 그렇게 몰고 가려고 했던 기록, 만들어갔던 기록이 있었고요. 우리가 어차피 지금은요. 제가 용기를 냈던 이유는 마음에서 내려놔야 되고 나와야 되고 끌어내야 되는데 누군가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있었다라는 거죠. 그럼 결론은 자신, 본인 자신이 해야 되는 거였다. 그래서 제가 이 고문의 증거와 확신이 있어서 제가 먼저 입을 연 거죠. 지금이라도 우리 마음을 조금 털고 내려놓고 열어놓고 남은 인생 가야되지 않겠나. 조금이라도 가볍게 인생을 가야 된다라는 그 당사자로서 또한 보이지 않는, 간 동지, 현재 있는 동지들 함께 조금이라도 내려놓자 털어버리자. 올해는 5.18 특별진상규명특별법이 지금 발효된 걸로 알고 있거든요.

▷전영신: 예 9월에 진상규명위원회도 출범을 앞두고 있습니다. 

▶차명숙: 그래서 왜곡이 됐던 기록이든 바로된 기록이든 당사자들은 그 기록을 바로 써달라 바로 기록해달라.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왜곡이 계속되겠지만 또 그러나 되지 않는 우리 눈으로 다시 볼 겁니다. 역사는 우리가 못하면 또 그 후대들에게, 또 그 후대들에게 남겨주는. 그 바람 소원 그거를 강조하는 거고 제 마음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용기를 낸 목적은 거기에 있습니다. 

▷전영신: 예 오늘 이렇게 용기내시고 인터뷰 해 주셔서 너무 감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차명숙: 아유 죄송합니다.

▷전영신: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차명숙: 죄송합니다. 잘 말을 못한 거 같습니다. 

▷전영신: 마음의 상처들이 하루속히 좀 치유가 되시기를 이 과정을 통해서 치유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차명숙: 아유 네 감사합니다.

▷전영신: 네 광주 5.18 민주화운동 주역 중의 한 분이십니다. 차명숙 씨 만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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