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무원이다. 대한민국 공무원이다. 나는 오늘도 위 분들의 연설문을 쓰며 하루해를 다 보냈다. 자기가 폼 잡고 읽을 연설문을 왜 맨 날 남의 손에 맡기며 손가락 하나 까닥 안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지만 입부할 때부터 이렇게 먹고 살아야한다고 선배들에게 배웠다. 눈만 뜨면 국민혈세 탕진하며 싸우는 여의도 정객들 종노릇 보다 더 힘든 게 우리 위전들 비위맞추는 것이다. 뾰족한 결론도 못 내면서 밤새 회의만 해대며 밑의 직원들 빼도 박도 못하게 하는 것도 우리 상사들의 특징이다. 매일 매일 야근을 밥 먹듯이 하지만 대부분 쓸 데 없고 별로 알아주지도 않는, 마치 누구에겐가 ‘우리 안 놀고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라고 보여주고 싶어 안달난 전시성 행정업무들 뿐이다.

흔히 우리를 보고 영혼이 없다고 한다. 왜 국민의 공복(公僕)으로서 창의적이고 능동적으로 일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눈치나 보며 줄서려고 하느냐고 다그친다. 그 입 좀 다물라.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문책당하고 줄초상이 나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지난 10년 세월 어느 언저리에서 잘나간다는 흉내라도 냈던 국장들은 ‘1급 승진의 지옥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단지 지난 정권 요직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흠집이 나올 때까지 터는 이른바 부관참시(剖棺斬屍) 현미경 검증을 뉘라서 당할 수 있겠는가. 누구의 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도 나의 옛 부하들이 나의 허물을 캐러 다닌다. 새롭게 칼자루를 잡은 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보고하기 위해서. 마치 없으면 만들기라도 할 태세로.

우리는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정권의 입맛과 편의대로 마구 부려먹는 것은 좋다. 개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온갖 보여주기식 정책들의 희생양으로 가장 먼저 우리를 이용해도 좋다. 마른걸레 쥐어짜듯이 우리에게 들어가는 푼돈 더 줄여도 좋고, 세상 전체가 못 뜯어 먹어 안달인 우리 연금에 손대도 좋다. 요란스럽게 생색내며 우리들 인원 늘여준 뒤 쏟아지는 욕바가지의 방향을 우리한테만 돌려도 좋고 아예 같이 욕해도 좋다. 그러나 위법이 아니면 우리에게 책임은 지게 하지 말라. 제발 책임지게 하지 말라. 우리는 시키는 대로 일하는 영혼 없는 공무원일 뿐이다.

역대 어느 정권 할 것 없이 우리 부처 공무원들의 최고 상전은 청와대이다. 저 푸른 궁궐에서 일하는 말단 행정관들의 전화 한 통도 우리는 무섭다. 비서관으로 한 번만 갔다 와도 차관으로 복귀하니 저 곳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몇 개나 되겠는가. 대통령의 최측근이 장관으로 내려온 경우는 그나마 숨이라도 좀 쉬겠지만, 나름 의욕과 열정을 갖고 임한 대부분의 일들이 똥칠로 휘둘리다 휴지가 되는 경우가 허다해 청와대의 사전 검열과 구두 허락 없이 선제적으로 일을 벌이기가 무섭다. 권력과 권한은 분명 다를지니, 지난 정부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총리’라 할지라도 청와대 ‘문고리 3인방’ 보다 세다고 할 수 있었을까. 그나마 이 정부에서는 최순실 같은 숨은 ‘듣보잡’은 없길 바란다.

사실 이러려고 공무원이 된 것은 아니었다. 공부를 매개로 얻을 수 있는 모든 찬사가 나의 성장과 함께 했고, 내 부모의 눈망울을 오랫동안 감격에 젖게 한 명문대 졸업을 거쳐 마지막은 ‘고시(高試) 패스’로 눈부시게 회향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 무엇보다 ‘안정적’이라는 실익이 있었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 나는... 어느덧 처참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박봉의 위로가 됐던 자긍심은 권력을 쫓는 사냥개의 헐떡거림으로 폄하됐고, 한 나라의 발전을 선도한다는 사명감은 온갖 핍박과 비아냥 속에 눈치만 남은 늙은 작부의 엉덩이짓이 돼버렸다. 집안에 나라의 녹을 먹는 공무원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며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오늘따라 간절하다. 서구의 어느 나라처럼 과장만 돼도 시도 때도 없이 방송에 나가 당당하게 떠들고 마음대로 홍보할 수 있는 세월이 우리에게도 올 수 있을까. 나는 공무원이다. 대한민국 공무원이다. [문화부장] [2018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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