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호석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이사장

● 출  연 : 고호석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이사장

● 진  행 : 박찬민 BBS 기자

(앵커멘트)그동안 관련 법이 있어도 논의가 지지부진했던 부마항쟁기념재단 설립과 국가기념일 지정 문제가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다뤄졌습니다. 지난 주(4월 27일) 첫 민관 합동 간담회가 있었는데요. 오늘 부산경남라디오 830 시간에는 관련 소식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지금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고호석 부이사장, 전화연결돼 있습니다. 고호석 부이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질문1) 먼저, 부마민주항쟁이 어떤 것인지, 소개부터 해주시죠.

-아시다시피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해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극심한 폭압정치를 계속합니다. 체육관에서 형식적인 간접선거로 뽑힌 대통령은 연임제한도 없이 거의 왕권에 가까운 권력을 휘두르면서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저항하는 일부 재야인사들과 대학생들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혹독한 탄압을 받았지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하나 뿌렸다는 이유만으로 가혹한 고문과 징역 1년 이상을 감수해야 하는 정도였습니다. 요즘 젊은이들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이런 상황이 점차 심화되고 경제상황도 악화되면서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습니다.

1979년엔 결국 매우 기본적인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던 노동자가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진압과정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걸 핑계로 야당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는 어이없는 상황에 이르죠. 이런 일련의 상황에 격분한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10월 16일 대대적 시위를 벌이다 시내로 진출하고, 여기에 동아대생과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도심시위로 발전합니다. 이 시위가 17일엔 더 확산되어 명실공히 시민항쟁이 전개되었고 심야까지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자 박정희 유신정권은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는데, 공수부대가 폭력적 진압을 하는 속에서도 18일까지 시위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18일에 마산에서도 경남대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이에 마산시민들이 호응해서 역시 대규모 도심시위가 벌어집니다. 이 시위도 20일에 마산에 위수령이 내려지고 군대의 가혹한 진압이 가해질 때까지 계속되지요.

계엄령과 위수령 때문에 부산과 마산의 시위는 일단 잦아들었지만 불씨는 그대로 살아있었죠. 이런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10월 26일 그를 살해하면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게 되지요. 그래서 부마민주항쟁이 사실상 유신정권을 종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과 87년 6월항쟁의 출발점이라고 평가됩니다.

질문2) 그렇게 때문에 국가기념일 지정 문제에 대해 부산 지역 시민단체에서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는 상황인 것 같은데요. 지난 4월 27일 민관합동 첫 간담회가 있었는데요. 많은 단체에서 참여를 하셨죠?

-2013년 6월에 제정된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서 만들어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라는 정부기구가 있습니다. 이 기구가 법령에 정해진 제반 활동을 하기 때문에 간담회를 주최했구요, 부산과 창원의 부마항쟁 관련 기념, 계승단체 7개 대표들이 참석했지요.

질문3) 첫 간담회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봐야되는데요. 분위기가 어땠습니까? 

-부마항쟁 후 1989년부터 기념, 계승사업들이 이어져 왔지만 정부기구가 주도해서 관련 단체들이 한 자리에 모인 건 처음이거든요. 부마항쟁 40주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을 잘하기 위한 상견례라고 보면 되겠죠.

질문4) 다음 간담회 일정은 잡으셨어요?

-아직 날짜는 잡지 않았지만 5월 중에 실시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질문5) 상견례 의미도 있었지만, 앞으로 쟁점 사항들이 격렬하게 논의가 됐습니다. 부마항쟁기념재단 설립, 국가지정기념일 지정에 대해서 부산과 마산 지역 입장이 다른 것 같아요?

-부마항쟁의 특이한 성격 때문에 생기는 문젠데요, 대규모 항쟁이 두 지역에서 이틀간의 시차를 두고 연속적으로 일어나긴 했지만 하나의 조직이나 집단이 주도한 게 아니거든요. 그러다보니 두 지역에서 자기 지역을 중심으로 주장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 봐요.

질문6) 그렇죠 현 시점에서는?

-하지만 부산에서 항쟁이 먼저 본격화되었고, 항쟁의 규모나 인구, 구속자 등을 보더라도 부산에 재단을 설립하는 게 자연스럽죠. 다른 입장이 있고요. 또, 기념사업을 위한 재단이기 때문에 그 사업을 잘 할 수 있는 곳에 둬야 하는데, 그런 사업의 경험이나 인프라, 관련 단체의 규모 그 어느 걸 보더라도 당연히 부산에 오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마산은 조금 생각이 다른 듯 합니다. 

질문7) 국가기념일 지정 날짜도 부산과 마산이 생각이 다른 것 같아요?

-그렇죠. 부산은 16일에 시작되었고, 마산은 18일에 시작되었으니까요. 자기 지역 중심으로 이야기하는데요. 어떤 기념일이든 하루 만에 끝난 일이 아닌 경우에는 그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을 기념일로 정합니다.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3.1절도 한 달 이상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지만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주요 거점에서 시위를 시작한 3월 1일을 기념일로 하고 명칭마저 『3.1절』이라고 하잖아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나 6월항쟁도 마찬가지구요. 어차피 두 지역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항쟁을 운동의 목적이나 시기의 유사성 때문에 하나의 사건으로 기념하는 거라면, 첫 발발 일을 기념일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질문8) 그런데 마산 지역은 18일로 해야된다고 계속해서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18일에 시작되었고, 부산과 마산이 동시에 항쟁을 일으킨 것은 18일이니까 그날을 기념일로 하는 건 맞다고 보거든요. 부마법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기록된 부마항쟁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마산 및 창원 등 경남일원에서 유신체제에 대항하여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말한다” 고 되어 있습니다. 즉, 동시에 두 지역에서 일어난 일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거죠. 마산의 입장에서만 보면 그 지역에선 항쟁이 일어나기도 전인 날에 기념식을 하는 게 다소 어색할지 모르지만, 전 국민이 그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한 날인데 너무 그 지역의 입장에서만 협소하게 볼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까 말씀드린 다른 기념일의 경우도 각 지역의 입장에서만 보면 이상할 수 있죠. 3.1절도 중순이나 말에 시작된 곳이 더 많지 않습니까? 6월 항쟁도 대한민국 모든 지역이 시작한 건 아니거든요. 이런 걸 보면 16일을 기념일로 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 생각합니다. 

질문9) 앞으로 양쪽이 많은 논의를 진행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부마항쟁 관련 단체들간 싸우는 모습은 모양세가 안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런 일은 없겠죠?

-편협한 이해관계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면 민주사회에서 의견차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 그런 차이들은 존중돼야죠. 그런 속에서 보다 나은 방안을 찾아가는 게 민주주의의 원리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민주항쟁의 정신을 잘 계승하는 문제는 꼭 관련 단체들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산, 마산의 시민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결정해 나가게 될 겁니다.

질문10) 민주국가에서 의견을 다를 수 있고,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 절차가 공정하고 정당성에 맞다면 지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왕 연결됐으니까요. 부마민주항쟁과 관련해서, 몇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부실 논란이 있었던 진상보고서 채택 문제는 현재 어떤 상황입니까.

-너무 미흡한 부분이 많아서 6개월 기간을 더 연장해서 대폭 수정하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집필진도 일부 교체됐구요. 보다 폭넓은 자료들을 반영하고,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더 많이 담긴 보고서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질문11) 언제쯤 예상하십니까? 최종보고서 채택은?

-시한이 10월까지기 때문에 10월까지는 나와야 됩니다.

질문12) 시점에 정해져 있기 때문에 위원분들 일정이 빡빡하시겠어요?

-앞에 너무 허송세월을 했습니다. 3년이나 있었는데, 너무 허술하게 했습니다. 

질문13) 관련자 명예회복이나 보상 문제는 차후에 논의되는 겁니까.

-이 문제가 참 어렵습니다. 부마항쟁은 다른 민주항쟁들과는 달리 조기에 계엄령과 위수령이 각각 내려지면서 가혹하게 진압했고, 일단 잠복한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전에 유신정권의 수괴인 박정희가 사망했기 때문에 항쟁기간이 매우 짧은 게 특징입니다. 그런데 부마항쟁법은 이런 특징을 감안하지 않고 구금기간이 30일 이상인 사람만 보상대상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검거된 시위자 수가 최소 1584명 이상인데도 진상규명 신청을 한 분이 2백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복잡한 절차를 거쳐 관련자로 인정되어도 아무런 실익이 없으니까요. 관련자로 인정된 분 153명 중 다수가 관련자증서 하나 달랑 받은 걸로 끝이고, 보상을 받은 이는 몇십 명 정돕니다. 이러니 항쟁의 진상을 밝히는 데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40년이나 지난 일이니 기록이나 문서도 없어진 것이 태반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최인호 의원 등이 시민사회의 요구를 담아 개정법률안을 발의했지만 아직 상정조차 되지 않은 상탭니다. 이 개정안에는 10일 이상 구금된 이들은 보상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으나 국회가 제 기능을 못하니 본회의 통과 여부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진상조사기간도 더 연장할 수 있고 조사권도 더 강화되어 보다 충실한 보고서를 쓸 수도 있습니다.

질문14) 상정도 못된 이유가 있습니까?

-국회가 당리당략에 메여서 의원들 체포동의서 이런 게 나와 있습니까요. 정쟁을 벌이느라고 관심을 안 보이는 겁니다. 

질문15) 오늘 많은 말씀을 주셨는데요. 끝으로 우리 청취자들을 위해서 정리의 말, 한말씀 더 부탁드립니다.

다 아시겠지만, 민주항쟁을 기념한다는 것은 그 사건을 과거 속에 박제화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항쟁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는 데 그 근본 의의가 있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되려면 일을 추진해 나가는 조직이나 사람들도 잘 해야겠지만 무엇보다 일반 시민들의 관심이 중요합니다. 언론의 역할도 정말 중요하지요. 방금 말씀드린 여러 일들이 조만간 본격적으로 가시화될 텐데,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 많은 분들이 함께 관심 갖고 참여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래야 일을 추진해가는 사람들도 더 조심하고 더 기운 내면서 잘할 수 있겠지요?

(앵커멘트)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지금까지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고호석 부이사장과 말씀, 나눠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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