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세를 일기로 작고한 ‘후농’ 김상현 전 의원은 대한민국 민주화와 현대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 DJ의 참여를 설득하면서 그가 정치지도자 반열에 오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 민주세력 활성화를 위해 YS와 연대하면서 1984년 8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주도하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정치인으로서 진정 진가를 인정받는 부분은 독보적 거물 YS와 DJ 앞에서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할때도 당당히 맞서온 점입니다.

1987년 대선 당시 YS와 DJ간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다가 DJ가 이를 거부하며 평민당을 만들어 분당하자 대의에 어긋난다며 결별했고, 결국 이듬해 총선 낙선이란 쓰라림을 감수했습니다.

이어 1990년에는 '3당 합당' 거부하면서 YS와 대치하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소신파 정치인과 함께 독자노선을 걸었습니다.

고 김상현 전 의원은 60년 넘는 정치 역정을 주로 험난한 야권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렇지만 상생과 포용의 정신으로 파벌의 경계를 넘고자 한결같이 노력했고, 6차례 국회의원을 하면서 조금도 가산을 늘리지 않은 ‘따뜻하면서도 깨끗한’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또 이수성 전 서울대 교수, 가수 조영남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마당발'로 통할만큼 정치권을 넘어 폭넓은 인맥을 쌓았습니다.

2000년 16대 총선때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총선연대가 낙천,낙선 인물 102명에 후농을 포함시켰을 때는 ‘당대의 석학’ 리영희 교수가 총선연대 사무실을 찾아 시민단체 인사들을 질책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고 김상현 전 의원의 자녀 가운데는 셋째 아들인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의원이 정치인의 길을 걷고 있는데, 당 안팎에서 비교적 좋은 평판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부친의 정치적 후광을 등에 업고 손쉽게 금배지를 단 다른 ‘2세 정치인’과 달리 서울 서대문구에서 네 번의 도전 끝에 국회에 입성했고, 계파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실력과 노력으로 두각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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