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상스님은 군승으로서 군포교에 진력해 오시면서 인터넷 카페 ‘목탁소리’와 방송 등을 통해서 오랫동안 불자들과 소통해 오고 계십니다. 그동안 ‘금강경과 마음공부’, ‘불교경전과 마음공부’를 펴내시고 최근에 ‘선어록과 마음공부’, ‘육조단경과 마음공부’를 잇따라 펴내셨는데, 이런 책들의 공통점을 보면 부처님 말씀인 경전 내지 선지식들의 언행인 선어록과 마음공부를 연결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책을 내시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제가 봤을 때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전이고, 또 선사 스님들의 어록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 경전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핵심을 오랜 시간 이어오면서 좀 다소는 왜곡도 되고 또 변화되면서 오히려 가장 중요한 핵심의 알맹이를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저는 신도님들께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제 이야기라고 하면 안 믿으실 것 같아서 경전과 어록을 통해서 전해드려야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한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2. 그 가운데서도 경전이 아니지만 경이라 이름 붙여질 정도로 선수행에 표준적인 나침반으로서 중시되는 육조단경을 마음공부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육조단경을 공부하는데 좋은 안내서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런데 스님은 책 서두에서 오늘의 한국불교를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가 <육조단경>에 오롯이 담겨 있는데도 보통 육조스님의 가르침을 도외시함으로써 방편과 본질이 뒤바뀌는 전도몽상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어떤 말씀이신지요?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유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달의 비유인데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이유는 달을 보라는 것인데 오랫동안 인류 역사가 이어오면서 불교 역사가 이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찌 생각한다면 달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워낙 많다 보니까 그 사람들은 달을 보지 못했으니까 남아 있는 것은 손가락 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다보니까 손가락만 가지고 계속해서 수많은 방편들을 만들어 내고 본질은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다 보니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방편이다 보니까 사람들은 다 방편만에 매여 있고 그것이 너무 오랫동안 이어오다 보니까 방편만을 본질인 것으로 착각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육조단경을 제가 옛날에도 봤지만 다시 보면서 느낀 점이 “아, 이것이구나! 내가 오랫동안 그렇게 찾아보고 찾아 다녔던 것이 사실 이렇게 우리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경전이었고 어록이었던 금강경이며 육조단경이며 이런 가장 기본적인 경전.어록에 그 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눈을 뜨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구나!” 이런 느낌을 좀 받았습니다.

3. 우리 불교가 출발점이 자기이다보니까 너무 거기에 매이고 결국 최종 목표를 주목하지 못하게 된 것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p82에 보면 수행자는 은둔자가 아니라 자기 변혁을 통해 사회 뿐 아니라 온 우주 전체를 일시에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이 세상을 정토로 바꾸는 진정한 사회운동인 것이라고 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선이 본래의 자유자재한 분위기를 잃고 뭔가 권위주의적이고 딱딱한 분위기를 주고 있다는 지적에 대한 답과 더불어 보충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어찌 보면 다른 종교는 사회활동을 많이 하는데 불교는 사회활동이 좀 적지 않느냐, 그리고 산중불교에만 있지 않느냐, 자기수행만 치중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사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는 세간의 범주, 세속의 범주 속에서, 불교로 말하면 다른 모든 가르침은 꿈 속에서 꿈의 이야기, 꿈의 스토리를 좋게 바꾸는 겁니다. 보다 좋은 꿈으로 바꾸는 삶으로 사는 것. 그런데 불교는 꿈 자체에서 깨어나는 것을 이야기하는 출세간의 가르침이다 보니까 사실 꿈을 깨고 나면 꿈 속에 있었던 모든 대상들, 사람들, 이야기들은 전부다 한바탕 완전 다 깨어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 한 수행자가 깨어난다는 것은 개인의 공부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너와 내가 둘이 아닌 불이법으로서의 인류 전체가 함께 깨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진정한 대사회운동은 마음공부고, 선이고, 불교공부라는 것이지요.

4. p87~88에 보면, 육조단경은 그 어떤 수행법도 내세우지 않는다.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서도 좌선이 최고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육조단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직지인심이야말로 조사선의 수행 아닌 수행이다” 라고 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육조단경의 주인공 혜능스님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해서 무엇보다 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도 설명을 주셨지만 견성이 공부의 끝이다, 그렇지 않다 하는 논란이 있는데, ‘견성’이라는 것과 ‘수행 아닌 수행’이라는 것을 연결시켜서 우리가 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또 현실 속에서 실천해야 할지요.

방금 전의 질문과 이어질 수 있는데요,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 혹은 성불,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신비주의적인 뭔가, 달나라에 있는 뭔가를, 남들에게는 없는 뭔가를 새로 만들고 깨달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간단한 것이 사실 불교이고 견성이라고 보는데요, 초기불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코끼리의 발자국이 모든 짐승의 발자국을 포섭하는 것처럼 사성제가 모든 불교 가르침을 포섭한다는 말이 있는데요, 말 그대로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 그게 불교의 전부입니다. 견성이라는 것은 견성이라는 무언가가 별도로 있거나 내가 내 자성이나 불성이라는 뭔가 없던 것을 만들어 내거나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을 소멸한 그 자리를 견성이라 하고, 또 그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것도 이제 수행 아닌 수행을 얘기했는데,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것도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함이 없이 한다는 말처럼 머문바 없이 행해야 한다는 말처럼 번뇌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번뇌는 번뇌대로 일어나지만 그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그래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분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면서 분별 없는 자리, 그 자리를 견성이라고 한다고 보구요, 

5. p229에 보면 육조혜능과 영가현각의 대화를 해설하면서 이 공부는 분별하지 않은 공부가 아니라 분별하되 분별이 없는 공부라고 했는데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쉽게 말하면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예 이거다 저거다 라는 판단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건 목석과 같은 것인데요) 그렇다면 부처님은 배가 고파도 밥도 안먹고 어디를 가야 하는데 가지도 못하고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분별은 분별대로 다 일어나지만 거기에 과도하게 끌려가지 않고 그 분별이 진짜라고 사로 잡혀서 집착하지 않고 그 분별은 인연따라 잠깐 생겼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인연을 충분히 써먹을지언정 거기에 끌려가지 않고 휘둘리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6. 그래서 p254쪽을 보면 걸릴 것이 없고 근심걱정이 없고 삶 자체가 하나의 놀이가 되는 ‘유희삼매’가 가능하다고 하고 계신가 봅니다. 다시한번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유희삼매라는 말은 삶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 심각하게 여기고 너무 내가 추구하는 바에 대해서 과도하게 집착하고 욕망하면서 엄청난 중요도에 빠져서 너무 심각해하며 사는데,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인연 따라 잠시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실은 그 어디에도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과도하게 심각해 할 필요 없이 삶을 하나의 놀이처럼 하나의 유희처럼 즐거운 놀이를 가지고 놀듯이 삶을 가벼운 마음으로 가지고 놀아도 좋다, 그렇게 된다면 과도한 집착이 없지만 집착이 없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집착 없는 가운데 무엇이든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게 진정한 무위법이고 그것이 유희삼매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7. pp282~283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5온,12처,18계는 마치 바다의 파도와 같이 실체가 없고 자성이라는 바다 위에서 잠깐 일어나는 파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온,12처,18계는 무아라고 하는 것은 초기불교부터 이어져온 가르침 아닌가요? 그렇다면 이걸 무아라고 표현할 때와 자성이라고 표현할 때 다소 혼동을 줄 우려가 있지 않을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초기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하고 선불교에서는 자성, 본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육조단경도 그렇고 선불교 선어록들을 살펴보면 끊임없이 무아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자성을 얘기하지만 그걸 금강경 식의 표현을 한다면 자성은 자성이 아니라 이름이 자성이라는 얘기를 선어록에서는 끊임없이 하고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선어록을 읽다보면 자성에 대한 얘기보다 자성은 원래 공하다는 이야기, 그런 취지의 이야기다 더 많이 등장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거든요? 즉 자성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적인 뭔가가 아니라 그것 자체를 실체화시킨다면 전혀 자성과는 상관 없는 것이죠. 아까 말한 것처럼 괴로움이 없는 사람은 마치 병이 없는 사람과도 같아서 병 없는 사람이 내가 병 없다는 것을 너무 신나해 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병이 있는 사람은 병이 나은 상태가 너무나도 부러운 것처럼, 괴로움이 있는 사람이 괴로움이 없는 것으로 바뀐다고 했을 때 괴로움이 없어진다고 해서 막 너무나 신나는 새로운 뭔가를 잡는 것이 아니라 ‘평상심시도’ 라고 했듯이 그저 아무 일 없어지는, 아무 일 없는, 그런 것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자성이라는 말과 무아라는 말은 달리 쓰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8. p102 관련 질문을 드리면, 육조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불법은 세간에 있으니 세간을 떠나지 않아야 깨달을 수 있다.” 고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보통 사람들은 불교는 저 산에만 있거나 고요한 곳에만 있거나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불법이 아닌 것을 도대체 하나라도 가져와보라 하는 선사 스님들의 말씀처럼 불법은 불법이라고 이름 했을 뿐이지 그것이 진짜 불법이라는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닌데, 지금 이대로의 자신의 삶, 자신의 존재, 이대로 드러난 5온.12처.18계, 그 가운데 사실은 진리도 있고 그 속에 색즉시공이라는 말처럼 세간이고 출세간이고 출세간이고 세간인 지금 이 자리에서 언제나 드러나 있고 언제나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자리의 일이지 그것을 별도로 저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저 멀리 어디 따로 있다고 생각하거나 깨달음이 지금의 나가 아닌 또 다른 어떤 새로운 어떤 신비주의적인 뭔가 일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우리들의 망상이고 우리들이 가지고 견고한 틀이었다는 것이지요.  

9. 요즘 젊은이들이 스스로 인생에 낙오자다, 루저다 이렇게 단정하고 절망해서 삶을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육조단경과 마음공부를 통해서 어떻게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요?

저는 젊은 친구들한테 지금 가지고 있는 괴로움에 대해서 본인들은 내 인생은 괴롭다, 내 인생에 자꾸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뭔가 잘못된 일들이 벌어진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현 상황을 그렇게 해석하고 그렇게 문제라고 생각하고 문제라고 분별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얘기해 줍니다. 무승자박(無繩自縛)이라고 하듯이 스스로 만들어 냈기 때문에 생긴 괴로움일 뿐이기 때문에 잠시 분별심을 내려놓고 지금 있는 이대로의 삶, 나에게 주어진 이대로의 삶에 대해서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허용해 준채로 좋다거나 나쁘다 라고 분별해서 좋은 것은 집착하고 싫은 것은 버리는 그런 삶 대신 지금 있는 이대로의 나라는 존재, 그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해 줘 보라는 것이지요. 나라는 존재, 삶이라는 이 전체가 긍정.부정 나눠놓고 긍정이 아니라 말 그대로 대긍정으로 수용돼버리게 되면 삶에 대한 두려움이나 괴로움, 이런 것들이 많이 사라지고 뭐랄까 완전히 나라는 내면에 턱 내맡기게 되는 자유로운 이런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병 불자들과 매주 법회에서 현실적인 괴로움들을 가지고 부처님 가르침을 이야기해 주는데 거의 한 명도 졸지 않고 아주 집중력 있게 참여합니다. 그래서 저도 굉장히 놀랍고, 지금 장병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문제, 결혼에 대한 문제 등 이런 것들을 풀고자 하는 어떤 갈증이 참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0. 군법당인 국방부 호국원광사에서 군불자는 물론 일반 불자까지 더불어서 불교를 알기 쉽게 전해주고 계신데요, 앞으로 계획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으로서는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고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인연 따라 열심히 사는 일입니다. 육조단경과 선어록을 가지고 매주 두 번씩 함께 공부를 하고 있는데 올 한해 동안 공부해 나갈 예정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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