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허스님은 한국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라 일컬어지는 대선지식입니다. 생애 전반을 관통하는 송경허, 그러나 마지막에 글방 선생 박란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후반부 생애가 있는데요, 우선 스님으로서의 경허는 어떤 분이셨나요?

  경허스님은 말 그대로 선지식의 표준을 밟으신 스님입니다. 1849년 전주 우동리에서 태어나셨지만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이 갑자기 파산되는 바람에 지금의 의왕시 청계사로 9살의 어린나이에 동진출가를 하게 됩니다. 거기서 6년 동안 물 긷고 밥 짓고 하시다 14세 때 박 처사라는 분께 공부를 배우게 됩니다. 박 처사는 절을 떠나면서 계허스님에게 경허의 큰 그릇을 알리고 크게 키울 것을 부탁했고, 또 계허스님은 환속을 하면서 당시 유명하던 동학사 만화 강백에게 인계해 경허선사는 새로운 인생을 맞게 됩니다. 경허선사는 동학사에 오시자마자 1862년부터 1871년까지 9년 간 정식의 강원 과정을 밟았는데, 너무 영특하시고 명성이 많이 알려져 23세의 나이에 바로 강백에 올라 대강백으로 8년 동안 전국에서 몰려드는 스님들에게 강의를 하십니다.
  그러다가 1879년 마침 스승인 계허스님을 뵙고자 상경하던 중 천안 인근에서 호열자(지금의 콜레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데, 경허스님의 운명 같은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불교 강의를 그렇게 많이 하고도 정작 죽음 앞에서는 무너지는 자신을 발견한 하고는 그날 밤으로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을 폐하고 사교입선, 교를 버리고 선을 택하게 됩니다. 참선만이 생사를 해찰하는 길이라고 여겨 스스로 조실방을 걸어 잠그고 용맹정진을 합니다. 100일 정진 마지막에는 식음까지 전폐하고 칼을 목에 대고 송곳을 대면서 극단의 수행을 하셨는데, 마침 원규 사미라고 경허스님을 시봉하던 어린 상좌가 ‘우무비공처(牛無鼻孔處: 고삐 뚫을 구멍 없는 소)‘가 뭐냐고 질문하는데서 활연대오 합니다. 1879년 음력 11월 15일입니다. 밝게 비치는 보름달 아래서 너무나 기쁜 나머지 맨발로 나와서 춤을 추셨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경허스님은 일없는 사람(無事人)이 되어 그 이듬해인 1880년 천장암에 가서 5년간의 보임을 하세요. 그리고 1885년 자신이 쓰시던 주장자, 탈바가지, 옷, 다 태우시고 정말로 저자거리로 내려오셔서 자연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게 됩니다. 천장암에서 오도가를 발표하시면서 자신이 불조 75조임을 연원을 밝힌 뒤 20여 년 간을 호서를 떠돌다가 1898년 부석사 목룡장이라고 어린 용을 키운다는 곳인데, 거기서 만공, 수월, 침운, 해봉 등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1898년 5월 범어사 주지 오성월 스님이 한 눈에 알아보고 경허선사를 범어사 선원의 조실로 추대하는데요, 경허선사가 새롭게 선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지요. 1898년 범어사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1904년까지 영,호남을 넘나들며 가는 데마다 무려 180개라는 크고 작은 선원을 개설하고 후학을 지도합니다. 그리고 1904년 2월 11일 천장암(인법당)에서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써주시고 남쪽 불교를 부탁하시고 그 다음에 북쪽으로 떠나시게 되지요.

2. 주로 스님의 행장을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전기(前期)의 경허스님, 즉 극한적인 자기극복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 스님의 발자취가 과연 어떤 분이셨나요?

  경허스님의 인간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요. <경허집>에는 주로 선시와 법어가 남아 있는데, 다행스럽게 1938년 김태흡 스님이라는 분이 <인간 경허 평전>이라는 것을 불교 <비판> 잡지(1938년)에 3개월간 연재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요.
  그리고 경허선사가 북쪽으로 가신 데에는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발표했지만 전봉준 장군과 경허선사는 처남매부 간입니다. 전봉준 장군이 경허선사 부친인 송두옥의 딸 전옥련과 결혼을 했으니까요. 전봉준 장군이 처형된 곳이 조계사에서 바로 가까운 곳 종각 근처입니다. 전봉준 장군이 처형되자마자 누가 포대자루를 들고 9척 장신이 와서 메고 갔다고 하는데 그게 경허선사가 아닌가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라 드러낼 수도 없었고 항상 그런 위태로운 상황에서 지켜봐야 했던 불운했던 선지식입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밝혀지면 삼족이 다 처형을 당해요. 선사의 5촌 되는 송희옥이라는 분이 전봉준 장군의 비서실장이었는데, 전주에서 가까운 고산이라는 곳에 있다가 민병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참 인간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던 거죠.
  결국 북쪽으로 가셔서 생을 마감하는데, 맨 마지막에 선사가 남긴 시가 그런 걸 보여줘요. 만공스님, 철우스님(수월스님 제자), 운봉스님(혜월스님 제자)이 가보니까 박란주지묘라고 해서 동네사람들이 내놓지를 않아서 관가에 가서 “이건 경허선사다” 해서 봉분을 풀어보니까 그 안에 주머니에서 시가 나온 겁니다. “삼수갑산 깊은 골에, 중도 속인도 아닌 송경허라. 세상 떠나는 소식을 인편에 전할 길 없어, 흰구름에 부치노라” 라는 시요. 자기가 송경허라는 것을 거기에 밝힌 것이지요. 시가 마지막 호주머니에서 나왔기 때문에 증명된 거지요.

3. “인간 경허”의 삶에 대한 논란이 많고 여기에는 계율 등 부정적인 인식까지 겹쳐 있는 점을 많이 안타까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홍 소장님이 보는 “인간 경허”는 어떤 분인가요?

  경허스님은 인정도 많으시고 상대를 존중해 주는, 예를들어 송광사 진진응 강백이 경허스님을 탓을 하거든요, 스님은 왜 술을 드시냐... “아 자네 말이 옳다. 그런데 나는 공성(空性)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어서 죽기 전에 내가 그걸 할 수 있어서 그래도 나름대로 편해서 하고 있다.” 그래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면 반박하지 않는 그런 따듯함. 그리고 또 북한시를 들여다보면 자기를 위해 무엇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또 자기가 아프니까 채약상 조씨라는 분이 갖다주면 눈물을 흘리며 받아주는 그런 따스한 면이 계신 그런 분이었구요. 또 아시겠지만 경허선사가 살인 누명을 쓰시잖아요. 그랬을 때 결코 발설을 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 사람이 걸릴까봐요. 그게 영주 사미가 죽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죽인 사람은 김도영이라는 사람인데, 갑사 안에서 부목을 하던 사람이라 서로 아는 사이에요. 나중에 만공스님이 해인사를 쫓아가서 “스님 정말 하셨으면 나한테는 말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이걸 처리할 수 있지요.” 하는데도 “그래 내가 죽였다. 그런데 너랑 나만 알자.” 해서 만공스님이 알겠습니다 그랬는데, 그게 3년 후에 사실이 밝혀져서 만공스님이 땅을 치고 통곡을 하시고...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서는 가장 자애로우시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러한 따스함을 간직한 분이셨습니다.

4. “경허성우 중도불이 선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하셨는데, 어떤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나요? 양이 아주 방대해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부분이 아쉬워 삭제되지 않은 원래의 초록을 그대로 책으로 내셨는데요.

  박사논문을 쓸 당시도 그랬지만 그 이전부터 경허선사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제가 전부 아울러서 일일이 연구해서 쓰다 보니 양이 많아졌습니다. 또 경허선사는 다른 사람이 표현할 수 없는 내용들을 남겨 놓으셨는데, 중국의 선사들이 쓴 것과 너무 달라요. 말하자면 우리 순 토종식으로 썼고 그 내용들이 누가 감히 쓸 수 없는 그런 내용들을 썼기 때문에 일반 범인이 그걸 가타부타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그런 생각으로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하다보니 1,350 페이지나 되고 그러다 보니 삭제가 되었지요. 그런데 제가 볼 때 잘리지 말아야 할 부분, 예컨대 경허선사의 중요한 심우사상이나 오도가(경허선사의 오도가는 540여자로 장문임)가 잘려나가고, 그리고 경허선사가 북쪽으로 간 이유가 입전수수인데, 마지막 회향을 북한에 가서 하게 되는데요, 그런 부분을 잘라야 한다 해서 통째로 잘려 나가니 나중에 회향이 안되는 겁니다. 예를들면 오도가는 절대로 자르면 안되고 통째로 해야 그 의미가 있습니다. 심우도가 제가 생각하기로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5. 경허스님은 총 266편의 시를 남기고 있습니다. 홍 소장님은 <경허 선시 감상>에서 한문시와 한글 번역을 싣고 <경허 선시 연구>에서는 해설까지 붙였습니다. 경허스님 선시의 특징은 뭔가요?

  선시 강의를 지지난해 충정사에서 시작했고 회향은 지난해 7월 봉은사에서 하게 됐고 지금은 <경허집> 법어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경허집 속에는 법문과 선시가 나눠져 있습니다. 법문은 양이 많아 기간이 많이 걸릴 것 같고요, 시는 1년으로 53강을 해서 끝을 냈습니다. 경허스님의 시는 남녘시와 북녘시가 많은 차이가 있어요. 남쪽에 있는 시는 중도불이 사상에 많은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것 같지만 그 한 줄에 꼭 중도불이 사상을 집어 넣습니다. 또 경허선사가 어떤 걸 말하고자 하는가 하는 내용들이 일관돼서 한 맥으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살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북녘시는 그와 조금 달라요. 선비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 분들에게 시를 써주곤 했는데, 그 속에는 반드시 중도를 나타내는 선사만의 특유함이 들어 있습니다. 당신의 커다란 사명감을 가지고 쓰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경허선사의 선시는 흐르는 맥락이 그냥 중도불이를 한없이 한없이 드러내는 내용들로 꽉 차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필체도 보면 누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일반인들도 놀랄만큼 굉장히 정돈돼 있고 정자이면서 아주 날카로와요. 정확함이 들어있는 그런 필체입니다.

6. 경허스님 선양 사업을 펼치는데 있어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경허선사가 원래 거목이시고 우리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이시다 보니까 흠모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선양 사업을 2015년 11월 29일 시작했는데요, 제가 재가자이고 여성이다 보니까 주위에서 스님들의 불편한 눈빛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경허선사가 열반하신지 100여 년이 넘다 보니까 재조명 작업에 대해 간절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간절한 바람은 종단 차원에서 경허선사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중흥조로서 자리를 매김 할 수 있는 작업이 꼭 이뤄졌으면 하는 겁니다. 수덕사에서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들 하고 또 수덕사에서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겠지만 사실 경허선사는 수덕사뿐 아니라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 대승사, 청계사 등에도 계셨고 김천 수도암에도 오래 계셨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경허선사 후손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어느 문중, 어느 개인의 일보다는 종단 차원에서 경허선사의 위상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7.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요?

  첫째는 천장암 성역화 사업입니다. 여러 번 가봤지만 굉장히 허술하게 돼 있습니다. 경허선사가 직접 수행하시던 원성문이라는 한 평짜리 방이 있고 바로 옆방은 한 평보다는 조금 크지만 거기에는 만공, 수월, 혜월 스님하고 함께 기거하던 방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방 바로 딸린 곳에는 수월스님이 방광하신 아궁이도 있고 그 위쪽으로 혜월스님이 오도하신 혜월굴도 남아 있어요. 또 만공스님을 어린 제자를 데리고 가서 좌선하시던 제비바위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살아 있습니다. 경허스님이 쓴 염궁문(念弓門)-마음을 쏘는 문이라는 뜻-이란 글씨도 있고요. 경허선사의 뜻을 받들자 해서 경허선사가 쓴 염궁문 글씨를 가지고 지난해 염궁선원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그게 불에 타 소실됐어요. 얼마나 가슴이 저렸는지요... 그렇게 많은 역사가 살아 있는 천장암이 보안이 전혀 안되어 있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전봉준 장군과의 관계를 밝히는 일입니다. 지금 경허선사의 외손이 살아 있어요. 경허선사가 가장 남쪽에서 가슴을 졸였던 곳이 진안 금당사 고금당이라는 곳입니다. 금당사는 아래에 있고 고금당은 그보다 위쪽에 있습니다. 거기서 전봉준과의 관계 때문에 시를 썼는데 시에서 묘사한 내용들이 그대로 살아있어요. 제가 가보니까 나옹화상이 수행하시던 곳이기도 하더군요.

8. 경허 스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오늘날 청년들, 어르신들 힘들지 않은 분들이 없을텐데, 국민들에게 무슨 말씀을 해주실까요?

  말 그대로 우리는 한 생을 잘 살던 잘 못 살던 어떻게 살던 수행을 해서 이 고통을 벗어나는, 이고득락 하고자 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경허선사께서는 만약에 하신다면 어떤 상황에 닥쳐도 중도불이의 상태에서 내가 마음의 불편함을 일으키지 않는, 아마 분별심을 여읜 중도 수행을 하라고 일러주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끝)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