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두 딸을 둔 아빠로서 요즘 걱정거리가 하나 늘었습니다.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 열풍 때문입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여성들의 용기있는 고백을 응원하지만, 19금(禁) 공연을 보는 듯한 노골적인 폭로와 기사, 댓글에 마음이 착잡합니다. 피해 고발이 문화계를 넘어 ‘주종 관계’와 ‘불공정 계약’으로 가득차 있다는 연예계까지 번지니 이게 어느 수준까지 까발려질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딸 바보’라고 불렸던 배우 조민기, 조재현씨의 충격적인 민낯까지 드러났으니 오죽할까요. 신세대 딸과 함께 출연해 한없이 자상한 모습을 보였던 조민기,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부성애로 흐뭇함을 준 조재현의 몇년 전 예능 프로를 우리 아이들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녁식사 도중 큰 아이가 “아빠도 혹시?...”라며 장난스런 말을 씩 웃으며 던질 때 농담으로 되받기 힘들었습니다. 세상의 ‘갑질’과 ‘차별’을 머지않아 본격적으로 겪어야할 딸 아이가 미소짓는 아빠 얼굴에서 거짓과 위선을 찾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견실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60대 여성 CEO 한 분과 며칠 전 저녁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그녀는 여성이 희귀한 이공계 관련 대학,업계에서 가부장적 성 차별을 이겨내고 연구 성과와 기업 성취를 일궈낸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편한 대화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식사 도중 ‘미투’에 해당하는 자신의 감춰둔 사연을 일부 털어놨습니다. 잘생긴 외모가 여전히 빛나는 그녀에게 대학 캠퍼스에서, 초년의 취업 현장에서 소위 ‘들이대는’ 남자가 셀 수 없었음은 예상대로 였습니다. 저녁 회식만 끝나면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추근대는 상사, 바래다주겠다며 엉뚱한 곳으로 차를 몬 동료 등이 만들어낸 갖은 성폭력의 순간에서 그녀는 ‘목숨 건 대항’만이 해결책이었다고 했습니다. 상대의 뺨을 후려치거나, 정강이를 걷어차며 고함을 질러야 돌아오는 보복이 없었다는 30여년 전의 아픈 기억을 꺼내놓고 그가 덧붙인 한마디가 오히려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정말 여직원은 뽑고 싶지 않습니다”. “특정 기업이 미투 캠페인 속에서 언급되면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미투 캠페인은 당분간 여성 고용에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묵혀온 고통을 힙겹게 세상에 털어내는 ‘작지만 혁명적인’ 시도가 뿌리깊은 남성 위주의 사회 구조를 바꾸기 앞서 여성의 사회적 고용 감소를 감수해야만 한다니..., 두 딸이 앞으로 가질 일자리로까지 생각이 미치는 지나친 걱정마저 하게 됐습니다.

   ‘글쓰는 판사’로 유명한 문유석 서울 동부지법 부장판사가 최근 SNS에 올린 ‘이따위 세상에 나아가야 할 딸들 보며 가슴이 무너져’란 제목의 글에 많이 공감했습니다. 그는 “이런 짓을 저지르는 가해자들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다. 그들은 아무리 만취해도 자기 상급자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며 “이들은 절대 반성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미투 운동에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치지 말고, 내 앞에서 벌어졌을 때 절대로 방관하지 않고 나부터 먼저 나서서 막겠다는 미 퍼스트(Me-first)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썼습니다. 성폭력이 남성과 여성 간 문제가 아닌 수직적 상하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간의 폭력’이란 사실을 정확히 짚으면서, 더 나아가 가해자들의 속성과 대처 방식도 제시한 것입니다. ‘자기 상급자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이들일수록 왕따, 차별, 성희롱 같은 유형의 하급자 폭력에 둔감하다는 것,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는 조직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침묵을 가장한 조력자 또는 방관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폭력은 침묵 속에 전염된다’는 아일랜드 작가 프렌 펀리의 책 제목 처럼 결국 권력형 성폭력을 막는 것은 차별적 사회문화, 권위적 조직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만 할 것입니다. 딸 아이 둘이 주역이 될 세상에서 돌아볼 10년 전 즈음의 ‘미투 광풍’이 사회 변화에 큰 역할을 한 흐뭇한 역사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이현구 정치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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