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모룡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 출연 : 구모룡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 진행 : 박찬민 BBS 기자

(앵커멘트)다음은 주간섹션 순서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 지역' 이야기 시간입니다. 올해부터 새롭게 마련한 시간인데요. 지역을 더 알아보자는 취지로 한국해양대학교 구모룡 교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수고해 주실텐데요. 전화연결하겠습니다.구모룡 교수님 안녕하세요?

구모룡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질문1) 지난 주에 부산이라는 근대도시의 태동과 관련한 부산학적 쟁점을 살폈습니다. 왜관이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되고 이로써 식민도시 부산이 형성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면 다음의 쟁점은 어떤 내용이 있을까요?

-'왜관'에 주목한 분들은 부산이 처음부터 교역의 도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갖습니다. 또한 식민도시 이전의 상호 호혜적인 교류를 회복하자는 미래지향적인 염원도 있고요. 물론 왜관과 함께 기존의 청관의 존재도 놓칠 수 없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면서 왜관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만 곧 이어 일본은 러시아와도 각축하였습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부산은 완전한 일본의 식민도시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부산은 “제국의 통로”였는데 이 점 또한 오늘의 시각에서 되새겨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부산이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을 잇는 네트워크의 결절지라는 측면입니다. 교역과 교류의 도시가 부산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겠지요.

질문2) 일제가 만들고 일본인들을 유입시킨 식민의 도시 부산이라 하더라도 객관적인 사실로 우리가 아프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일제는 부산을 어떻게 확장하였습니까?

-부산이라는 도시공간의 형성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는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공간에 누적된 기억과 유산을 헤아려 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오늘날 원도심이라고 하는 공간을 중심으로 근대 도시를 형성하고 이를 확장하였습니다. 매립과 매축을 통하여 통항 거점을 남항에서 북항으로 이동시킵니다.

철도를 부설하고 연락선을 띄워 일본과 조선을 연결하지요. 또한 송도와 영도 그리고 온천장을 휴양지로 만듭니다. 배후에 공업지대도 계획하고 배치하고요. 1960년대를 목표로 도시계획을 수립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중구, 영도구, 동구, 서구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도시형성에 관한 역사는 이 분야 전문가를 모셔 보다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질문3) 도시 형성과 성장 과정에 대한 역사는 앞으로 그 분야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식민도시의 어떠한 문제들이 부산학의 쟁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먼저 근대 유산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세관은 철거되었고 1950년대 초반 대화재로 부산역은 불타 없어졌습니다. 부산부(釜山府) 건물이던 옛 부산시청도 헐고 그 자리에 롯데백화점이 서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여전히 보전되어 활용되고 있는 근대 유산도 적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예로 부산부 건물이 없어지던 당시를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시민들의 저항이 전혀 없는 가운데 디자인을 전공한 서울대 김민수 교수가 부산부 건물을 “동아시아평화박물관”으로 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일제 유산을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재활용하자는 제안입니다. 하지만 큰 설득력을 얻지 못한 채 부산부 건물은 철거되고 맙니다. 도시의 정체성이 누적된 기억의 적층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에서 매우 아쉬운 대목이지요.

질문4) 그런 일이 있었네요. 부산부 건물을 “동아시아평화박물관”으로 활용하였다면 부산의 위상이 살아나는 측면이 있었겠습니다. 이 속에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이 관여한 부산의 역사를 채울 수 있겠죠?

-그렇습니다. 부산은 국가 안에서 지방-로컬이지만 동아시아 지역, 나아가 세계로 시야를 넓히면 국가를 넘어선 시야가 열리는 장소(토포스)입니다. 부산학은 바로 이러한 스케일을 요구합니다. 근대 유산을 일제 청산이라고 보는 국가주의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배와 종속의 유산도 미래를 위한 기억으로 재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미 앞에서 영도다리 보전을 이야기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영도다리도 일제의 근대 유산입니다만 여기에 한국전쟁 당시 피난의 기억이 더해지면서 보전을 위한 시민운동이 있었지요. 그나마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지긴 하였습니다만 세관건물이나 부산부 건물의 운명과 확연히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앵커멘트) 영도다리 철거 논의가 있을 때 시민단체들이 나서 보전 운동을 했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한국전쟁 당시의 기억이 포개진 탓이 크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식민도시라는 기억은 우리가 안고 가면서 중요한 자산으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주에도 부산학의 쟁점 위주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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