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 가족은 지방의 읍 단위 마을에 살았습니다. 변변한 스포츠 시설이 귀했던 80년대 초 동네 뒷산 입구에 테니스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아버지는 종종 공을 쳤습니다. 테니스가 지금의 골프 같은 ‘귀족 스포츠’였던 시절 아버지는 변변치 않은 살림살이에도 테니스회 회원이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나무로 된 일자 형태의 ‘한일 라켓’을 사용했는데, 어느 날 ‘에스콰이어’란 영문 글씨가 선명한 알루미늄 재질의 새 라켓을 집에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기존 나무 라켓을 삼형제 중 운동 신경이 조금 나은 저한테 주며 쥐어보라고 했습니다.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에게 잔뜩 주눅들어 있었던 초등학교 4학년 꼬마는 무거운 나무 라켓을 들고 테니스장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테니스장에서 벌어지는 다분히 폭력적인 어른들의 세계가 기억 한 켠에 뚜렷이 자리잡은 것은 그 즈음이었습니다.

  동네 테니스장에서는 아버지 연배의 40~50대 아저씨들의 복식 시합이 늘상 벌어졌습니다. 레슨 한번 안받아 폼이 엉성한 아버지는 구경하는 어린 아들을 뿌듯하게 할 실력이 결코 아니었지만 경기 감각은 꽤 괜찮아보였고, ‘굿 샷’이 들어갈때는 집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환한 웃음도 지어보였습니다. 하지만 동네에서 운동용품 점포를 하는 ‘임0하’란 이름의 아저씨가 코트에 들어설 때면 아버지는 평소답지 않게 쩔쩔매곤 했습니다. 그건 주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 치는 실력이 출중한 운동용품 사장은 시합 내내 잠시도 쉬지 않고 온갖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는 자기 편이 점수를 따면 몹시 으시대며 환호했지만 아쉬운 실점의 순간에는 늘 혀를 끌끌 차면서 실망감을 분출했습니다. 파트너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그게 아니지”로 시작하는 충고의 말을 참지 않았고, 본인이 실수할 때는 “라켓이 이상하네” 또는 “어제 술을 좀 마셨더니”란 적극적인 해명을 거르지 않았습니다. 복식을 마치 단식 치듯 앞뒤,좌우를 가리지 않고 코트를 휘저으며 독무대를 펼치는 ‘매너 꽝’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비롯한 구장 회원들은 그를 황제 모시듯 떠받들었습니다. 그 시절 ‘임0하’ 아저씨는 그야말로 테니스장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시절의 아버지 나이에 접어들 무렵 저는 테니스 동호인 클럽에 가입했습니다. 손에 쥔 라켓도 아버지 손때가 묻었던 ‘나무 라켓’이 아니라 스틸, 그라파이트에 이어 하이카본 재질로 바뀌는 속에서 10여년이 흘렀습니다. 테니스장의 ‘매너’도 시민의식 향상에 힘입어서인지 보편적으로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갑질’의 정도만 다를 뿐 일그러진 동네 테니스 영웅은 어느 클럽에서나 존재했고, 그것이 대한민국 동호인 테니스 문화가 갖는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 운동용품 사장에게 아버지가 쩔쩔맸던 까닭도 어렴풋이 가늠하게 됐습니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구장 숫자와 복식 위주의 동호인 테니스 경기 방식이 ‘총체적 조급함’을 낳고, 충분한 운동량과 신나는 게임을 즐기려면 어떻게든 ‘소수 정예’를 만들어야만 하는 구조가 배려와 양보의 문화를 사라지게 하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실력이 상대적으로 딸리거나 친분이 부족한 사람에게 어렵사리 찾아온 한 게임을 같이 치자며 손을 내밀 수 없는 보통의 동호인 테니스회라면 알량한 실력과 큰 소리를 앞세운 ‘엄석대’들이 득세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입니다. 제가 테니스장을 드나든 10년간, 활달했던 신입 회원이 멋쩍은 표정으로 귀가한 뒤 아예 나오지 않거나, 주변인으로 맴돌다가 마음에 상처를 입고 운동을 포기한 숱한 동호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 우리나라 테니스 인구는 현격하게 줄었습니다.

  본래 테니스는 예의를 중시하는 가장 신사적인 스포츠입니다. 운동을 함께 하는 이들간에 유대감이 깊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매너와 인성이 뒷전으로 밀린 대한민국 동호인 테니스의 현실은 아이러니합니다. 실제 테니스란 운동이 갖는 ‘품격’은 온 국민이 열광했던 정현 선수의 호주 오픈 출전 경기에서 여실히 확인됐습니다. 정현 선수는 또래의 그 어떤 대한민국 스포츠 스타도 보여주지 못한 당당함과 재치, ‘글로벌’ 화술로 국민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정현과 16강에서 맞붙은 전 세계 1위 조코비치는 경기 후 "나의 부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현의 승리를 깎아내리는 행위"라는 아름다운 인터뷰를 했고, 정현과 결승행을 다툰 ‘테니스 황제’ 페더러는 손쉽게 이기는 경기가 기권승으로 바뀌어서 아쉬울만도 할텐데 "나도 부상당해봐서 얼마나 아픈지 안다"는 말로 감동을 줬습니다. 실력 만큼 넉넉한 ‘인품’을 뿜어낸 이들 최정상급 테니스 스타들을 보면서 저는 스포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올바른 윤리와 품성을 키우는 것, 정정당당하게 규칙을 지키고 상대를 배려하는 것... 이런 스포츠 정신이 근시안적 승리만을 추구하고 조급증에 사로잡혀 자신만의 목소리를 높이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 해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나무 라켓‘을 제 손에 쥐어줬던 돌아가신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지는 날입니다./ 이현구 정치외교부장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