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연구 끝에 <의상대사 구법 건축순례행기> 펴내

1. 건축공학을 가르치고 계신데, 어떻게 불교, 특히 의상대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요?

제가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고 있지만 한국건축사도 가르친다. 그러다보면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목조건축물이 부석사이고 부석사를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고 가르치면서 부석사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됐습니다만 부석사를 만드신 분이 의상대사님이 알려져 있어서 관심을 갖게 됐다. 의상에 대해 자료도 찾고 하면서 의상대사의 건축물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게 됐다.

2. 우리나라 고찰들은 원효스님과 의상 스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책을 쓰면서 기본 전제가 인간, 시간, 공간 세 가지 이해를 통해 불교건축에 대해 심오한 뜻을 가까이 갈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바람이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까요?

제가 건축을 바라보는 눈이 건축이 행위하는게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고, 인간에 대한 이해부터 출발해야 한다. 인간과 그 시대의 사회상, 정치사회 등과 맞물려 건축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접근도 중요하지만 누가 만들었느냐,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다보니까 핵심이 인간이고, 시간은 역사와 사회, 그리고 공간은 건축이다. 이렇게 세 개의 축을 가지고 건축을 이해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세 가지 지표를 가지고 출발하게 됐다.

3.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영주 부석사는 어떻게 분석되나요?
부석사를 개창하신 분이 의상대사이므로 어떤 분인지 궁금했고, 다음에 부석사가 불교사찰인데, 부석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독특한 설화를 갖고 있다. 설화를 접하면서 다른 사찰과는 다른, 우리나라의 독특한 샤마니즘이 묻어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불교가 전래될 때 영주 부석사가 개창되는 상황에 불교와 신라의 전통적인 샤마니즘이 습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러다보면 불교에 대한 이해 필요하고 당시 샤만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설화는 선묘 관련이지요?
그 설화가 <송고승전>에 나오는데 기록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등주에서 선묘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고 다른 데는 안 나온다. 의상이 당나라에 간 기록이 <의상전교>인데 의상전교에는 안 나오고 유사에는 나온다. 의상전교에는 지금의 상해 양주 대명사에 갔다고 기록돼 있고, 두 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까지는 양주에 간 설과 산둥반도 등주에 간 설이 있는데 두 설 중 어느 게 맞는지 아직 정해져 있지 않고 혼란스럽게 쓰고 있는 실정이어서, 제가 내용을 정리해 보니 의상전교에서 이야기하는 양주도착설이 훨씬 더 유력하다고 정리해 보았다. 물론 귀국하는 길에는 등주를 통해 귀국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었다는 것을 이유를 제안했고, 그래서 등주에서 귀국하는 모습을 송고승전에서 선묘설화로써 기록을 남긴 것 같다.

5. 이 책에서 가장 관심 끄는 대목은 의상스님이 어떤 길을 통해 당나라에 갔나 하는 부분인데요, 1차는 실패하고 2차 때 성공 양주에 도착했다는 설을 새로 제시한 것인데, 자세히 설명해 주실까요?

우리나라 의상전교에, 신라 기록에서는 양주로 갔다고 돼 있고, 송고승전은 송나라 중국 자료인데 등주로 갔다고 돼 있는데, 송고승전은 연대라든지 매우 많이 틀리다는 것이 일반 학자들의 이야기이다. 다만 송고승전의 선묘 설화가 매우 흥미로워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을 뿐이다. 실제로 의상이 당나라 유학 갈 때는 배를 타고 가야 하는데 1차는 원효 스님과 시도하는데 그 때는 고구려를 통해서 가려하는데 당시 고구려는 신라와는 적대국가가라서 신라 사람들이 자유왕래가 안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고구려 순라, 병사에 잡혀 실패하게 된다. 그 이후 2차는 의상스님이 혼자서 가는데 당시에는 황해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돛단배로 건너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달나라에 가는 것만큼 목숨 걸고 가야하는 길이다. 그런데 왜 양주라고 말씀드리느냐 하면 황해의 해류는 특히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운데 부분이 흐른다고 한다. 왜냐하면 황하강이 커다란 물살로 내려오는데 한강 물살보다 20~30배로 큰 수량으로 내려오니까 역방향으로 배가 움직이는 너무 어렵다. 따라서 당연히 신라의 당항성, 현재 화성에서 출발하게 되면 배를 바람을 이용하게 되면 저절로 남쪽으로 가게 된다. 그런 것은 제가 새로 만든 이야기보다는 일본의 엔닌스님이 구법입당행기를 쓰면서 당시의 뱃길의 행로를 적은 것을 참고해서 저 나름대로 만들어봤다.

6. 제2장에서는 동북아시아의 불교 전래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중국,일본의 불교를 다루고 일본 비조사와 백제 군수리사의 동질성 탐구를 덧붙였는데, 일본과 백제 두 사찰의 동질성은 뭡니까?

우리나라 불교는 중국에서 전래되는데, 고구려.백제.신라의 불교의 모습을 알아야 하지 않나 해서 고구려.백제.신라 초기 불교 전래에 대한 정리를 한 것이다. 그걸 하다보니까 우리 동양 삼국은 거의 같은 문화권에 있지 않았나 생각되고, 우리 불교가 일본에 전래되는데 그러면서 가장 초기에 일본불교에 영향을 끼친 게 백제불교이다. 백제시대 사찰건축이 당연히 일본사찰 건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일본의 최초 사찰이 비조사인데, 그 비조사는 당시 백제 성왕이 불교를 전했으니 불교 뿐 아니라 신앙이 전래되는 것이지만 더불어 건축 기술자, 스님, 화가도 가니 역시 커다란 문화예술집단이 이동하게 되는데 백제불교가 그대로 전수됐을 것이다 일본 <서기>에도 그런 기록이 자세히 나온다. 백제 불교건축도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을까 해서 비조사의 자연과 근처 여러 사찰과의 관련을 통해 백제불교와의 유사성을 찾아보면서 우리 불교가 일본 불교에 큰 영향 미쳤음을 말씀드리고 싶었고, 실제로 후에 의상대사의 화엄종이 일본에 전래된다. 그리고 나서 12세기에 들어 교토에 고산사에 묘엔스님께서 화엄종을 받아들여 개창한다. 묘엔스님은 원효,의상 대사에 대한 송고승전의 설화를 그림으로 남겼다. 그래서 지금도 그 그림이 국보로 남아 있다. 그 삽화 안에 의상대사의 영정도 그려져 있고 선묘와의 설화, 선묘가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된 것도 그림으로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따라서 신라의 화엄종이 전래돼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교토에 고산사를 방문해 의상대사의 흔적을 찾아보고 소개한 것이다.

7. 제3장에서는 석가모니와 불교를 제목으로 석가모니의 생애와 불교의 세계를 다룬데 이어 제4장에서 다시 의상대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의상과 불교건축을 주제로 신라의 삼국통일, 구도자 의상의 거점, 선묘와 부석사, 문무왕과 석굴암, 낙산사 홍련암, 망해사와 처용암 이렇게 여섯 파트를 다루고 있는데, 구도자 의상에 대해 초점을 맞춰 말씀을 주실까요?

의상대사는 물론 정치적인 상황에, 당시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공격한다는 정보를 듣고 귀국하게 되지요. 그래서 초기 귀국한 다음에는 정치적인 상황에 관련을 갖는 것 같지만 그 이후로는 경주에 거주하지도 않고 부석사를 중심으로 산중수행을 했다. 그러다보니 의상대사의 행적은 아마 부석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기록에도 나오고 있고요. 그래서 부석사와 관련된 영주 가까운 부근에 사찰들을 찾아보니 의상대사와 매우 관련 있는 설화를 가진 사찰들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축서사,불영사 등 사찰들이 결국 지도상에 보니 스님들이 걸 어 다니면서 교류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가 되고, 그 영역을 중심으로 산중수행을 했을 것이라고 감히 상상해서... 그리고 의상스님이 부석사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저는 부석사의 전설들이 남아 있으니까 부석사 어딘가 계실 것이다. 의상대사,원효대사가 우리나라 최고 스님인데도 아직도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알려져 있지 않고 부도도 남아 있지 않아 아쉽다. 부석사는 아직 전반적인 문화재 발굴이 되지 않은 상태여서 전체적으로 발굴하게 되면의상대사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가 충분히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8. 정의를 구현하려는 기독교의 이상국가 건설은 이미 투쟁적이 되어 버렸고 이제 자비를 바탕으로 한 불교의 평화적 방법에 위한 신의 나라가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씀하고 계신데, 부연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는 기독교는 일신교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일신교라는 하나의 가치관에 사람들이 따르고 숭배해야 하는 종교가 아닌가 생각한다. 반면에 불교는 대단히 다양한 요구에 대응하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다른데 그걸 맞춰 대응해준다. 그 대응 방법이 바로 자비로움이고, 자비로움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요즘 시대에는 다양한 인간의 다양한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의 요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앞으로 불교가 우리 사회에 더 많은 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말씀드렸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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