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2017년 1월 1일은 기억이 선명한 날입니다. 새해 벽두부터 기자로서 크게 물을 (중요한 보도를 놓쳤다는 언론계 은어) 먹었습니다. 갑작스레 이뤄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 출입기자 신년 간담회를 완벽하게 놓쳤습니다. 그날 저를 비롯한 일부 무심한(?) 출입기자들은 배성례 홍보수석 비서관 주재의 떡국 오찬 공지 문자를 애써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저마다의 휴일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춘추관 구내식당에 모인 성실하거나 눈치빠른 기자들을 배 수석은 “대통령께서 기다리신다”며 돌연 경내 상춘재로 데려가 평화로운 각 언론사 보도국을 뒤집어놨습니다. 당시 고속도로를 달리던 저는 불난 듯 계속 울리는 휴대폰을 붙들고 아연실색했습니다. 간담회는 삼성합병 뇌물죄 의혹과 세월호 7시간 행적 등에 “완전히 엮였다”는 대통령 발언과 수첩, 노트북 하나 없이 병풍처럼 둘러선 기자들의 다소곳한 모습이 어우러져 거의 한달 내내 종편 TV화면을 장식했습니다. 준비된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쏟아내려고 희안한 상황을 연출한 대통령 곁에 자사 기자가 있는지를 화면에서 열심히 찾았던 BBS 동료들은 이후 참석자들이 네티즌들에게 소위 ‘기레기’(기자+쓰레기란 뜻의 신조어)로 내몰리자 외려 다행이라고도 했습니다. BBS 보도국 유사 이래 처음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에 불참한 청와대 출입기자의 과오는 물론 엄청난 질책으로 돌아왔습니다.

   임기 내내 불통 논란을 빚은 대통령의 새해 첫날 대국민 소통은 더할나위 없이 꽉막힌 불통의 전형으로 기록됐습니다. 그날의 대통령은 머지않아 청와대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날 대통령과 사실상 마지막 대면을 했거나 불참자가 된 출입기자들도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최순실 국정농단에 무기력함을 느꼈고, 가깝게 지낸 청와대 인사들의 서글픈 뒤안길에 안타까워했던 출입기자 자신들도 대체로 외롭게 떠났습니다. 메이저 언론사의 경우 통상 청와대를 거쳐 자연스럽게 주요국 특파원으로 가거나 데스크로 올라서곤 하지만 초유의 사태는 회사 내부 인사마저 흔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출입기자들이 이렇다할 송별 인사 제대로 나눌 여유도 없이 취재에서 빠지거나 부서가 바뀌었습니다. BBS를 포함한 중앙 방송사 1진 10여명은 춘추관 어느 꾸미(묶음이란 의미의 기자 소그룹을 지칭하는 일본어)보다 잘 뭉쳤고 청와대 비서진들과의 교류나 정보 교환이 활발했는데, 어수선한 대통령 탄핵 사태 속에서 서로간 소통이 거의 단절됐습니다. 세상과 벽을 쌓은 채 특정 비선 인사와만 내통해온 청와대 한켠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죄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7년 11월 7일. 국빈 방문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일정은 평택의 새로운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스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군부대에서 외빈을 직접 맞는 파격적 의전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취재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기회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두 대통령이 처음 함께 한 양국 군인들과의 식사 시간에 청와대 풀단(대표 취재기자)은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이 모습을 직접 찍어 페이스북 동영상으로 생중계했습니다. ‘기자 패싱(Passing)’이란 출입기자들의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하지만 청와대는 트럼프가 떠난 후 곧바로 이어진 문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때도 자체 SNS를 통한 직접적인 대국민 소통에 치중했습니다. 필리핀에서 있었던 한-아세안 정상회의때 아나운서 출신 고민정 부대변인은 회담이 열리는 호텔에서 문 대통령의 순방 일정과 현장 분위기 등을 청와대 페이스북으로 생방송했습니다. 먼 길을 함께 날아온 취재기자단에게는 알리지도 않은채 자체 미디어에 사실상의 단독 보도를 제공한 것입니다. "취재 역차별을 중단하고, 뉴미디어 컨텐츠 배포시 사전에 공지하라"는 기자단의 공식 항의가 있었지만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지속되고 있는 SNS 중심의 소통 기조는 오히려 더욱 활개칠 듯 보입니다. 적극적인 소통이 기존 언로를 막아서 오히려 불통을 초래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달 중순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 기간 있었던 중국 경호원들의 한국 기자 집단폭행 사건이 우발적 단독범행으로 축소되는 모양입니다. 당시 10여명의 경호원이 가담했지만 중국 정부는 1명만을 구속하며 덮으려 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하는 우리 정부의 이렇다할 조치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네티즌들은 청와대 해외 수행 기자단 제도를 놓고 국민청원으로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12월 31일 현재 9만8천여명이 청원에 동참했습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대통령 해외순방 기자단이 해외에서는 손님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국내에서는 적폐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 손에는 촛불, 다른 손에는 스마트폰(SNS)를 든 시민들이 정권교체를 이룬 순간 ‘기자 패싱(Passing)’은 시작됐을지 모릅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에 맞춰 제 후임으로 춘추관에 상주해 순방 수행 취재도 열심인 회사 후배기자가 문득 애처로워지는 2017년의 마지막 날입니다./이현구 정치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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