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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선생과 잠두봉(蠶頭峯)의 눈물
박경수 기자 | 승인 2017.10.17 00:03

  (한강 당산철교옆 잠두봉)

 유난히도 높은 하늘이다. 눈이 시릴만큼 깊고 푸르다. 조금은 서늘한 강바람이 금새 시원해진다. 때늦은 수상 스키에 밤섬이 그 곁을 내준다. 강변에서 걷고 뛰는 이웃들 모습에서 여유와 힘이 느껴진다. 차창에 스치는 한강도 좋지만 그 굴곡을 천천히 훑어가며 감상하는 파노라마는 절경 그 자체였다. 나는 이렇게 지난 주말 자전거로 한강변을 따라가며 아름다운 서울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눈부신 경관 한켠에는 역사의 아픔을 오롯이 간직한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그 현장을 찬찬히 둘러보는 동안 어느틈에 어둠이 밀려왔다. 손에 잡힐 듯 그리 멀지않은 150년전 어두운 우리 근대사(近代史)처럼 말이다.

마포대교 아래 강변에서 자전거로 10분 남짓 달리면 양화대교 밑을 지나게된다. 양화(楊花)라는 이름은 인근 강변에 갯버들이 많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양화진(楊花津)의 유래라고 할 수 있다. 그 바로 옆에는 툭 튀어나온 절벽이 보이는데, 누에고치의 대가리같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峯)’이다. 한때 한강의 명소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못하다. 거기서 수많은 천주교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절두산(截頭山)’으로 더 익숙해졌다. 김훈 선생의 소설 ‘흑산(黑山)’이 씌어지게된 계기가 바로 이 곳이다. 김 선생은 일산 집으로 귀가할 때면 절두산을 보고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피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며’ 썼다고 작품 후기에서 적고 있다. 서학(西學)으로 불린 천주교는 당시 ‘사학(邪學)’으로 몰려 1만명 이상이 희생당했다.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도 용산 새남터에서 처형됐다.

(강원도 홍천군 풍암리 동학혁명군 위령탑)

잠두봉에 조성된 추모비에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니 이번에는 저 멀리 홍천의 ‘자작고개’가 떠올랐다. 한강을 거슬러 다슬기가 많이 잡힌다는 홍천강 옆에 있는 고개다. 피가 자작자작 고여있다해서 붙여진 섬뜩한 지명이지만 그 유래를 알고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 역시 서울로 복귀하기전 마지막으로 둘러보며 그 나지막한 언덕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농민들을 떠올렸었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 앞서 강원도 동학(東學)농민군 최후의 결전장이 바로 자작고개였던거다. 1970년대에 와서야 도로를 만들며 숱한 유골이 발굴됐고 그제서야 후손인 주민들이 위령탑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음력 10월이면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들이 자작고개 인근에 꽤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강변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미 어두웠다. 자전거를 오른편에 끌며 천천히 걸었다. 강가를 비추는 가로등은 밝았지만 페달을 밟기에는 상념이 많았다. 동학(東學)과 서학(西學) 그리고 숱한 백성들의 희생. 김훈 선생이 잠두봉을 지나치며 느꼈던 압박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0월17일 박경수 기자의 삼개나루]

 

박경수 기자  kspark@bbs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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