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특검의 ‘세기의 재판’ 1막이 끝났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기소부터 선고까지 약 180일. 특검 사무실에서 뽀얀 입김을 불면서 취재진 사이의 그를 힘들게 쫓아다녔는데, 어느새 더운 날씨에 몸에 끈적히 달라붙는 셔츠를 입고 재판까지 지켜보게 됐다. 삼성그룹 80년 역사에서 최초로 실형을 받은 그룹 총수, ‘시련의 후계자’라는 별칭까지 붙은 이재용. 혁신적인 계열사 재편과 신산업 발굴로 ‘뉴 삼성’을 이끈 ‘실용주의 리더’에서, 국회 청문회와 법정에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바보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도 그리 길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1심 재판부 판결의 핵심은 이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 씨 사이 89억 원의 뇌물이 오고 간 배경에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고 인정한 것이다. 개별 현안마다 청탁과 뇌물을 따박따박 주고받은 건 아니지만, 경영권 승계라는 포괄적 현안을 가진 이 부회장 입장으로선 대통령의 요구에 응하며 삼성 합병건 등 개별 현안에 도움을 기대했고, 실제로 문제가 해결되면서 그룹 지배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대형사고가 터지기 전에 수많은 징후가 나타난다.”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이 부회장이 물을 한 잔 삼킨 뒤 무표정하게 구치소로 돌아가고 나서, 판결을 곱씹다가 ‘하인리히의 법칙’이 떠올랐다. 특검이 지적했듯, 삼성의 ‘불법·편법 경영권 승계’가 문제로 지적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3대째 이어지는 삼성의 리니지 게임이 계속되는 동안 논란은 평행이론처럼 반복됐다. 1996년 이 부회장은 에버랜드(현 삼성물산) 전환사채 저가 발행, 인수를 통해 단숨에 최대주주로 올라섰는데, 경영권을 불법 승계했다는 의혹으로 대법원에서 6대 5, 한 표차로 무죄를 받았다. 1999년에는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건으로 이건희 회장이 집행유예를 받았다 4개월 만에 사면됐다. 이 부회장 측은 ‘연좌제’까지 말하며 지난 사건과의 연관성을 부인하지만, 어쩌면 무탈히 작은 사고를 넘기면서 쌓은 ‘노하우(?)’가 초유의 오너 구속 사태를 맞게 한 것일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에서 편하게 살아가려면 아는 사람이 3명은 필요한데, 경찰과 은행원, 병원 직원이라는 말이 있다. 범칙금 면제부터 환율 수수료 우대, 수술 날짜 잡는 것까지 직무와 관련된 크고 작은 청탁과 민원이 어느 정도 친분만 있으면 통한다는 우스갯소리다. 작은 권력에 기웃거려야 덕을 좀 보는 세상에서, 재판부의 말마따나 ‘막대하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을 대할 땐 어떨까. 1심 판결문은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이 이번 사건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 부회장이 최후 변론에서 울먹이고 말한 것처럼 “법과 정도를 지키는 건 물론이고,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기업이 되자는 뜻”이 있다면, 대형사고 격인 이번 재판을 계기로 삼아 불법과 편법의 꼬리표를 떼고 좁더라도 정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좀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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