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우리는 진정한 해방, 진정한 독립과는 거리가 먼 광복절을 맞았다. 민족의 삶터인 한반도는 타의에 의해 허리를 잘리고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른 후 세계적인 대결의 장으로 남아 있다. 남한에 진보적 정권이 들어섰다지만 남북 간에 조그마한 변화의 가능성은커녕 어느 때보다도 높은 위기감이 격화하고 있고, 반쪽의 독립마저도 지켜내기 쉽지 않은 냉엄한 현실을 목도한다.

정전협정의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은 연일 ‘선제공격’ ‘불바다’ 등 위협적인 발언을 쏟아내며 강대강으로 부딪히고 있다. 자기식의 살길을 찾아온 북한은 마침내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에 성공하며 돌파구를 찾았다는 듯 의기양양하다. 변화를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요구를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하고 있다. 제재와 압박이 제대로 먹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정책들은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부분 북한의 일방적인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남한이 주도하는 남북간 직접 접촉은 현재로서는 기대 난망이며, 심지어 남한의 역할을 배제하는 ‘코리아 패싱’ 이야기까지도 거론되는 상황이다. 북과 특수관계인 중국의 역할에 기대는 중국 역할론도 그다지 효과가 없다. 선제공격도 해법은 아니다. 대응공격에 따른 후유증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한반도 문제에 해법은 없는 것인가. 기본에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관계 속의 일이므로 양측이 대화를 하려면 무엇보다 상대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돼야 한다. 상대를 ‘악(惡)’으로 규정하고서는 대화가 안된다. 상호의존의 ‘연기(緣起)’와 차별 없는 ‘불이(不二)’의 불교 정신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서로를 차별하고 적대시하면서 일이 풀리기를 바라는 모순된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 특히 이념 갈등의 벽을 넘어야 한다. 보수는 한 번도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은 북을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진보는 적화야욕을 무력화하려면 ‘바람’ 보다 ‘햇볕’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접점을 찾지 못하면 공멸이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이라지만 70~80년대까지는 상당 부분 의견 일치가 있었다. ‘잘 살아 보자’는 희망 아래 국민들은 산업화에 합심 노력했고,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젊은이들도 시위를 하는 한편으로 실력도 쌓아 나라 발전에 기여했다. 눈앞의 ‘적(敵)’과 대치하던 남북 간 체제경쟁은 안보를 튼튼히 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시킨 밑거름이 된 측면이 있었다.

통일과 선진화의 과제를 앞두고 있다는 요즘은 어떤가. 각자도생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 빈부격차 확대와 중산층 붕괴로 사회의 안정기반이 상실되고 아름답던 공동체 문화마저 해체돼 희망 없는 아우성의 도가니가 돼버리지 않았나. 급속한 고령화와 보기 드문 저출산, 그리고 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로 사회의 동력은 떨어지고 미래마저 불안하지 않은가. 눈앞의 적군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아군끼리 갑론을박하는 형국이다.

그 사이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중국은 새로운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한 이후 얼마 되지 않은 기간에 슈퍼파워인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반면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떠올랐던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거치며 안보에서는 미국의 속국이 되다시피 돼버렸다.

미국의 힘과 역할에도 장기적으로는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안보를 언제까지 외부의 힘에 의존할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한미동맹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지켜나가면서도 전시작전권 환수 등 명실상부한 자주국방의 토대도 마련해 나가야 한다.  

한반도가 또다시 포화에 휘말려선 결코 안된다. 하지만 그것은 그럴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효과적일 때만 가능한 희망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북한의 일방적 변화만을 전제로 한 정책은 한계에 직면해 있다. 서로를 살리는 연기와 불이의 정신을 우리 모두 앞장서 구현할 때만 가능하다. 진정한 독립을 이룬 광복절을 어서 맞이하고 싶다.

김봉래(불교사회인의 책임 실천운동 TF팀장 겸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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