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생 형제를 키우는 아내는 어린이집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처가로 곧장 내려간다. 손자들이 보고 싶은 할머니와 처가에서 쉬고 싶은 아내 사이에서 남편은 그저 묵묵부답으로 대처해야 한다. 서울로 올 때 아내는 녹차를 가지고 온다. 차를 유난히 즐기는 시어머니에게 보내는 선물이다. 처가가 차로 유명한 하동에 있고, 조그만 차밭도 있어서 직접 차 잎을 따 손수 덖어 두었던 차를 건네며 서울 복귀를 알린다. 개인적으로 차와 인연이 깊다. 대학시절 과 선배가 충무로 근처에서 녹차방을 운영했는데, 곡차를 한잔 하면 동기들과 어김없이 그곳에 들려 녹차를 마셨다. 군대에 가서 훈련소 기간에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은 피자나 치킨이 아니라 녹차였을 정도로 20대에 차에 푹 빠져 지냈다. 불교기자로 일하면서 스님들이 건네는 보이차를 접하게 된 후에는 차의 세계는 더욱 넓어졌고, 좋은 차를 마실 기회도 늘어났다. 요새는 마음이 바빠 잘 가지는 못하지만, 불교계 언론사인 법보신문과 불교플러스에서 염치없을 정도로 차를 참 많이도 얻어 마셨다. 또 이전 직장의 스님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차인이자 문인이었는데, 글을 쓴다는 이유에서인지 머리를 맑히라며 귀한 차를 분에 넘치게 많이 받기도 했다.

차의 시작은 중국이다. 농업의 신 신농씨가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서양에서 차를 티 (tea)라고 부르는데, 서양으로의 차 수출이 주로 이뤄지던 중국 복건성에서 차를 티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흔히들 서구에서는 차보다 커피를 즐긴다고 생각하지만, 서양 사람들의 홍차 사랑은 대단하다. 18세기 영국은 중국 차, 홍차를 매우 즐겼다. 막대한 양의 중국차가 영국으로 수출됐고, 무역 불균형이 심화되자 영국은 목화와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했다. 세계사에 있어 너무나 유명한 아편전쟁의 한 원인은 바로 차였던 것이다. 이후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배하면서 차의 대량생산에 나선다. 막대한 양의 차 소비량을 중국차로만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대 때 차를 처음 접했을 때 필자는 왜 서양에서는 홍차를 주로 마시고, 동양에서는 녹차를 마시는가 궁금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서양으로 차가 전래 되었기에 녹차의 역사가 더 오래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우리가 마시는 녹차는 당송시대부터 본격화 되었다. 차의 산화방지를 위해 수분을 빼는 덖음이 체계화되기 전까지 중국에서도 홍차를 마셨다. 차는 발효에 따라서 다른 이름과 다른 맛을 지닌다.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차 잎을 따서 바로 수분을 뺀 녹차이다. 그리고 이 녹차를 따서 완전히 발효 시킨 것이 홍차이다. 또 비 발효차인 녹차에서부터 완전발효를 시킨 홍차 사이에는 발효의 정도에 따라서 다양한 차가 존재한다. 미세하게 발효 시킨 '백차'에서부터 약하게 발효시킨 '황차'와 이보다 강한 '청차'가 있고, 이 범주에 벗어난 후 발효차 등으로 보이차 등이 있다. 본래 같은 차 잎을 가지로 발효에 따라 나눠진 녹차와 홍차, 그렇다면 왜 서양 사람들은 홍차를 더 즐기게 됐을까? 영국이 중국에서 차를 따서 범선에 싣고 수개월 후에 도착해 보니 발효가 돼 홍차가 되었다는 등 설은 분분하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당시 미약했던 교통수단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중국에서 영국까지 범선으로 최소 수개월이 걸림을 감안할 때 완전 발효차인 홍차가 운반과 상품성에 있어서 탁월했을 것이다. 또 영국 등 서구열강들이 인도 등의 식민지에서 차 대량생산에 성공하면서, 홍차는 커피와 함께 서양 사람들이 가장 대중적으로 즐기는 기호음료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동양은 녹차, 서양은 홍차라는 이분법이 빠르게 옅어지고 있다. 지난해 명원 세계 차 박람회 현장에서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7호 궁중다례 의식보유자인 명원문화재단 김의정 이사장을 인터뷰 했는데, 김 이사장은 요즘은 서양에서도 꽤 많은 사람들이 녹차를 즐기고 있다고 전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통의 발달로 유통의 장벽이 사라졌고, 녹차의 카테킨 등 항산화물질의 성능이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차를 이야기함에 있어 불교를 빼 놓을 수가 없다. 신라시대 때부터 불교와 함께 크게 융성했던 우리의 차 문화는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쇠퇴했다. 이후 초의선사에 의해 부흥 된 다도 문화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을 통해 널리 퍼졌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자취를 감췄다. 해방 이후 우리 차 문화 복원 움직임이 활발했는데, 김의정 이사장의 모친인 명원 김미희 선생은 우리 차 문화 복원에 앞장 선 선각자 중 한명이다. 세간에 많이 알려진 대로 명원문화재단 김의정 이사장의 아버지는 쌍용그룹 창업주인 성곡 김성곤 회장이다. 명원 김미희 선생은 남편인 성곡 김성곤 회장이 1952년 헬싱키올림픽 선수단을 후원하면서 인근 유럽 국가들을 동행하게 되었는데, 서구사회에서 널리 퍼진 차 문화를 접하고, 차 문화의 중요성을 통감했다고 한다. 귀국 이후 맥이 끊긴 전통다례 복원에 나선 명원 김미희 선생은 순정효황후 윤씨를 모신 김명길 상궁으로부터 궁중다례 의식을 찾아 우리 다례를 체계화 했다. 김의정 이사장은 다기를 복원하고 차 연구자까지 양성해야 했던 지난한 과정을 이겨낸 것은 아버지의 재력과 어머니의 헌신이 만든 결과물이었다고 회고했다. 매년 가을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명품 차(茶)를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는 명원 세계 차 박람회가 올해는 8월 24일 강남 코엑스에서 개막된다고 하니 시간을 내 들려보면 좋을 것 같다. 녹차와 홍차, 다른 듯하지만 출발은 같고, 무엇보다 대화로 마음을 나누는 차 문화와 정신은 동양과 서양이 똑같을 것이다. 세월히 지날 수록 차를 함께 마실 이는 줄어들고, 마음만 바빠지는 듯 하다. 동, 서양 모두 국경 없이 차를 즐겼던 것은 인간이란 원래 밥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뜨거운 여름, 차에 담긴 정신과 마음, 여유 그리고 차를 나눌 친구가 더욱 그리워진다.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