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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주한미군 기지 이전에 따른 문화재 보존 문제를 살펴보는 기획보도 두 번째 순서입니다.

정부와 지자체간에 반환된 용산기지 활용을 놓고 빚어진 갈등도 수그러들고 있지만 사실 용산기지는 이런 갈등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와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반환을 앞둔 서울 용산 기지에선 지난 백여 년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박준상 기자가 집중 취재했습니다.

조선시대 '용산 지도' (용산문화원 제공)

 

우리 역사 속에서 교통의 중심지이자 한양 도성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꼽혔던 서울 용산.

조선 후기까지 이 곳엔 한강의 지천인 만초천이 흐르고 얕은 둔지산 구릉 사이사이엔 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외국군이 용산에 자릴 잡기 시작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쫓겨난 민씨척족정권이 끌어들인 청나라 군대가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한 사건도 여기서 일어났습니다.

특히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제 병참기지가 조성됐는데, 이때를 계기로 용산을 둘러싼 외국군의 철조망은 113년 동안 경계를 이뤄왔습니다.
 
광복 이후 미군이 주둔한 용산기지는 굴곡진 역사가 축적된 곳인 만큼, 130여 점에 이르는 수많은 근현대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인서트1/ 김제리 서울시의회 의원(용산구)>
“김구 선생을 저격했던 안두희가 위수감옥에 갇혀있던 그런 사실, 또 흥선대원군이 오랏줄에 꽁꽁 묶여서 청나라 간지 3년 만에 돌아왔잖아요. 그런 장소. 특히 중요한 건 우리 ‘괴물’이라는 영화 탄생했을 적에 원인도 거기에 있거든요.”

용산 기지 내 건물은 모두 1245개 동으로, 이 가운데 미군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분류한 건물은 174개 동입니다.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수감됐던 ‘위수감옥’은 얼마 전까지 미군 의무대가 쓰고 있었고,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소련군 대표가 묵은 장교숙소는 원형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또 조선시대 기우제를 지냈던 화강암 제단인 ‘남단 유적’도 중요한 우리 문화재 중 하나입니다. 

<인서트2/ 김천수 용산문화원 향토연구원>
“기우제를 지냈던 단이, 이렇게 돌조각들이 남아 있어요. 종묘사직 다음으로 국가의례를 빈번히 거행했던 장소였고요.”

이와 함께 일제 조선주둔군사령부와 쌀 10만 가마에 이르는 돈으로 지은 ‘용산 아방궁’ 총독관저 터도 살펴 볼만한 곳입니다.

백년의 기다림 끝에 만나게 될 용산의 우리 문화재들, 미군 기지가 떠난 자리에 들어설 용산 생태공원에 거는 기대가 커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BBS 뉴스 박준상입니다.

영상 취재- 남창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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