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은 5백년 전 과학혁명을 통해서라고 평가된다. 수천 년 지배하던 신본주의는 폐기되고 인본주의가 확립됐다.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 내지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연결’의 원동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하는 인식에 따라 인간은 능동적 주체로 등극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연결’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는 오늘날 위기에 직면했다. 인간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님이 드러났다. 개인은 더 이상 분할 불가능한 유기체가 아니며, 단일한 자아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음이 드러났다. 인간의 몸은 세포수보다 더 많은 수 백조개의 세균들에게 하나의 환경이며, 수많은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는 복합체다. 세균의 활동에 영향을 받는 의식과 감정은 인간의 순수한 의지 내지 자유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우리는 ‘연결’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어느 정도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연결을 하고 싶으면 연결하고 원치 않으면 잠시 끊을 수도 있었다. 신선 같은 무위한도인도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인공지능 따위의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연결의 시대’에 연결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연결이 끊기면 죽음을 의미하는 시대가 된다. 따라서 네트워크를 지배하는 소수의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이 네트워크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온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인간은 더 이상 ‘이야기하는 자아’가 꾸며내는 이야기들의 지시를 따르는 자율적 실체들이 아니라, 거대한 전지구적 네트워크의 필수불가결한 일부가 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지금까지는 생생한 경험을 논리적이고 일관된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이야기하는 자아’를 우리 자신과 동일시해 왔지만, 이러한 ‘이야기하는 자아’가 용도 폐기될 운명이라는 것. 즉 자신보다 더 자신을 잘 아는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비인간 알고리즘들이 새로운 주권자로 등극할 것이라는 무서운 전망이다.

연결의 시대에 인간이 얼마나 주체성을 확보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 스스로 주체 의식을 포기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아무리 수동적인 반응을 강요당할지라도 그러한 반응의 주체가 자기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결정권 내지는 자아감을 느끼는 수준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지금도 낮은 자아감으로 인해 심리적인 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은데, 연결의 시대에는 자아감을 더 많이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연기(緣起)와 무아(無我)가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연기란 일체가 두루 연결돼 있고 상호 의존해서 존재함을 뜻하며, 무아란 자아라는 것이 본래 없는 것이어서 잃어버릴 것도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연기와 무아는 자아 내지 주체가 한 가지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서 그때그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우리는 한 쪽에서 자아감을 잃기도 하지만 다른 쪽에서 자아감을 찾기도 하며 다양한 자아감을 경험한다.

연기와 무아의 자각은 연결과 비연결의 조화 가능성을 제시한다. 연결을 무시한 자아는 강한 자아의식에 휩싸여 자칫 적대적인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장을 연출하기 쉬운 반면, 연결에만 의존하려는 자아는 독립성을 놓친 허약한 자아의식에 머물 수 있다. 연결과 비연결을 중도(中道)로써 자각한 자아는 그때그때 다양한 역할을 자임해 단일한 주체성을 고집하지 않으면서도 순간순간의 주체성을 잃지 않아 조화로운 관계의 장을 살아간다.

선불교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역시 가능성을 제시한다. 언제 어디서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만의 영역에 매달리는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개방된 영역에서 살아가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주체성을 말한다. 그러한 주인됨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한 번쯤은 과감하게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출가(出家)다. ‘따라하기’식 사유가 아닌 주체적인 사유로써만 연결의 진실에 깊이 눈뜰 수 있다.

김봉래(불교사회인의 책임 실천운동 TF팀장 겸 기획위원)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