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가 또다시 불행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고집스럽게 핵,미사일 실험을 해대던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은 결국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어 세상에 알렸습니다. 인내심이 그리 강하지 않은 듯한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군사 옵션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북한 문제를 대화와 협상으로 풀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는 ‘평화’라는 궁극의 궤도에 닿기 힘들어 보입니다. 트럼프와 만난 뒤 ‘대화의 주도권’을 인정받았다고 한 문 대통령 발언 사흘만에 미국을 향해 임팩트있는 존재감을 과시한 김정은의 머리 속에 대한민국은 대화 상대가 아닌 듯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중국 최고지도자의 발언이 한반도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더욱 짙게 하고 있습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G20 정상회의 직전 한중 정상회담에서 ‘북·중 혈맹(血盟)’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문 대통령이 북핵 해결에 더 나서달라고 하자 거부감을 보이며 한 말인데요. 물론 대한민국과 미국의 경우처럼 북한과 중국이 한국전쟁 후 꾸준히 혈맹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 것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이 취임 후 북한과의 ‘혈맹 관계’를 드러내놓고 말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서방사회가 ‘감내하기 힘든 초강력 대북 제재안’이냐 ‘군사적 조치’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미묘한 상황이어서 더욱 심상치않는 메시지가 되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구축되려고 하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를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되지는 않을지 우려됩니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중국은 늘 결정적인 순간에 ‘키맨’ 역할을 해왔습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참가합니다. 이듬해 1월까지 세 번의 교전을 치르며 38선 부근까지 밀고 내려와 전쟁의 국면을 바꿔버립니다. 그해 5월 27일부터 중국은 8개 군이 전면적인 공세로 다섯차례의 교전을 모두 승리하면서 결국 미국이 ‘정전 협정’을 모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맙니다. 60여년 전 중국의 존재는 이렇듯 대한민국에게는 한반도 통일의 흐름을 앗아갔고, 미국한테는 역사상 최초의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란 오명을 남겼습니다. 반면 중국 그들은 정부 수립 1년만에 동방에 새롭게 등장한 강국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아편전쟁 이후 100년간 세계 열강들로부터 받았던 굴욕을 한국전쟁이 한 순간에 씻어준 셈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말 미국을 방문해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헌화하면서 “한미 동맹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로 맺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는 압록강을 건너온 중국군의 진격을 2주간 지연시켰고 그것은 결국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로 손꼽히는 흥남철수 작전을 가능케 만들었습니다. 피로 맺어진 한미 동맹을 상징하는 그 현장에서 흥남 철수로 월남한 피난민의 아들 문 대통령에게 ‘혈맹’이 갖는 의미는 사무치게 다가왔을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중국 최고지도자와 만났을 때는 국제 외교의 냉혹함과 함께 중국과 북한관계의 순도(純度)를 실감했을 테지요. 1950년 신생국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은 역사적 순간에서 주권수호의 유일한 선택이라며 100만 명의 군인을 한국으로 보냈고, 그들 가운데 15만 명이 전사, 80만 명이 다쳤습니다. 우리와 미국 처럼 북중 관계가 '포화 속에서 피로 맺어진 동맹‘임은 외면할 수 없는 실존(實存)입니다. 대한민국의 존망과 직결되는 한반도 비핵화 문제 뿐 아니라 사드 배치, 중국과의 경제 협력 등을 대하는 현실 인식이 보다 더 냉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이현구 정치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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