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 박은식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

*방송: 춘천BBS <아침세상 강원>
*앵커: 박경수 부장
*출연: 권혁진 소장 (강원한문고전연구소)
*방송시간: 2017년 6월 1일(목) 8:30 ~ 8:55
*방송주파수: 춘천 FM 100.1 MHz, 속초 93.5 MHz, 강릉 104.3 MHz

 

*박경수 앵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는데요, 과거사를 짚어보며 미래를 생각해보는 목요일입니다. 강원한문고전연구소 권혁진 소장 오늘도 함께 합니다. 권혁진 소장님 안녕하세요?

▶권혁진 소장:

네 안녕하세요

 

*박경수 앵커:

이제 6월입니다. 뜨거웠던 5월을 보냈어요. 그런데 오늘이 ‘의병의 날’이더라구요. 어떻게 ‘의병의 날’로 지정된거죠?

▶권혁진 소장:

의병의 날은 의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의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기념일로, 2011년 6월 1일에 제정되었습니다. 형식적으로 기념식만 치를 것이 아니라,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하루가 되어야할 것 입니다.

 

*박경수 앵커:

그렇군요. 소장님 방송에서 다 다뤘습니다만 기억에 남는 의병장들을 다시 한 번 소개해주시는 거 어떨까요? 오늘이 ‘의병의 날’이니까요....

▶권혁진 소장:

춘천은 의병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고장입니다. 의암 류인석 선생은 의병 대통령으로 불릴 만큼 대단한 활약을 하셨고, 습재 이소응 선생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이밖에 여러 분들이 계시지만 저는 의병의 날을 맞아 이름 없는 춘천의 을미의병 천여 분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이소응 선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봉의산 정상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 후, 석파령을 넘어 서울로 진격하던 이름 없는 의병들이 오늘의 주인공이라 생각합니다.

 

춘천의병이 넘던 석파령을 가리키는 권혁진 소장

*박경수 앵커:

저는 석파령을 다시 넘어오지 못한 춘천의병들이 생각납니다. ‘춘천의병 아리랑’도 떠오르구요. '의병의 날' 청취자들에게 메시지를 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권혁진 소장: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 스스로가 일어나 조직한 자위군을 의병이라고 합니다.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 선생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 정수)요 국성(國性; 성품)이다.”라고 하면서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중요한 것은 의병이 생기지 않도록 똑바로 정치를 하는데 있습니다. 의병의 날을 맞이하여 특히 위정자들은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박경수 앵커: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이 하신 말씀이군요. 제가 조금 백암 박은식 선생에 대해서 얘기를 드리면요, ‘민족 혼’을 강조하면서 한국통사를 저술한 분이죠.  하지만 역사학자 이전에 치열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도 아셔야겠네요.

그러니까 결국 촛불을 든 국민들이 의병이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권혁진 소장:

그렇죠. 현대판 의병이라고 봐야죠.

 

의암동상 앞에 선 박경수 앵커

*박경수 앵커:

이 얘기는 좀 해야할 것 같애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이 담겨있는 아픈 역사가 떠오릅니다. ‘평화의 소녀상’얘기인데요. 전국 곳곳에 세워지고 있는데. 강원도에는 춘천에만 없어요. 지난해 추진되다가 중단됐는데, 다시 추진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세요?

▶권혁진 소장:

평화의 소녀상에서 잘린 머리카락은 부모와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단절되었다는 것을 상징하고, 어깨에 있는 새는 세상을 뜬 할머니들과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는 매개체이며, 꼭 쥔 손은 일본 정부의 작태에 대한 분노이며, 나비는 환생•희망•자유•평화의 의미라고 합니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은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의 문제 해결이 1차적이지만, 아울러 평화의 상징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평화의 소녀상이 전쟁을 반대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평화의 밑거름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평화의 소녀상 추진은 늦은 감이 있지만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박경수 앵커:

제가 취재차 원주에도 가봤는데요. 원주에는 조례까지 제정돼서 ‘평화의 소녀상’이 공공조형물로 보호받고있더라구요. 그런데 저도 취재도중에 알게 됐는데,‘평화의 소녀상’을 조각한 분이 춘천 분이더라구요?

▶권혁진 소장:

소녀상은 부부인 김운성, 김서경 작가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했습니다. 두 작가는 국내외에 있는 소녀상 50여 개를 제작했다고 하는데, 첫 번째 소녀상은 2011년 12월 14일에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됐습니다. 김운성 작가는 홍천에서 태어나, 3살 때 춘천으로 이사 왔고, 부모님은 현재도 춘천에 계신다고 합니다. 의병 정신의 맥이 김운성 작가에게도 이어져서 평화의 소녀상을 창작하는데 이른 것 같습니다.

 

*박경수 앵커:

알겠습니다. 아무쪼록 시민 모두가 함께 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됐으면 좋겠네요. 오늘도 다산 정약용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도록 할텐데, 먼저 태어나신 곳 얘기 좀 해주세요. 마재라고 하죠?

▶권혁진 소장:

다산 선생 고향 마을 입구에 있는 고개를 마재라고 하는데, 다산 선생의 고향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행정구역 명칭으로 능내리입니다. 집 주위에 ‘소내’라는 개울 이름이 고향을 의미하기도 하고, 집 앞을 흐르는 한강을 ‘열수(洌水)’라고 부르는데, 열수도 고향의 다른 이름입니다. 다산은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린다면 양수리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 다산 선생의 고향입니다.

 

*박경수 앵커:

다산 집안이 우리 근대사에서 시대적 희생을 겪은 거는 지난 시간에 얘기를 해주셨습니다만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정리를 해볼까요?

▶권혁진 소장:

다산 선생은 28세에 과거에 합격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는데,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천주교 서적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일 때문에 40세에 하옥되었습니다. 이 때 형 약전(若銓), 약종(若鍾)과 함께 체포되었고 약종은 죽게 됩니다. 처음엔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 갔다가, 그 해 11월에 다산 선생은 강진으로, 형은 흑산도로 기약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형은 흑산도에서 세상을 떴고, 다산 선생은 57세인 1818년에 18년 만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박경수 앵커:

소장님이 지난해 ‘다산길 탐사’를 통해 걸었던 곳이 다산이 춘천을 오던 길이었잖아요. 1구간부터 다시 한 번 짚어볼텐데, 그 얘기는 다음주부터 하구요.

그런데, ‘다산길 탐사’에 대한 기록으로 “다산을 따라 걷다”는 책을 보니까요. 그 책의 모두에 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의 글이 실려있더군요. 어떻게 글을 싣게됐나요?

▶권혁진 소장:

작년에 다산길 탐사를 북한강생명포럼하고 진행했습니다. 북한강생명포럼 대표이신 이헌수 대표가 한강생명포럼에 활동하시는 우원식 의원과 활동을 같이 하셔서 글을 싣게 된 것 같습니다. 우원식 의원이 원내대표가 되셨으니 다산길이 더 많이 알려질 것 같습니다.    

 

*박경수 앵커:     

알겠습니다. 목요일에 만나는 ‘역사와 시사’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권혁진 소장:

감사합니다

 

*박경수 앵커:

강원한문고전연구소 권혁진 소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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