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BBS <아침세상 강원> 춘천의 촛불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확신

*방송: 춘천BBS <아침세상 강원>
*앵커: 박경수 부장
*출연: 권혁진 소장 (강원한문고전연구소)
*방송시간: 2017년 5월 11일(목) 8:30 ~ 8:55
*방송주파수: 춘천 FM 100.1 MHz, 속초 93.5 MHz, 강릉 104.3 MHz

 

[다음은 방송 전문입니다]

 

*박경수 앵커:

촛불혁명과 함께 시작된 목요 답사 코너가 정권교체와 함께 정점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오늘도 강원한문고전연구소 권혁진 소장과 함께 합니다. 권혁진 소장님 안녕하세요

▶권혁진 소장:

네 안녕하세요

 

의암 유인석 동상 표지석을 읽고 있는 권혁진 소장(2016년 11월)

*박경수 앵커:

아직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지요. 대선 개표를 줄곧 지켜보신 분들의 한결같은 마음일텐데요. 소장님은 이번 대선,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권혁진 소장:

대선만 볼 것이 아니라, 작년 말부터의 일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평가해야만 합니다. 저는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말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라는 뜻으로, 임금을 백성이 세울 뿐만 아니라,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끌어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래된 책에서가 아니라 몸소 촛불을 들고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대선 기간 중에서도 색깔론과 지역주의, 네거티브 등에도 별로 흔들리지 않았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경험이 우리나라 정치 발전으로 연결되길 기원합니다.

 

*박경수 앵커:

사실 목요 답사 코너가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국민적 분노와 함께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데, 강원도를 대표하는 독립 운동가들을 짚어보고 그 현장을 직접 가봤던 게 제게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게 기억나세요?

▶권혁진 소장: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국민적 분노는 불의(不義)에 대한 분노이고, 정의와 공정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찾았던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습재 이소응 선생 생가터, 중암 김평묵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용담서사터, 춘천고등학교의 상록탑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습재 이소응 공적비를 읽는 박경수 앵커(2017년 1월)

*박경수 앵커:

저는 강원도의 역사를 짚어가면서 춘천의 촛불이 커졌다는데 뿌듯함을 느낍니다. 실제 어떤 연관이 있었을까요?

▶권혁진 소장:

자화자찬인 것 같습니다만, 저희 “아침세상 강원” 프로그램이 춘천의 촛불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확신합니다. 애청자들께서는 불의에 항거한 선인들의 실천이 계속 이어져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게 되면서, 더 열심히 촛불을 들었다는 말을 해주시기도 했습니다. 시대의 아픔에 눈감지 않고 동참하고 소통하는 “아침세상 강원”은 방송이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박경수 앵커:

소장님과의 첫 방송은 11월 첫 주에 ‘다산길 탐사’로 시작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춘천에 왔던 길을 되짚어보면서 소장님과의 인연도 깊어지게 됐는데요. 올해도 ‘다산길 탐사’는 계속 하시나요?

▶권혁진 소장:

작년이 다산 선생의 글을 조사하고 현장을 답사한 기간이었다면, 올해는 다산 선생이 걸었던 길에 의미를 부여해서 일반 사람들이 함께 걸으며, 다산 선생이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조사하고 걸었던 길을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책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국사봉에 오른 박경수 앵커와 권혁진 소장(2016년 12월)

*박경수 앵커:

제가 지난 연휴기간 동안 책을 한권 읽었는데요. 김훈 선생의 흑산이라는 소설입니다.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전 선생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이예요. 정약전이 다산 정약용의 둘째형이 되는데, 다산 집안이 시대에 앞서가면서 혹독한 시련을 거쳤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다시 한 번 다산 정약용의 시련을 짧게 얘기를 해주세요.

▶권혁진 소장:

다산 선생은 28세에 과거에 합격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는데,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천주교 서적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일 때문에 40세에 하옥되었습니다. 이 때 형 약전(若銓), 약종(若鍾)과 함께 체포되었고 약종은 죽게 됩니다. 처음엔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 갔다가, 그 해 11월에 다산 선생은 강진으로, 형은 흑산도로 기약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형은 흑산도에서 세상을 떴고, 다산 선생은 57세인 1818년에 18년 만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박경수 앵커:

강진에서 18년간 유배를 당했지만 거기서 뛰어난 저술들을 남기게 되는 거잖아요?

▶권혁진 소장:

유배 18년 동안 경전 및 사서 등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 30권이었습니다.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본래의 의미를 많이 얻었다고 자평할 정도였습니다. 이밖에 시문(詩文) 70권,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과, 의약(醫藥) 등을 편찬한 것이 거의 2백 권이 됩니다.

 

*박경수 앵커:

다산 정약용이 지금 우리 시대를 지켜봤다면 어떤 얘기를 해줄까요?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권혁진 소장:

‘원목(原牧)’이란 글에서 다산 선생은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라고 묻곤 ‘목민관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목민관을 대통령으로 바꿔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 더 든다면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늘 이 시대와 국민들의 삶을 내 상처처럼 느끼시길 부탁드립니다.

 

*박경수 앵커:

다산 선생의 철학이 담긴 어록인 동시에 소장님의 메시지같이 느껴지는군요. 오늘은 촛불혁명과 대선 그리고 다산 정약용을 주제로 얘기 나눠봤습니다. 소장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권혁진 소장:

 네 고맙습니다

*박경수 앵커:

강원한문고전연구소 권혁진 소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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