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현직 방송 기자로서 스피치 전문 학원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방송 리포팅 능력의 부족함을 채워보겠다는 것이 사설학원 등록의 ‘공식적’ 이유였습니다. ‘비공식적’ 목적은 대중 앞에만 서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고질적 ‘발표 불안’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3개월 코스 학원비 80만원이 꽤나 비싸다고 느꼈던 그 학원에서 중점적으로 배운 부분은 대중 연설과 토론 기법이었는데, 당시 강사가 유난히 강조했던 용어가 ‘메라비언의 법칙’이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심리학과 명예교수인 앨버트 메라비언이 발표한 이론은 상대방에 대한 호감을 결정할 때 목소리가 38%, 보디랭귀지가 55%의 영향을 미치는 반면, 말의 내용은 겨우 7%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학원은 언어적 요소보다 비언어적 요소가 상대방에게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 이론을 철저히 적용했습니다. 실습 교육은 말 솜씨와 논리적 전개보다 목소리 톤과 음색, 연단에서의 시선, 손짓, 자세 교정 등에 주안점을 두고 진행됐습니다. “스피치를 좌우하는 것은 실상은 목소리야!”라며 목소리를 높였던 강사의 말이 다시 귓가를 맴도는 듯 합니다.

  ‘메라비언의 법칙’을 오랜만에 떠올린 것은 요즘 대선 국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목소리 때문입니다. 가늘고 나긋나긋한 그의 목소리에 익숙한 국민들은 지난달 경선 현장 연설에서 갑자기 나온 변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복식 호흡을 활용한 중저음의 굵직한 ‘소몰이식’ 발성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낳았고, 대중 정치인으로 진화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급격한 지지율 상승세의 요인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의 연설 목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비호감’으로 전락한 듯 합니다. 처음에는 ‘신선함’으로 비쳤지만 인위적으로 변조한 어색한 목소리를 시간이 지나도 몸에 맞추지 못하면서 부정적인 ‘아마추어 스타일’로 굳어졌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작 TV 토론에서는 안 후보의 ‘강한 모습’을 좀처럼 찾을 수 없으니 국민들은 괴리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원래의 얇고 중성적인 목소리로 "제가 갑철수입니까? MB 아바타입니까?"라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토론에서의 안철수와 목을 긁고 말 끝을 길게 빼면서 “문재인이 두려워하는 후보가 누굽니까~~”라고 외치는 연설 현장의 안철수가 교차하면서 '순수한 청년 같은' 이미지는 일단 떠나버렸습니다. ‘강철수’로의 이미지 변신을 위해 시도한 섣부른 목소리 변신이 안철수의 가장 큰 무기인 ‘정직함’에 상처를 낸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19대 대선 레이스에서 줄곧 큰 관심을 끌었던 다섯 차례의 TV 토론이 지나갔고 이제 단 한 번을 남겨뒀습니다. 토론 일정이 끝나가지만 매번 전문가들로부터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던 ‘토론의 고수’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지지율은 끝내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여러차례 상대 후보들에게 고압적이고 불성실한 답변 태도를 보여서 논란이 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은 토론 기간 2등과의 격차를 더욱 벌렸습니다. 날선 공방 과정을 위트와 유머로 넘기며 ‘트럼프식 리더십’을 차용하고 있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최근들어 조금 상승세를 탔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어 보입니다. 심상정 진보당 후보는 뛰어난 언변과 해박한 논리로 토론회를 거칠때마다 지지율이 오르지만 그가 하위권을 벗어날 것으로 보는 유권자는 거의 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대선후보 TV 토론회야말로 목소리가 38%, 보디 랭귀지가 55%의 영향을 미치고 말의 내용은 겨우 7%만 작용한다는 ‘메라비언의 법칙’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무대가 아닌가 합니다. TV 토론을 지켜보는 우리는 후보들이 쏟아내는 말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지만 혹여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그들의 목소리에서 호불호를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누구라도 타고난 목소리가 호감을 주는 인물 보다는 훌륭한 식견과 품성, 리더십을 갖춘 인물을 대통령감으로 생각해야겠지만요./이현구 정치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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