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古典)은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만한 가치를 지녀...권혁진 소장

*방송: 춘천BBS <아침세상 강원>
*앵커: 박경수 부장
*출연: 권혁진 소장 (강원한문고전연구소)
*방송시간: 2017년 3월 23일(목) 8:30 ~ 8:55
*방송주파수: 춘천 FM 100.1 MHz, 속초 93.5 MHz, 강릉 104.3 MHz

 

[다음은 방송 전문입니다]

 

도로에서 바라본 문암

*박경수 앵커:

목요일에는 강원도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의 숨결을 따라가보지요. 강원한문고전연구소 권혁진 소장과 함께 합니다. 권혁진 소장님 안녕하세요

▶권혁진 소장:

네 안녕하세요

 

*박경수 앵커:      

지난주에는 서울과 춘천을 잇는 물길, 만남과 헤어짐의 공간...신연나루의 역사를 짚어봤습니다. 저는 같은 자연 공간을 접하면서도 이렇게 다르게 바라볼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다산 정약용과 매월당 김시습의 시에서 말이죠. 소장님은 어떠셨어요?

▶권혁진 소장:

탄핵에 대해서 국민 대부분은 잘 한 것이라고 하지만, 반대 입장인 사람도 있잖아요. 동일한 것을 보면서도 느낌과 생각이 다 다른 것 같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형을 모시고 춘천으로 오는 도중에 신연나루를 지나며 시를 지었습니다. 평소 춘천을 구경하고 싶었었는데, 소원을 이루게 되었기 때문에 반가웠을 것입니다. 매월당 선생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늘 괴로워했는데, 신연나루를 보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더 외로워진 것 같습니다.

 

*박경수 앵커:

저는 두 분의 시를 접하고 나서, 그래도 매월당쪽에 마음이 끌리더라구요.

▶권혁진 소장:

아무래도 세조의 쿠데타에 반기를 들고 전국을 떠돌았던 매월당이잖아요. 아무래도 시대의 아픔에 앵커님이 공감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박경수 앵커:

그렇군요. 그리고 방송을 들은 분들이 얘기하시는게 한비자에 나오는 ‘법불아귀’라는 말 있잖아요. 헌법재판소의 탄핵을 얘기하시면서 그게 인상적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법불아귀’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시죠.

▶권혁진 소장:

한비자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법은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법은 공평해야한다는 말이 나온 것 같은데요. ‘법불아귀(法不阿貴)’는 ‘법은 신분이 귀한 사람에게 아부하지 않는다’란 뜻입니다. 법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객관적이고 공정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인데, 요즘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많이 쓰이지 않습니까. 다시는 이런 말이 쓰이지 않는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박경수 앵커:

그런 날을 기대하구요. 저는 소장님 얘기를 들으면서 특히 고전의 중요성을 많이 느끼는데요. 소장님은 법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고전에서 법의 정신을 그대로 표현하시네요. 그래서 인문학, 고전이 중요한거겠죠?

▶권혁진 소장: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을 고전이라고 합니다. 선인들은 그 안에 자신의 생각과 삶을 고스란히 담아 놓았습니다. 때론 갈등하고 고민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입니다. 우리는 그 글을 읽으면서 지혜를 배우고, 새로운 길을 찾습니다. 이것이 고전의 힘인 것 같습니다.

 

*박경수 앵커:

저도 역사학을 전공했는데요. 최근 역사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커지는 것을 보면 뿌듯합니다.(웃음)

▶권혁진 소장:

다산 정약용 선생도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준 편지를 보면, 시를 지을 때 역사적 사실을 인용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골 선비의 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우리 역사의 인용을 중시하면서 중국 역사를 인용하는 것은 볼품없는 것이라고 폄하하실 정도로 우리의 역사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의암호에서 바라본 문암

*박경수 앵커:

그랬군요. 우리가 서울과 춘천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석파령과 신연나루를 짚어봤구요. 오늘은 춘천의 대문이라고 불리는 ‘문암’에 대해서 알아보죠. ‘문암’에 대한 얘기를 좀 해주세요

▶권혁진 소장:

문암(門巖)은 의암댐 옆 인어상 부근에 솟아있는 바위를 가리킵니다. 『수춘지』는 “오른쪽에 삼악산이 있고, 왼쪽에 문암이 있는데 춘천의 목구멍과 같이 중요한 곳이며, 서울로 통하는 국도가 있다. 뛰어난 경치여서 소금강(小金剛)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육로의 관문이 신연나루와 석파령이라면 수로의 관문이 문암이었습니다.

 

*박경수 앵커:

근데 저는 형님이 군에 계실 때 춘천에 왔던 기억이 있는데요. 춘천을 올 때 군 검문소를 지났습니다. 약간 무섭기도 하고 그랬는데(웃음).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문암’ 검문소 같애요?

▶권혁진 소장:

예전에 전국 어디를 가나 검문검색이 심했는데, 문암이 춘천의 관문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곳에 검문소가 있었고, 검문이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서울로 가는 길은 이곳을 통해야했는데, 저도 서울을 갈 때마다 검문을 당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박경수 앵커:

저는 당시 눈이 보이지않던 헌병의 모습이 떠오릅니다.(웃음) 권위주의 시대때 얘기입니다.

▶권혁진 소장:

그렇죠. 다들 공감하실 것 같애요.

 

*박경수 앵커:

2백 년 전쯤에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 문암에서 시를 한 수 지으셨다고 하는데, 소개를 좀 해주세요.

▶권혁진 소장:

다산 선생은 문암을 석문(石門)이라고 표기했는데, 돌로 이루어진 대문이니 같은 의미입니다. 다산 선생은 이곳에서 역사를 떠올리며 시를 지었습니다.

작기는 하지만 옛날에는 나라였고 / 蕞爾曾亦國

하늘이 만든 특별한 지형인데 / 天作有殊狀

석문(石門)은 더욱 기괴하여 / 石門復奇譎

어부는 밤이면 늘 곁에서 / 漁人常夜傍

흥망성쇠의 자취를 생각하니 / 緬思興廢跡

천 년 지났으나 비통해지네 / 千載動哀愴

삼악산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에게 패한 춘천의 역사를 생각하며 지은 시입니다.(註:한나라 광무제 때 낙랑의 우두머리인 왕조는 왕준(王遵)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최리는 고구려로부터 침범 당해 살해되었으며, 낙랑의 여자들은 나가서 항복하였다고 정약용 스스로 시 말미에 밝히고 있다.)

 

문암

*박경수 앵커:

의암댐과 함께 의암호가 만들어지면서 춘천이 호반의 도시가 된게 아닌가 싶은데요. 의암호를 걷다보면 명소가 나온다고 하더라구요. ‘봉황대’얘기입니다. 어딘가요?

▶권혁진 소장:

춘천의 걷는 길 코스 중에 ‘의암호 나들길’이 있습니다. 서면 금산리부터 시작해서 공지천을 거쳐 송암동까지의 코스입니다. 그 코스 안에 봉황대가 있는데, 지금의 삼천동 배터 뒤쪽에 솟은 봉우리를 가리킵니다.

 

*박경수 앵커:

이제 봄길을 걸을 때가 됐는데, 봉황대가 춘천의 대표적인 명소군요. 역사에도 빠지지 않고 늘 기록돼 있다구요?

▶권혁진 소장:

조선시대 한 고을의 연혁, 지리, 인물, 문화, 풍속 따위를 기록한 책을 ‘읍지(邑誌)’라고 하는데, 최초의 읍지인 『춘주지』에 봉황대가 실린 이후 춘천을 소개하는 읍지에 꼭 들어갈 정도로 춘천의 명소입니다.

 

*박경수 앵커:

그런데 봉황대라는 이름이 왜 지어졌을지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봉황은 태평성대에만 나타난다는 신성한 새잖아요. 춘천이 어떤 이상향이었을까요?

▶권혁진 소장:

봉황은 동양문화권에서 신성시했던 상상의 새로 기린·거북·용과 함께 신령스런 동물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봉황은 살아 있는 벌레를 먹지 않으며, 살아있는 풀을 뜯지 않고, 무리 지어 머물지 않으며, 난잡하게 날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봉황은 정치가 공평하고 어질며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나타난다고 하여, 성군(聖君)의 덕치(德治)를 증명하는 징조로 여겼습니다.

아마도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박경수 앵커:

그렇군요. 이항복이나 신흠이 어려운 정치현실을 개탄했던 곳이 역설적으로 ‘봉황대’였네요. 지금의 정치상황을 생각하면 ‘봉황대’에 저도 갔다 와야겠네요. (웃음)  소장님 시간 관계상 다음주에 얘기를 좀 더 듣도록 하지요. 오늘 얘기 잘 들었습니다.

▶권혁진 소장:

감사합니다.

 

*박경수 앵커:

강원한문고전연구소 권혁진 소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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