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는 한적한 어촌마을이다. 지난 18일 이곳을 방문하니, 공기는 맑고 하늘은 선명했다. 하늘보다도 짙은 쪽빛 바다 위로는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햇볕은 따뜻한데, 바닷바람은 시원했고, 인적이 드문 한적함에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묻어났다. 해변에서 불과 100m 거리에 위치한 두 개의 큰 콘크리트 기둥을 만나기 전까지 그러하였다.

두 개의 큰 콘크리트 구조물은 바로 일본 조세이 탄광 사고 현장이다.

1942년 2월 3일 이른 아침, 석탄을 캐러 해저탄광에 들어갔던 183명이 갱도가 붕괴 돼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을씨년스러운 기둥은 183명이 숨을 술 수 있게 해주던 ‘피아’라 불리는 환기구로, 이들의 죽음을 제일 먼저 알리는 통로이기도 했다. 수몰사고가 일어나자 피아에서는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고 한다.

이를 보고 광부의 아내와 아이들이 뛰쳐나와 남편과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 돌아 온 이는 단 2명 이었다. 피아에서 물기둥이 줄어들수록 울부짖음은 오열로 바뀌었고, 일부는 실신을 했다고 한다. 물기둥은 3일간 솟구쳐 올랐지만 일본정부와 회사는 갱도 입구를 널빤지로 봉쇄하고 유가족의 접근만을 막았다고 하다.

사실상의 생매장인데, 어쩌면 사고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 이곳 탄광은 이전부터 잦은 사고가 일어나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러나 전쟁물자 조달에 혈안이 되 있던 일본정부와 이에 부합한 회사는 바다 밑으로 거미줄처럼 갱도를 넓혀갔다. 당시 조선인 징용자들은 늘 죽음을 예감하며 갱도로 들어가 반라 상태로 하루 12시간씩 석탄을 캤다고 한다. 해저갱도의 특성상 무덥고 비좁았으며, 석탄을 캐고 있으면 갱도 위로 지나가는 배의 모터소리가 들렸다고 하니, 애초에 안전기준은 없었다. 당연히 사고예방과 대책도 전무했던 셈이다.

희생자 183명 중 조선인은 136명이었다. 당시 인근에는 59개의 탄광이 있었는데, 열악한 작업 환경 탓에 일본인 광부의 지원은 저조했다고 한다. 빈자리는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로 채워졌다. 그래서 탄광 이름도 조선인들이 많이 일하는 ‘조선탄광’ 이라 불리다 조세이 탄광이 되었다고 한다. 해저로 10여 km나 뻗어나간 갱도에 조선인 광부들이 대거 투입되면서 석탄생산량은 급격히 늘어났지만, 그럴수록 광부들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사고 이후에도 채굴사업을 계속되다, 패전과 함께 탄광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일본정부는 183명이 생매장 된 조세이 탄광 사고를 철저히 은폐했다.

역사에 묻혔던 조세이 탄광 사고는 우베 여고 역사 선생이었던 야마구치 다케노부가 1976년 관련 논문을 쓰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조사연구가 지속돼 1991년 시민모임인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 결성됐다. 모임은 사고 연구 조사와 함께, 희생자 유가족들을 찾아냈고 이는 유족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모임은 또 18년 동안 회비와 기부금을 모아, 3,000만 엔을 들여 추모공원을 만들고, 환기구 피아를 본 따 2013년 2월에 추모비를 만들어 제막했다.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유족회 김형수 회장에 의하면 추모공원과 추모비 조성이 알려지자 지역 유지인 탄광 소유주 후손들이 땅을 팔지 않아 추모공간 마련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한때 일본정부가 환기구 철거를 시도하다 모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물러섰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추모비가 건립되고 1993년부터 일본 시민모임의 초청으로 유가족들이 사고현장을 찾아 추모행사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40대 후반이었던 유가족 들은 이제 일흔 살이 되었고, 일부 유족들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고현장 인근에 공항이 없어, 유가족 들은 20여년 넘게 매년 부산에서 시모노세키 까지 배를 타고 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서 이러한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현장을 방문해 추모행사를 봉행했고, 올해는 종단협 소속인 관음종이 대규모 방문단을 이끌고 현장을 찾아 바다 밑에 잠든 넋들을 위로했다. 유족들과 일본 시민단체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은 유골발굴이다. 일본정부는 미국과 공동으로 전쟁희생자들의 유골 발굴 작업을 본격화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제외돼 있다고 성토하고 있다.

일본 시민모임의 이노우에 요우코 공동대표는 “정치정세는 어느 나라나 유동적이지만 생명, 인권, 평화의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면 정당이나 단체의 차이를 넘어서 큰 방향으로 ‘ALL 조세이’를 한국과 일본에서 만들어 나가자”고 촉구했다.

위령대재 취재를 마치고 다시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탔다. 좁은 메트리스를 깔고 12명이 다닥다닥 붙여서 한방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공용 방이다 보니, 모두가 불편함을 감내하며, 비행기를 타면 1시간 이면 올 거리를 11시간을 걸려서 출렁이는 파도를 뚫고 와야만 했다. 밤새 흔들리는 배에 멀미는 갈수록 심해졌지만, 비몽사몽 얕은 잠 속에서 자꾸만 사고 현장에서 본 조세이 탄광 환기구, 피아가 떠올랐다. 나처럼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생각하니 긴 여행시간도, 멀미도, 공동생활의 불편함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피아 밑에는 183명이 75년 째 차디찬 바다 감옥에 갇혀 있다. 일본정부의 미지근한 대응과 한국정부의 방치 속에 살아생전 그들의 숨구멍 이었던 피아만이 이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마지막 끈이자 희망으로 우베이 앞 바다를 지키고 있다.

잔잔한 바다 밑 역사의 진실이 피아를 통해 다시 수면위로 솟구칠 그날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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