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인호 작가의 불교소설 <길없는 길>에는 거짓말을 모르는 ‘천진불’ 혜월스님의 행적이 나옵니다. 일제시대 부산 선암사에 머물던 혜월스님은 새벽에 물건을 사러 시내로 나간 절집 일꾼이 절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던 과부와 벌거벗은채 방안에 나란히 누워있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기겁을 한 일꾼이 엉겁결에 거짓말을 합니다. “장을 보러가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이 집에 들렀고, 너무 아파 꼼짝할 수 없어서 벌거벗고 누워있는 겁니다” 과부댁도 같은 거짓말로 둘러댑니다. “저도 배가 아파 누워있는 겁니다. 큰스님” 그러자 스님은 헐레벌떡 선암사로 돌아가 공양주에게 이릅니다. “빨리 흰죽을 쑤라구” 직접 죽을 그릇에 담아 다시 산길을 내려가던 스님은 올라오는 그 일꾼과 마주칩니다. 아픈 기색없는 일꾼에게 스님은 “자네 배는 다 나았나? 과부댁은 어떤가? 흰죽을 쑤어 왔으니 여기서라도 훌훌 마셔두게” 혜월스님을 속인 그 일꾼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한 뒤 출가했습니다.

 한국 문학계의 거장으로 불렸던 작가는 이 에피소드에 신문 칼럼과 흡사한 형태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덧붙입니다. “마약 중독보다 거짓말의 중독이 더 심각한 분열을 초래한다. 약물의 중독은 한 개인에게 그치지만 거짓말의 중독은 온 사회의 불신을 초래한다. 오늘날 이 사회의 고질적인 혼란과 서로를 믿지 않는 불신의 원인은 특히 배운자, 똑똑한자, 가진자들의 거짓말 때문이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이 유쾌한 유머를 잘하는 사람, 머리 회전이 빠른 재치있는 사람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거짓말의 중독에서 해방되는 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뿐이다. 알콜 중독에서 해방되는 길이 알콜을 끊는 일인 것처럼”

 가톨릭 신자면서도 불교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탐색했던 고 최인호 작가가 걱정한 ‘거짓말 중독’은 지금의 대한민국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 소추안 국회 가결이란 헌정사의 비극을 부른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에는 그야말로 온갖 거짓말이 버무려져 때문입니다. 위 에피소드의 혜월스님 처럼 다수의 국민은 잘 짜여진 각본을 철석같이 진실로 믿어왔는지도 모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영애로 지낸 시절부터 늘 자신과 관련한 의혹에는 “나와 관계없다”는 입장을 보여왔습니다. 대통령 취임 전에는 ‘최태민 목사와의 인연’, ‘최순실의 육영재단 관여’ 문제 등에서 그랬고, 취임 후에는 ‘경제 민주화’, ‘반값 등록금’, ‘성실한 검찰조사’ 등의 약속이 줄줄이 거짓말로 판명났습니다. 지금의 탄핵 정국은 어쩌면 이런 거짓말의 ‘인과관계’에서 비롯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거짓말 중독’이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계로까지 슬그머니 똬리를 틀면서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듯 합니다. 기사가 사실 보도를 생명으로 해야함에도 열악한 재정과 첨예한 이해관계 속에서 언론사의 ‘팩트 외면’은 이제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특히 요 며칠은 최순실 국정농단의 실체를 밝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태블릿PC의 출처를 두고 거짓말 논란이 벌어지면서 사태의 본질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어서 참으로 걱정입니다. 일단 JTBC가 밝힌 태블릿PC 입수 경위에 못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최순실 소유 회사 더블루K가 황급히 떠난 텅빈 사무실의 빈 책상 서랍에 태블릿PC가 놓여있었다”는 해명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됐던 경쟁 언론사 기자들의 고개를 흔쾌히 끄덕이게 하기엔 미약한 것 같습니다.

 지난 7일 청문회에서 최순실씨의 측근이었던 고영태씨는 태블릿PC와 관련해 “내 것은 아니고 최순실씨가 사용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발언이 거짓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전혀 연관성 없어보인 각각의 퍼즐을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완성시켰던 태블릿PC의 신뢰성에 상처가 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싫은 가정입니다. 고질적인 혼란과 불신의 사회가 배운자, 똑똑한자, 가진자들의 거짓말 때문이라고 한 고 최인호 작가의 소설 속 지적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처절한 구도행의 ‘길없는 길’ 위에서 법등을 밝혀온 고승들에게 짙은 안개 속의 대한민국이 가야할 길을 묻고 싶은 때입니다/이현구 정치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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