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의 어느날, 대선 투표일을 보름 정도 남겨둔 시기로 기억됩니다. 숨가쁜 대선 정국에서 코미디같은 책 한권이 슬며시 등장합니다. ‘참 좋은 인연입니다’란 제목을 단 40쪽 분량의 만화책으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돈독한 불교신자로 묘사한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특정 후보의 이름이 적시된 인쇄물 배포는 그 시점에 분명히 불법인데도 책자는 새누리당 대선캠프의 종교 직능조직 주도로 비밀 작전하듯 제작돼 각 사찰에 몰래 전달됐습니다. BBS불교방송은 이 만화책을 입수해 ‘불교의 위상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을 담은 단독 기사를 보도했고, 화들짝 놀란 새누리당 대선캠프가 부랴부랴 만화책을 거둬들였다는 소식이 곧바로 들렸습니다.

  당시의 그 불법 만화책을 들여다보면 박 대통령은 의심하기 힘든 불자입니다. “불교 경전을 탐독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견뎌냈다”, “정치인으로서 살아가면서도 시련이 닥칠 때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해답을 얻었다”라고 표현돼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박 대통령의 종교는 공식적으로 ‘무교’입니다. 본인 스스로 불자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큰 스님들로부터 법명을 받았지만,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유신 시절 고 최태민 목사가 대한구국선교단 총재였을때는 명예총재를 맡은 개신교 전력도 있습니다. 이렇게 불교, 개신교, 천주교와 골고루 인연이 있다고 해서 누군가는 박 대통령의 신앙을 소위 ‘기불천교’라고 칭하기도 했지요. 유력 정치인의 신앙을 필요할때 적절히 자기네 편으로 삼는 종교계의 '적폐(積弊)'도 일조했을테지요.

  그런데 최근의 ‘최순실 비선실세’ 의혹 속에서 드러나는 각종 정황을 보면 박 대통령의 신앙이 과연 ‘기불천’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정신세계에 바탕을 둔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기불천 세 종교를 섞어서 ‘영세교’란 신흥종교를 만들어 교주로 활동했던 최태민 목사에게 받은 영향 때문에 각 종교를 넘나들었던 건 아닌가 하는 것이죠. 연관지어서 박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를 신봉하고 있다는 의혹도 받고 있는 실정인데, 야당은 이제 최순실씨가 박 대통령과 단순한 인간관계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라 ‘주술적 멘토’란 주장까지 대놓고 하고 있습니다. 최씨 부녀, 최씨 일가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박 대통령의 부적절한 처신이 '사이비 신앙' 논란으로 번져 국민들의 절망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계도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는 진정으로 반성해야합니다. 선거에서 표를 몰아주겠다고 하면서 권력자와 사적 관계를 쌓는데 순진한 신도들을 이용한 것은 아닌지를 말입니다. 4년 전 박근혜 대선후보를 ‘전륜성왕’격의 불자라고 철썩같이 믿으며 아낌없이 표를 몰아준 불자들이 최근 얼마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4년 전 이맘때로 다시 돌아가보죠. 2012년 11월 27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기자실 연단에 가사 장삼을 걸친 스님 30여명이 나란히 섰습니다. ‘한국불교태고종 전국보국회’란 단체가 스님과 불자 5000여명을 연명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는 행사가 펼쳐집니다. 기자회견문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박근혜 후보는 선대(先代)인 고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께서 불교전통문화의 보존 계승을 위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지원해주셨던 선연공덕(善緣功德)을 이어받아 전륜성왕의 지혜와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갖춘 국가지도자임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박근혜 후보가 집권하면 불교관련 규제법령의 완화와 한국불교 전통문화유산의 세계화에 대한 발전적 정책대안을 수립 시행해 줄 것으로 기대하며 박근혜 후보를 적극 지지한다...” 20대 대선이 1년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에 심하게 자존심이 상한 불자들은 내년에 두 눈을 부릅뜨고 투표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후보의 '정신세계'를 유심히 보겠지요/이현구 정치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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