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대한불교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등 3개 종교계 노동위가 개최한 故 한광호 열사 추모 기도회

  “그렇게 마음이 끌리거든 내 금지를 어기고라도 들어가도록 해보라구. 그렇지만 명심하시오. 내가 막강하다는 걸.”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는 ‘법’이라는 절대적 가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한 시골사람이 등장한다. 하지만 문지기가 그를 가로막고 있었고, 시골사람은 문지기의 허락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하면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애쓰고 고민하다가 결국 법에 닿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작년 말께 법원을 출입처로 받았으니, 햇수로는 2년째 나는 법원을 바지런히 다니고 있다. 재벌과 정치인이 연루된 비리부터 각종 범죄까지 세간의 관심을 받는 떠들썩한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내 임무지만, 그 보다 내가 더 자주 마주한 것은 카프카의 단편에 나오는 시골사람처럼 법 앞을 서성이다가 유령이 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조용한 시위를 하고 있었다. 법원 바깥에 있는 이들은 어떤 판사나 검사의 이름과 함께 저주를 내리겠다고 쓴 팻말을 옆에 놓고 멀뚱히 서있기도 하고, 법원 안에 있는 이들은 박스를 찢은 종이에 검은 매직으로 비슷한 내용을 적었다가 멀리서 경관이 다가오면 잽싸게 종이를 추스르고 마치 재판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곱게 자리에 앉아 모른 채를 했다.
  어느 날은 법원 관계자와 이 유령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안타깝다”고 했다. 법 안에서 풀지 못한 증오와 억울함을 사법부에 쏟아내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걸 풀기위해 생업을 차치하는 등 자신을 모조리 내던진 그 개인의 삶 자체가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니 유령들은 애당초 법이 아니라 용한 무당을 찾았어야 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정녕 돼지 멱을 따고 꽹과리를 울려야 풀리는 업장을 전혀 엉뚱한 번지수인 법 앞을 찾아서 해소하려는 사람들이었을까.
  지난 23일 토요일 밤, 서울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사옥 앞에서 만난 K씨도 몇 년 전까지 대전고등법원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자동차 엔진 부품 생산업체인 ‘유성기업’에서 일하다가 2011년에 해고됐다. 그가 해고된 이유는 ‘밤에 잠 잘 수 있는 직장’을 원했기 때문이다. 유성기업의 노조는 주간연속 2교대 근무를 요구했다가 협상이 결렬되자 파업했다. 이에 사측은 용역을 동원한 직장폐쇄와 12억 원의 손해배상 가압류, 노조파괴로 응답했다. 노조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합법 위반 등으로 회사관계자들을 고소했지만 검찰은 지난 2013년 말 불기소를 결정했다. 그리고 K씨는 법원 앞에서 유령이 되기로 결심했고, 피켓을 들었다.
  “6개월 만에 대전고법이 재정신청(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을 때, 법원에 이가 타당한지에 대한 판단을 구하는 제도)을 받아들였습니다.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틀렸다는 거죠.” 
  성과도 있었다. 지난달 21일 대전고법은 소송에서 진 유성기업이 해고 노동자들을 복직 시켰다가 다시 이들에게 징계를 내려 2차 해고를 한 과정이 모두 위법했다고 판결했다. 지난 4월에는 복수노조법을 악용해 사측이 만든 ‘제 2노조’가 노조의 실질적 요건인 자주성과 독립성이 없어 설립 무효라는 서울중앙지법의 판결도 나왔다.
  아픔도 따랐다. 지난 3월 유성기업 영동공장에서 일했던 한광호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십 건에 달하는 법적 분쟁에 지쳐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가 보낸 마지막 문자에는 사과와 함께 “나는 집에 돌아가지 못 할 것 같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K씨가 유성기업의 원청인 현대차 측에 원하는 것은 노조 파괴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와 책임이다.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천안지청의 2012년 수사보고서에는 유성기업이 현대차 측과 노조문제를 협의하는 내용이 담긴 압수수색 증거물이 포함돼 있다. 
  언제쯤 유령들은 사라지게 될까. K씨는 말했다. “가장 무서운 건 자본과 법, 정치가 손을 잡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언제까지고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K씨는 이 말을 끝으로 모기장을 친 뒤 보도블럭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잠을 청했다. 깜깜한 밤, 잠든 K씨 바로 옆에서 공회전을 걸어놓은 경찰버스의 엔진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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