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에티오피아 군인 1,300여명이 아프리카 대륙의 유일한 참전군으로 부산항에 들어왔습니다. 이름조차 못들어본 지구 반대쪽 낯선 나라를 돕겠다며 망망대해를 건너온 이들은 약간의 적응훈련 뒤 곧바로 동부 전선에 투입됐습니다. 왕실 근위대 소속의 최정예 요원이었기에 이들은 늘 최일선에서 싸웠습니다. 이렇게 한국땅을 밟은 에티오피아 참전 군인은 모두 6,037명. 이들은 253번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지지 않았습니다. 122명이 전사했고, 536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포로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수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에 백병전으로 맞섰던 에티오피아 전사들의 용맹함은 한국전쟁사의 전설로 남았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간 이들의 나라 에티오피아는 이후 7년간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고, 한해 100만명이 굶어 죽는 기아와 가난이 찾아왔습니다. 대한민국을 도왔던 참전용사들은 1974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핍박을 받기 시작했고, 이름까지 바꾸고는 꽁꽁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2016년 5월. 한국전쟁 참전 65년만에 박근혜 대통령이 비행기로 16시간을 날아 대한민국 국가원수로는 처음 에티오피아 땅을 밟았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초유의 경제 기적을 일군 나라의 대통령은 가난을 벗지 못해 여전히 척박한 그곳에서 나흘을 머물렀습니다. 도착 이튿날에는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조성된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을 찾아 노안의 참전용사들을 만났습니다. 춘천시가 재원을 마련해준 참전 기념탑 앞에서 박 대통령은 “에티오피아 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기념식을 마치고도 빗속에서 한참을 행사장에 머물렀습니다. 젊은 시절을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준 퇴역 군인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면서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동행 취재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있었던 저는 마침 그 일정에 ‘풀기자(대표 취재기자)’로 뽑혀 현장에서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대통령의 뜨거워진 눈시울을 직접 확인한 것은 물론입니다.

 한국 대통령과 한국전 참전 노병들의 극적인 만남을 취재한 뒤 올라탄 승합차에서는 마음이 숙연해서였는지 줄곧 차창 밖만을 바라봤습니다. 1960년대 서울의 모습과 꼭 닮은 듯한 아디스아바바의 거리는 ‘보은(報恩)’에 관한 생각을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빈곤함이 여과없이 펼쳐진 그 거리에는 이역만리 코리아에서 온 대통령을 환영하는 사진과 플랙카드도 즐비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통령 해외 순방에 수없이 동행했지만 이토록 도시 전체가 환영의 물결을 이룬 것은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에티오피아는 60년대까지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훨씬 높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이 기적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에티오피아는 후퇴를 거듭했고, 지금은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550달러(약 64만원)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습니다. 그 사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맹함으로 이역만리 작은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던 에티오피아 용사들은 대부분 숨지거나 가난과 병환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65년의 세월 속에서 제대로 갚지 못했던 에티오피아 용사들이 준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부처님이 ‘보은(報恩)’에 관해 남긴 말씀을 끝으로 올려봅니다.

 “은혜를 알면 큰 자비의 뿌리를 내고 선업의 첫 문을 열며, 사람의 사랑과 공경을 받고 그 명성이 멀리 퍼지며,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고 마침내 불도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모르는 자는 축생보다 못하느니라”(법원주림 中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이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은혜를 갚는 것이요, 둘째는 큰 은혜는 말할 것도 없고 조그만 은혜라도 잊지 않는 것이다”(증일아함경 中에서)/이현구 정치외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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