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에 필요한 3가지 요소는 ‘의식주’, 즉 옷과 음식, 집으로 대변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계급 사회적 측면에서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은 ‘주차돈’, 곧 집과 차와 돈으로 규정지어진다고 생각한다.

2560년 전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계급사회의 폐해가 최고조로 달했었다. 농경사회가 시작되고 잉여생산물이 쌓이자, 도래 된 계급사회에서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은 의복이었다. 의복은 무엇을 먹고, 어디서 사느냐에 앞서서 그 사람의 계급을 단번에 알려주는 상징이었다.

시간이 흘러 계급사회와 계급제도가 없어졌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옷만을 보고 그 사람의 직업과 사회적 위치, 경제적 능력을 가늠하기 힘들어 졌다. 그래서 다소 번거롭지만 “어디에 사느냐고?”고 묻고는 한다. 여기에는 지역과 사는 집에 대한 구체적 답변을 암묵적으로 요구한다.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 아파트에 사느냐, 단독주택에 사느냐 등 많은 궁금함이 내포 돼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이같이 물을 수는 없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주’의 대체재로 ‘차’, 자동차로 타인을 판단하기도 한다. 더 비싼 고급 차가 현대적 의미의 계급, 경제적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현대사회 계급의 척도인 ‘돈’으로 귀결된다. 현대인들이 타인의 계급을 판단할 때, 또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재산 즉 돈이다.

1980년 대 엘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권력이동’을 통해 현대사회의 권력 서열을 지식, 부, 폭력 순이라고 정의했다. 지식과 정보가 제1의 권력이고, 이의 매개체로서 부, 즉 돈이 두 번째 권력이며, 마지막이 가장 원초적인 권력이 폭력이라고 밝혔다. 앨빈 토플러의 권력 순위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균열의 조짐은 다분하다. 인터넷의 발달로 특정인과 계급에 독점되던 ‘지식’과 ‘정보’는 대중화 되었고, 법과 제도는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현대사회의 계급을 대변하는 ‘돈’은 ‘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존재로 성장했다.

2560년 전 부처님은 출가하면서 제일 먼저 머리카락을 깎고, 계급을 상징하던 의복을 벗어 버렸다. 천하나를 몸에 두르고 금식을 하며 ‘생노병사’의 문제를 풀기위해 수행을 했다. 범인에게는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돈의 위세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편하게 살고 싶은 근원적 욕망을 어찌 쉽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래도 부처님오신날, 오늘 하루만큼은 ‘주차돈’의 개념에서 벗어나고 싶다. 2560년 전에 비해 물질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현대사회의 신 ‘돈’이 ‘생노병사’라는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완전하게 해소 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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