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필자는 유독 영화와 영화관에 얽힌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어릴때부터 영화에 흥미를 가졌던데다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을 선호하는 개인적 취향때문이기도 하다.
 
1982년 당시 중 1때였다. 나이에 비해 매우 성숙했던 한 친구에 이끌려 찾은 곳이 바로 서울 면목극장이었다. 변두리 동시상영관에서 본 영화는 안소영 주연의 ‘애마부인’ 그리고 ‘내 이름은 쌍다리’라는 액션 영화였다.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지만 당시 동시상영관에서는 이렇다할 제재 없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14살 때 본 최초의 살색 영화가 준 충격은 대단했다. 코 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나기 시작한, 이른바 2차 성징이 나타날 무렵에 경험한 첫 성인 영화 ‘애마부인’은 지금도 강렬한 기억의 한자락으로 남아 있다.

고등학교 1학년때인 1985년에는 시험을 마치고 단체로 영화를 관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에 봤던 영화는 랄프 마치오 주연의 청춘영화 ‘베스트 키드’와 캄보디아 내전을 다룬 ‘킬링필드’였다. 이들 영화는 서울 종로의 단성사와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상영됐다. 영화 상영전에 애국가에 맞춰 모두가 일어서야 했고 지금은 사라진 ‘대한뉴스’를 의무적으로 봐야 했지만 곧이어 만나게 될 영화에 대한 설레임이 커서인지 누구도 불만을 갖거나 지루해하지 않았다. 영화 ‘킬링필드’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존 레논의 노래 ‘이매진’은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해준 윤활유 같은 존재였다.
 
그 해에는 화양리 세종극장에서 존 트라볼타와 올리비아 뉴튼존이 주연한 영화 ‘그리스’를 봤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건들거리지만 남자가 봐도 멋있는 존 트라볼타, 금발 미녀 올리비아 뉴튼존의 매력에 푹 빠졌고 한동안 존 트라볼타처럼 친구들과 함께 바지 뒷주머니에 빗을 넣고 다니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인 1986년에는 청량리 오스카 극장에서 주윤발,장국영 주연의 ‘영웅본색’를 봤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주윤발이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총을 난사하는 장면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친구들과 함께 거리를 쏘다니면서 마치 주윤발이 된 것처럼 성냥개비를 입에 물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고 3때인 1987년, 야간 자율학습에 시달리던 수험생 시절에도 영화관은 소중한 삶의 한 공간이었다.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군자동 대능극장에서 본 청춘영화 ‘그로잉업’은 당시에는 생소하기만 했던 이스라엘 영화였다. 소풍 가던날 친구와 함께 어린이대공원을 빠져나와 단성사에서 봤던 안성기.황신혜 주연의 ‘기쁜 우리 젊은날’은 지금도 내 인생의 영화 가운데 한편으로 꼽는다. 종로 2가에 있던 서울극장에서는 박중훈 강수연 주연의 캠퍼스 영화 ‘철수와 미미의 청춘 스케치’를 보면서 대학생활의 낭만을 동경하기도 했다.
 
영화관에 얽힌 추억 가운데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건도 있었다. 1989년 대학 2학년때 친구와 함께 왕십리 성동극장을 찾았을 때였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30대로 보이는 한 남성이 들어오더니 바로 옆자리에 앉아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영화를 계속 보기가 불편해 객석을 빠져나와 화장실로 피했지만 그 남성은 화장실까지 쫓아왔고 결국 영화를 다 보지도 못한채 황급히 극장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성동극장은 파고다 극장,허리우드 극장 등과 함께 동성애자들이 자주 찾는 영화관이었다.
 
이처럼 봉변을 당할뻔한 적도 있지만 영화관은 추억과 낭만의 공간이자 자유의 공간이었다. 친구와 갈 때는 우정과 의리가 넘쳐나는 곳이 됐고 소개팅으로 만난 여성과 함께 할 때는 설레임과 호기심이 샘솟는 곳이 됐다. 혼자 갈때는 음습하고 어두운 욕망이 꿈틀거리는 곳이 되기도 했다. 영화관을 나서면 방금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내 삶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영웅본색의 주윤발이 됐다가 그리스의 존 트라볼타가 되고, 겨울나그네의 강석우가 돼 보기도 했다.
 
요즘은 주말을 이용해 조조 할인 영화를 즐기는 편이다. 첨단시설을 갖춘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도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웬지 허전하고 아쉽다. 아니 서글프다. 이름만 들어도 정겨웠던 영화관들,동시상영관들이 대부분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비록 남루하고 불쾌한 냄새가 나도,앞 사람의 큰 머리 때문에 화면이 가려져도, 화면에 비가 내리고 영사기 필름이 툭하면 끊겨도 그 곳이 새삼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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