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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중국, 불교를 만나다
홍진호 기자 | 승인 2015.11.10 09:01
   
▲ 중국 남개대학 순창우 교수는 최근 '유불도 삼교와 중국 고대문학'에 대해 강연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HK연구단은 지난 5일 동국대충무로영상센터 불교학술원에서 중국 남개대학 순창우 교수 초청강연회를 열었다. 이날 순 교수는 ‘유불도 삼교와 중국고대문학’이란 강연을 통해 “중국은 제도, 법률은 유교에서, 학설과 사상은 유교보다도 불교와 도교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중국문학을 전공한 순 교수는 자신은 불교학자가 아니라 중문학자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 국내외에서 문학보다도 불교관련 강의를 많이 하게 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불교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사상과 불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이러한 요소가 중국 고대문학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고 강조했다.
 
1995년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입학한 기자는 군 제대 후 복학해서 정치외교학을 복수 전공했다. 인도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종교와 정치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인도뿐만이 아니라 동서양의 거의 모든 문명 탄생지에서 종교와 정치는 본래 한 뿌리였다. 그중에서 특히 인도 힌두교는 아리아인이 인도지역의 선주민 드라비다 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너무나 정치적인 종교이다. 종교성을 배제하고 힌두교의 정치, 사회적 측면만 부각시킨다면 아리아인을 상위 카스트에, 드라비다 족 등 선주민들을 하위 카스트에 두고 이를 종교로 공고히 한 것이다. 이렇듯 힌두교의 탄생은 다분히 정치적이지만, 이후 힌두교는 오히려 종교의 신성함을 유지한 채 제도화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불교는 제도화되고 의식화 된 힌두교의 반작용으로 탄생됐다. 가장 큰 구호는 힌두교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정치적 의도 즉 ‘카스트 제도’의 철폐였다. 물론 불교가 크게 융성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성직자인 ‘브라만 계급’을 견제 하려했던 ‘크샤트리아 계급’과 상공업으로 큰 부를 축적했던 ‘거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배층에 반하는 불교는 보편화된 교리로 민중들을 사로잡았고, 한때 인도 전역에서 크게 융성했으나 결국 불교는 본토에서 추방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보편적 진리와 탁월한 교리체계를 바탕으로 인근 지역으로 급속히 퍼지며 세계종교가 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또 유교는 어떠한가?
 
순 교수는 발표 자료에서 유교를 이렇게 정의했다. “유는 유가를 말하는데, 공자의 학설을 떠받든다. 인의와 예악을 숭상하며, 정치에서 덕치와 인정을 주장하고 기본적으로 정치, 윤리체계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종교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유교가 종교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이를 의식해서 인지 순 교수는 “종교라는 것은 아주 고전적이고 조직적인 종교만이 있는 것이 아니며, 넓은 의미에서 종교의 관념과 종교적 생활들이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중국에는 종교가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현재 유교는 종교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가장 종교성이 적은 종교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지만 말이다.
 
왜 유교는 세계 유수의 종교에 비해서 종교성이 적은 것일까?
 
이는 유교 자체가 종교성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순 교수는 “공자는 서주 이래로 실천이성과 인본정신이 풍부했던 윤리적 사상체계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유가의 쳬계를 형성했다. 그리고 유가는 종교 신앙에 대해 억제 작용을 한다.”고 밝히고 있다.
 
순 교수는 이에 대한 예로써 논어의 구절들을 들려주었다.
 
“사람이 행해야 할 옳은 일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면, 지혜롭다 할 수 있다.”, “사람도 잘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사는 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등 유교의 가르침은 그 자체가 종교성을, 즉 ‘생’과 ‘사’에서 ‘사’의 부분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일정부분 억제하고 있다.
 
특히 유교는 기본적으로 지배층의 종교였다.
 
글자를 모르는 피지배계층에게 유교의 가르침은 너무나 멀었다. 민중들은 유교보다도 민간신앙이 도교를 신봉했다. 곧 중국의 지배층은 ‘유교’를, 피지배계층은 ‘도교’를 믿으며, 하나의 국가 체계 안에 양대 종교가 공존했던 것이다. 특히 도교의 신자들, 즉 민중들은 대부분 글자를 몰랐기에 도교의 사상은 종교적인 교리화의 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했다. 정치, 윤리적으로 너무나 체계화 된 유교와 민중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했지만 교단종교를 형성하지 못한 민간 신앙 형태의 도교는 이후 너무나도 강력한 외래종교를 만나게 된다.
 
바로 불교이다.
 
종교의 나라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는 도교와는 차원이 다르게 방대하고 체계적인 교리체계를 갖춘 고등종교였다. 불교는 25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서양의 그 어떤 철학보다 논리적이다. 그런데 그 옛날 불교를 접한 그 당시 중국 사람들의 충격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순 교수는 “불은 불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외래종교이다. 불교는 세간을 떠나 부처가 되는 것을 추구한다. 불교는 방대한 교리체계를 형성하고, 풍부한 윤리 내용을 갖추었으며, 중국과는 다른 종류의 문화체계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중국에서 ‘중국화’된 중국불교로 발전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불교의 유입으로 가장 크게 위기감을 느낀 것은 유교가 아니라 도교였다.
 
지배층의 종교 즉 ‘유교’는 통치계급의 종교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불교를 공격하던 도교는 이후 불교를 귀감 삼아 교단종교로서의 형태를 갖춰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중국으로 들어온 불교는 어떠했는가?
 
불교는 탁월한 교리체계를 갖췄으나, 어쩔 수 없는 외래종교였다. 특히 지배층의 종교 ‘유교’는 국가운영 체계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초창기 불교에 있어 유교신자에 대한 포교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불교가 ‘깨달음’을 구한다면, 유교를 믿는 관료들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입신양명’을 추구하였기에, 유교와 불교는 ‘세간’과 ‘출세간’으로 가는 길 자체가 틀렸다.
 
그러하기에 초창기 중국에 전래 된 외래종교 불교의 선택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불교가 중국내에서 살아남으려면 바로 도교를 믿는 민중들을 신도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불교는 격의불교의 길을 택했다. 불교의 ‘공’을 도교의 ‘무’에 빗대어 설명하는 등 현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교를 통해 도교가 교단종교가 되고, 도교를 통해 불교는 현지화에 성공하자, 이제 중국에서는 유교가 지배층의 정치윤리 체계로서의 중앙에, 불교와 도교가 그 양 옆에 나란히 존재하는 형국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자 중국의 지배층은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불교와 도교를 이용해 유교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했다.
 
곧 지배층은 불교와 도교에 유교적 색채를 묻혀 민중 교화에 나섰고, 그 결과물이 바로 유불선 사상 즉 ‘삼교’이다.
 
이를 순 교수는 “진한 이래로 전제정치 체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유가는 통치계급에 의해 통치사상 체계로 확립되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지만, 불교와 도교는 통치체계 안으로 편입되어 종교가 갖추어야 할 절대적 신성함의 지위를 상실하였다.”고 설명했다.
 
“즉 이후 정치적으로는 ‘삼교’를 함께 쓰는 것이 역대 조정의 방침이었고, 그리하여 ‘삼교’는 공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삼교’는 가르침으로 정치를 돕기 시작했다.”
 
유가의 오행-인, 의, 예, 지, 신과 불교의 오계-불살, 불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도교의 오계-살생을 하지 않음, 고기와 술을 하지 않음, 마음과 일치되지 않은 말을 하지 않음, 도둑질을 하지 않음, 삿된 음욕을 하지 않음 등이 동일선상에서 민중들의 윤리체계로 구축된 것이다.
 
그런데 유교와는 너무나 다른 불교와 도교의 사유체계와 사상체계에 반응 한 것은 비단 민중들만이 아니다. 유교를 믿는 전,현직 관료와 유학자 등 지배계층들도 숨 막힐 듯이 정교한 정치체계인 유교에서 잠시 벗어나 불교와 도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페이정칭의 <중국: 전통과 변천>에는 이런 구절이 나와 있다.
 
“한 사람의 중국인은 사회에서는 종종 천하를 다스리는 유가 신도이지만 들에서는 자연 친화적인 도가 신도로 변하고, 낮에는 인간 세상에 적극적인 관리이지만, 밤에는 상상하는 시인 혹은 자연의 애호가로 변한다.”
 
특히 중국은 서구와 다르게 시민사회를 거치지 않았기에 중국의 문인은 전, 현직 관료와 유학자 일 수밖에 없었다. 글을 지음에 있어 치열한 현실세계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했던 그들은 불교와 도교를 통해 현실정치와 실생활에서 하지 못했던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쳤다. 문인들은 육도, 삼세, 신통 등 불교와 도교의 세계관을 문학으로 녹여냈고, 이런 이유로 중국 고대문학은 유학이 아니라 불교와 도교의 사유체계로 만들어 졌다.
 
“이후 중국은 유교로 세간을 다스리고, 불교로 마음을 다스리고, 도교로 몸을 다스리게 되었다. 유교와 불교, 도교 즉 삼교는 각기 자신의 작용을 다하고, 상호 귀감이 되고 교류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주류가 되었다.”
 
이후 한반도에 들어선 고등종교 불교는 우리나라의 민속신앙들을 산신각, 칠성각 등의 형태로 흡수했다. 불교는 바다 건너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위력을 발휘했는데, 일본의 경우는 적어도 사찰과 신사 숫자에 있어서는 본토 종교인 신도가 불교와 1:1형태로 공존하게 된다.
 
홍진호 기자 / jino41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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