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철언 한반도복지통일재단 이사장
양창욱(이하 양): 3일 '양창욱의 아침저널'[FM 101.9 MHz (서울)] 3부, 목요일 3부는 '목요스페셜, 그 사람 지금' 시간으로 꾸밉니다.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보는 시간이죠. 오늘은 3선 의원과 2번의 장관을 지내신 박철언 전 장관님 모시고 얘기 나눠 보겠습니다. 20년 경력의 시인이셨다고 합니다. 이 특이한 이력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얘기 들어보겠습니다. 장관님 나와 계시죠?

박철언(이하 박): 네 박철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양: 안녕하십니까! 이게 장관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의원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제가 호칭이 순간 헷갈렸습니다.

박: 뭐 부르고 싶은대로 하시죠.

양: 하하, 어떻게 지내십니까? 요즘? 근황이 궁금합니다.

박: 뭐 요즘 백수니깐 별 일 없이 지내는데, 그러나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도 있죠.

양: 하하, 그건 어떤 의민가요? 하는 일 없이 바쁘다는 말씀이십니까?

박: 네, 그런 대로 바쁜 생활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 28년 전부터 복지통일연구소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제 장학금 지급하고 장애자 지원하고 하는 그런 연구소입니다.

양: 네, 그렇죠. 그건 잘 알려져 있죠. 그런데 이번에 시세계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셨어요.

박: 네, 운이 좋았죠.

양: 시 제목이 '고시텔 사람들'인데, 장관님이 시를 지어오신지 꽤 되셨다고요? 20년이 되셨다고요?

박: 네, 그렇습니다.

양: 정치인 이력 때문에 이게 많이 가려지고 알려지지 않았던 겁니까? 아니면 아마추어 시인으로서 활동하셔서 그런 겁니까? 시인이라는 이력이 참 낯섭니다.

박: 글쎄요. 뭐 정치인으로서 활동할 때는 제가 시집을 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시집을 처음 낸 것은 정치를 다 그만 두고 난 뒤인 2004년에 첫 번째 시집을 냈고, 그 7년 뒤에 두 번째, 작년에 세 번째 이렇게 냈죠. 그러니깐 시를 많이 써서 모았지만 시집을 내지 않았으니깐 등단한지는 오래 됐지만 잘 안 알려졌었죠.

양: 네, 그러시군요. 근데 정치인 활동을 하실때도 틈틈이 시는 쓰셨어요?

박: 네 그렇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동아리 활동을 했으니깐요.

양: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셨는데, 또 사법고시를 보시고 법조인의 길을 걸으시고, 이후 정치인으로 활동하시고 그렇게 많이 돌고 돌아서 결국 다시 문학인의 길로 돌아오신 거네요?

박: 네, 고향으로 돌아왔죠. 이제...

양: 시에 대한 관심을 처음에 고등학교 때 갖게 되신 어떤 계기라는 게 있을까요? 아니면 특별히 뭐 좋아하게 된 이런 계기라든지?

박: 제가 원래는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고, 혁명이라는 잡지도 내고 이렇게 했는데 또 대학때는 독어회라고 독일문학 공부하는 모임이죠. 전혜림, 천재작가인 이 분하고 활동을 했었고...

양: 아, 전혜림 작가님하고? 네...

박: 그 분이 우리 독일어 강의 교수님이었는데 젊었지만 지도 교수를 전혜림 교수로 해서 7명이 모여서 일주일에 한 번씩 독문학공부를 했죠.

양: 선생님이셨군요? 작가 전혜림 선생님이.

박: 그렇습니다.

양: 동료라기 보다는. 독문학 교수님이셨군요. 그러시군요. 그러면 참 구체적으로, 열성적으로 이 문학 공부를 하셨네요. 고등학교, 대학시절에는...

박: 네, 그 땐 좀 열심히 했었죠.

양: 네. 그러다가 어떻게 사시를 보게 됐습니까?

박: 우리 부모님하고 주변에서 그래도 법과대학을 가야 된다... 고시를 보든 안보든 법과대학을 가야 된다 이래서 갔고, 법대 했으니깐 고시는 쳐야 된다, 이래서 어쩔 수 없이 고시를 쳤고, 됐으면 뭐 판검사 생활 좀 하다가 다른 거 해라 이렇게 주변의 부모님, 형제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약간은 좀 끌려 다녔죠.

양: 하하 그러시군요. 그러다가, 또 정치의 길로 들어섰고.

박: 격동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 전두환, 노태우 당시 장군님들하고 평소에 좀 아는 사이라고 해서 뽑혀서 파견 근무가 시작됐습니다.

양: 네, 처음에는 뭐 헌법기초작업, 이런 것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하다가 이제 노태우 전 대통령을 보좌하게 되셨고 그러다 계속 정치인의 길을 가시게 된 거군요. 네 그렇군요. 그런데 이번에 대상을 수상하신 '고시텔 사람들' 작품을 보면, 장관님은 고시텔하고 크게 인연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드는데 고시텔 가 보셨어요?

박: 하하. 이번 고시텔 사람들은 사실 힘들지만 현실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않고 살아가는 난쟁이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시입니다. 사실 제가 일반에 잘 안 알려져 있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피난민촌, 달동네, 부두노동자 현장, 이런 서민의 삶 현장에 많이 갔었습니다.

양: 아, 그러셨군요.

박: 그리고 고시텔에 사는 사무실 직원도 있어서 고시텔 생활은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편입니다.

양: 네, 그러셨군요. 장관님하면 워낙 젠틀하고 세련된 이미지가 과하게 느껴져 가지고 고시텔 같은 데 자주 안 갔을 것 같아, 연관이 잘 안돼서 또 여쭤 봤습니다. 그런데 시집을 벌써 작년까지, 2004년 2007년 2014년 이렇게 3권을 내셨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면 이제 앞으로도 계속 내실 계획을 갖고 계신 거에요?

박: 네, 세 번의 시집을 냈는데, 세 번째 시집을 낸 후에 새로 쓴 시가 한 40편 정도...

양: 40편 정도. 네.

박: 그런데 이게, 대개 한 시집에 저는 1집, 2집, 3집 모두 89편을 담았습니다. 많이 담는 편이죠.

양: 네 많네요. 진짜.

박: 그래서 언젠가 그 정도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4번째 시집을 내게 되겠죠.

양: 그렇군요. 이게 89편, 뭐 이 정도를 늘 생각하시고 계시니 이 정도는 차야 이제 묶으시는군요.

박: 네, 그렇습니다.

양: 특별하게 추구하시고 지향하는 시 세계가 있습니까? 아니 이렇게 다시 여쭙겠습니다. 시를 통해서 구현하고자 하고 보여주고 것, 궁극적으로 왜 시를 쓰시는 지 궁금합니다.

박: 저는 좋은 시라는 것은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그리고 불꽃같은 열정으로 많은 대중들에게 따뜻한 영혼의 울림을 전달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하고, 또 그런 시가 좋은 시라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시의 소재 같은 것은 주로 새벽 산책길이나, 국내외 여행, 또 잠이 오지 않는 밤이나, 장기간 제가 무료법률상담을 해 주고 있습니다만, 그런 인생 상담에서 오는 여러가지 소재를 가지고, 말하자면 대자연 어떤 풀 한 포기부터 생명의 신비의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소재가 되는 거죠. 그래서 그런 영혼의 따뜻한 울림을 전할 수 있는 그런 시를 쓰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양: 그렇게 시로 피력하시고, 그런데 다작이니깐 잘 씌여지시나봐요? 이게 대부분 쉽게 씌여지지 않는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던데... 시인 분들은...

박: 저도 문학동아리 활동 이래 지금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 다작하는 편은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이렇게 이렇게 쓴 것을....

양: 아 그렇게 그런 개념으로 이해해야 되는군요. 그렇군요. 그런데 고 조병화 시인하고는 특별한 인연이 있으셨는지, 장관님을 문단에 추천하셨던 분도 이 조병화 시인이시고 어떤 인연이 있으신지?

박: 네 저는 평소 조병화 시인님의 시를 좋아했습니다만, 만난 일은 없었는데 처음 만난 것이 바로 조병화 박재삼 등 원로 시인들 추천의 의해서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 1995년 20년 전입니다. 그 때 신인 문학상을 받는 자리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 후에 몇 차례 만나서 여러가지 좋은 얘기를 나누고 정을 나눈 일이 있죠. 조병화 시인이야말로 정말 또 하나의 국민시인이시죠. 그렇지 않습니까? 쉽게 쓰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시를 많이 쓰시고, 또 인생을 아름답게 살다가신 참 로맨틱하신 분이십닌다.

양: 그렇죠. 조병화 선생님의 '공존의 이유'인가요? 이거는 저희 어렸을 땐 책받침에, 진짜 책받침에 이 시가 쓰여진 책받침이 워낙 많아서, 유명한 시로 저희들이 잘 기억하고 있죠. 그러니깐 조병화 박재삼 선생님이 1995년에 추천을 해주셨는데, 그 때 등단하셨을 때 그 시가 푸른 모자...

박: 네, 그 때 제가 등단을 하게 된 것도 응모해서 된 것이 아니고, 감옥에 갇혀 있다 보니깐 그게 답답한 심정을 하루의 엽서 한 장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양: 네, 당시에?

박: 교도소 안에서도. 그래서 교도관에게 엽서 한 장에, 또 볼펜 하나 빌려서 그래서 가족한데 써 보낸 시가, 그 옥중 시가 감옥의 국화꽃밭, 눈 내리는 새벽, 민들레꽃 이 세 편이었는데, 그게 당시만 하더라도 제가 정치보복 당해 감옥에 있다 보니깐 기자들이 늘 우리 집에 들락거리다가 잡지 신문에 실렸어요. 그 이후 그 원로 시인들이 보고, 아 이거 괜찮다... 감옥에 있으니깐 불쌍해서 그렇겠죠.

양: 하하, 별 말씀을...

박: 그렇게 추천해줘서 제가 이제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 거죠.

양: 아, 이게 참 수감 생활을 소재로 했던 시들이 이렇게 등단의 첫 시들이 되는군요. 감옥의 국화꽃밭, 눈 내린 새벽, 민들레꽃 이렇게 말씀해 주셨는데, 이 시들을 쓰셨을 때 심정, 지금도 기억이 나시겠어요.

박: 네 그 감옥에서 처음에는 죄 없는 저를 정치보복으로 감옥에 갇혔으니깐 얼마나 울화통이 치밀겠습니까? 제가 마음의 평정을 찾아야 된다 싶어서, 내가 정치보복으로 마지막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자. 이렇게 편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감옥살이 5백일 하면서 많은 책을 읽고 생각하는 여유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생활 1년 4개월이 오히려 제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죠.

양: 네 그렇군요. 정치 얘기는 잘 안 여쭤보려고 하는데 또 말씀을 하셨으니깐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왜 당시에 정치보복을 당했다고 생각을 하세요?

박: 그게 이제 노태우 대통령 말기에 제가 YS가 대통령 되면 안 된다고, 반YS, 반김영삼 활동을 가장 치열하게 앞장 섰죠. 그래서 그 분이 대통령이 되니깐 보복을 당한 거죠.

양: 그렇군요. 슬로머신 사건도 그렇고. 이런 것들로 인해 의원직을 상실하고 이제 또 복역하시게 됐는데 굉장히 억울하게 생각되시겠네요?

박: 아, 그 뒤에 사면복권되고 그것이 억울한 엉터리 재판이었다는 것은 그 뒤 내가 쓴 다른 역사를 위한...

양: 아, 회고록이요? 2005년에 나온 거.

박: 네 1, 2편에 보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감옥에 가두고 보선을 실시했는데 우리 집사람이 가정주부로 있던 집사람이 출마해서 당선돼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 대신 국회의원 생활을 했죠.

양: 네, 현경자 의원.

박: 네. 그리고 제가 사면복권 후에 다시 대구에서 나와서 최고 득표율로 당선 됐죠. 그래서 우리 시민이나 국민들은 그 재판이 억울한 정치보복의 재판이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죠.

양: 그러셨군요. 그런데 한 동안 자민련 총재도 하시고 자민련 생활도 하셨어요. 정당 생활을?

박: 아... 그러니깐 IMF 초래한 것이 그 당시 집권당 이었으니깐, 제가 3당 합당에는 앞장섰지만 그것을 스스로 탈당해서 참 눈보라 치는 황야에서 야당 생활을 시작했죠. 그래서 자민련 생활을 해서...

양: JP와 함께.

박: 네, 그 때 DJ하고 JP가 서로 연대해서 집권을 하게 됐죠. 여기에 제가 앞장을 섰죠. 그럴 때 DJ대통령 만들기 앞장 섰다고 우리 고향에서도 처음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서 제가 정치를 떠났습니다. 정치현장을 떠나서 보스턴 대학 객원 교수로 2년 있다가 나와서 그 후 15년 전인 제가 59살에 그러니깐 정치를 떠났습니다. 비교적 빨리 정치를 떠났습니다.

양: 그러니깐 2천년에 실시된 16대 총선에서 자민련 소속으로 그 때 대구 수성구 인가요? 수성 갑이죠. 그 때 출마하고 낙마하신 이후에 정계를 은퇴하신 거군요.

박: 그렇습니다.

양: 네 그러니깐 DJP연합으로 JP와 자민련을 하시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들고 대통령으로... 그 이후...

박: 그렇죠. 97년이죠. 낙마 이전에 1997년에 제가 DJP 연합에 앞장 서서 그렇게...

양: 그러니깐 2000년에 총선에는 나가셨고? 그 때가 16대 총선?

박: 2000년 총선에 그래서 DJ대통령 만들기에 앞장 섰다는 이유로 경상도 대구에서... 

양: 네, 대구에서 그 때 낙마하셨죠.

박: 처음으로 낙선했죠.

양: 그런데 제가 이 대목을 왜 자꾸 여쭤보느냐 하면, 그 때 출마하셔서 낙마하고 바로 정계은퇴를 하기엔 아직 나이도 있고 그런데, 선뜻 이해가 안 됐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가 제가 정치부 초년병 시절이었거든요... 그러니깐 정계은퇴 이유 같은 것을 여쭤봐도 될까요?

박: 제가 공직 생활을 한 30여년 엄청 고생을 하면서 참 오해도 많이 받았죠. 많은 일을 했죠. 결국은 제가 참 동서화해와 보수세력, 진보세력을 통합을 위해서 DJP연합을 주장했고 그 다음에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서서 선대위원장까지 했었는데, 찬조연설을 하니깐 우리 고향에서 제 본심을 알아주지 않더라고요.

양: 대구 수성구에서?

박: 그래서 낙선하고 아, 이게 중앙정치도 이러하고 고향에서도 알아주지 않으니깐 내가 떠나자, 이래서 떠나게 된 거죠.

양: 그러시군요. 그런 계기로 정계를 은퇴하시게 된 거군요. 다시 시 얘기로 돌아올게요. 장관님.

박: 네, 시 얘기가 좋죠.

양: 네 시 얘기 좋으시죠? 좀 더 하겠습니다. 이 보면 '그리움의 화살' 같은 경우는 이게 연애시더라고요.

박: 좀 부드러운 시도 제가 많이 썼죠. 예를 들면, 그 그리움의 화살은 2004년, 10여년 전에 썼죠. "사랑할 수록 외로워지는 가슴, 그래도 그대 소리에 행복해지는 사랑은 오른손도 왼손도 닿지 않는 가운데 꽂혀진 그리움의 화살인가요, 사랑은 원하지 않아도 찾아오고 보내지 않아도 떠나가는 것" 이 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줬고 시집도 많이 팔렸습니다.

양: 네, 그렇군요.

박: 그런데 물론 부드러운 사랑시도 많이 쓰지만 그러나 제 시에 있어서 그 때나 당시나 사랑은 반드시 연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국이나 나라가 준 나한테 중요한 일이나 우정, 가족 등을 뜻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의미할 때마다 조금 다른 느낌을 느껴볼 수가 있을 겁니다.

양: 그렇군요. 꼭 이게 연인이 대상이 아니군요. 그렇게 이해를 해 야하는군요. 사실 참 박철언 전 장관님이 사랑시를 쓰신다고 하면 이게 일반 사람들은 언뜻 이해가 좀 안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렇게 또 직접 장관님의 입을 통해서 애송되는 걸 보니 또 느낌이 다르고요. 잘 와 닿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다 돼서 꼭 좀 한 가지 좀 여쭤보고 향후 계획 들으면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장관님 하면, 6공 황태자라는 별명이 꼭 따라 다닙니다. 이게 거의 완벽한 수식어처럼 같이 묶여져 있는데, 6공, 노태우 전 정부를 말하는 데, 이 별명 마음에 드세요?

박: 사실은 제가 엄청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황태자라는 건 오해죠. 왜냐하면 제가 대북 밀사를 6년을 했고, 북방정책 실무책임자로 수 많은 비밀출장 다니고 또 삼당통합, DJP연합...

양: 정치 격동을 다 겪으셨죠. 대내외적으로.

박: 만들고 생활체육 활성화 등 많은 일을 할 기회가 있어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지만, 큰 일꾼이라고 하면 뭐 그런 뜻에서 황태자라고 하면 좀 싫지 않지만, 영화를 누렸다고 보면 아닙니다. 제가 영화를 누린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양: 그러시군요. 일을 열심히 했다는 의미에서 6공의 황태자라는 별명은 얼마든지 반기지만, 어떤 뭐 잘 먹고 잘 사는 영화로웠다는 의미에서 6공의 황태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말씀으로 제가 이해를 하겠습니다. 장관님, 오랜 만에 목소리 듣고, 이런 저런 시 얘기, 또 과거 정치 얘기까지 들으니깐 정말 좋았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 정말 감사드립니다.

박: 네, 양창욱 앵커, 감사합니다.

양: 네 고맙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장관님. 박철언 전 장관님과 얘기 나눠봤습니다.
 
 
 

양창욱 / wook1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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