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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양창욱의 아침저널] 서둘러 하늘로 간 '영원한 DJ 김광한'-2015년 2월 19일 설날특집 인터뷰-
양창욱 | 승인 2015.07.10 13:59
   
▲ 고(故) DJ 김광한 선생님

[양창욱 기자 主] 지난 80년대와 90년대 우리나라 팝음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명DJ 김광한 선생님이 9일 밤 향년 69세로 타계하셨습니다. 6일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쓰러져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다 별세하셨습니다. '양창욱의 아침저널'에서는 2015년 올해 설날인 2월 19일에 김광한 선생님과 설날특집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당시 인터뷰 전문을 추모특집으로 띄웁니다. 김광한 선생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양창욱(이하 양): 설날 아침입니다. 이번 설연휴기간 아침저널에서는  설날특집, '우리들의 추억 속으로' 시간을 마련해드리고 있는데, 70, 80년 추억의 명DJ들을 만나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인데요, 이름만으로 우리나라 디스크 자키계를 대표하시는 분이시죠. 김광한 선생님, 스튜디오에 나와계십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김광한(이하 김): 안녕하세요

양: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김: 반갑습니다, 양창욱씨. 아침저널, 마포지역이 아주 들썩들썩 하는데 이렇게 뵈니까 상당히 미남이고 동안이시네.

양: 네, 감사합니다. 역시 설날이니 덕담부터 해주시는 군요.

김: 시사프로그램 하실 분 얼굴이 아니예요.

양: 하하, 그래서 라디오로만, 예...

김: 아니, TV에도 잘 어울린다는 말이었습니다. 하하. 반갑습니다, 그리고 또 청취자 여러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양: 예, 제가 좀 떨립니다.

김: 떨려요? 저도 떨려요.

양: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중고등학교 때, 팝스다이얼을 늘 들으며 자랐고 제가 사연도 보내고 그랬는데, 그랬던 분을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뵙고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하니 떨립니다. 솔직히.

김: 네, 이해돼요. 어제가 한영진 후배가 나왔다면서내일. 사실은 내일 오실 분이 먼저 나오셔야 이게 예의인 것 같은데, 이 방송은 중요한 분이 마지막에 나오시네요. 파이널에 나오시네. 최동욱씨가 내일 나오시죠? 지금 양창욱씨께서 떨린다고 하셨는데 저야말로 최동욱씨 그러면 벌벌 떠는 입장이예요.

양: 지금도요?

김: 그럼요, 그 분의 방송을 듣고 제가 영향을 받아서 DJ가 됐죠. 만일에 최동욱씨가 없었더라면 저는 지금 뭐했을까? 이런 생각 들어요.

양: 아, 그 정도 이신가요? 그럼 저는 내일 어떻게 방송을 진행하면 됩니까? 엄청 떨릴 것 같은데요.

김: 그냥 하시면 돼죠. 하하.

양: 선생님한테 그런 분이시군요, 최동욱 선생님이. 저는 그냥 우리나라 최초의 DJ이다, 이 정도만 알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김: 대한민국에서 방송역사에서 최초의 방송 DJ이시죠. 그 전까지만 해도 아나운서나 성우 이런 분들이 원고 들고 읽고, 이렇게 말만 하는 것을 그 분은 혼자 다 했어요. 혼자서 엔지니어도 하고 선곡도 하고 원고도 직접 만들고, 혼자서 다 하셨죠.

양: 그야말로 디스크자키시군요.

김: 아나운서 분들이 지금은 그런 감정이 없지만 당시에 대한민국 아나운서들이 제일 미워한 사람이 최동욱씨였어요.

양: 왜요?

김: 왜냐? 마이크를 뺏었으니까. 그 때는 아나운서가 아니면 마이크를 잡을 수 없었던 시대였거든요.

양: 아, 그런 시절이었군요.

김: 당시에는. 왜냐하면 특별한 직종이었기 때문에 감히 아무나 마이크 앞에서 말할 수 없었어요. 요즘은 뭐 일반 청취자들도 마이크만 갖다대면 안 놀라고 너무들 말들 잘하시잖아요. 그런 분이 내일 나오시는군요. 미리 인사드려야겠네 선배님께.

양: 그럼 자연스럽게 어떻게 데뷔하셨는지 말씀을 주신 셈이 됐는데, 그럼 최동욱 선생님 때문에 DJ로 데뷔하신겁니까?

김: 맞아요, 그 때문에, 최동욱씨 때문에. 10대 후반 젊은이들의 삶이란 어떤 고뇌에 빠지잖아요. 성장하고, 이성에 눈을 뜨고, 철학이란 것도 알게 되고, 소위 인문학 등에 관련돼 10대 후반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는데, 그 때 고민을 많이 할 시절에 어머님이 돌아가십니다. 그러다보니까 개인적으로 삶의 여러가지 방황하는 시기였는데 그 때 최동욱씨의 프로그램, 라디오 팝송을 들으면서 이런 음악도 있구나. 팝송 안에는요, 삶의 희노애락이 다 들어 있어요. 그리고 바로 팝 음악이, 지금은 저는 하나의 학문으로 보는데, 팝 음악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스마트폰을 구상한 스티브 잡스, 그가 바로 팝송애호가죠. 팝송 속에서 상상력을 키우고 그랬습니다. 저 역시도 최동욱씨가 틀어주는 팝송 들으면서 나름대로 성장하고, 방황에서 약간의 이정표를 찾고, 그러면서 나도 DJ가 돼야겠다 이렇게 시작이 된거예요.

양: 예, 그 때는 최동욱 선생님의 탑툰쇼였나요?

김: 예, 맞아요. 그야말로 어떻게 보면 역사적인 프로그램 이름인데, 우리가 그런 문화를 잘 지키지 않아서 사라진 것들이 너무나 많죠.

양: 괜히 제가 죄송스럽네요.

김: 아니, 별 말씀을. 

양: 그런데 이제 64년도가 되면서 19살의 나이로, 우리나라에서 최연소 나이로 데뷔하시게 됩니다.

김: 제가 64년이면은 열아홉이 아니라 한 만 열여덟 이렇게 될 거예요. 64학번이면서 학교를 좀 일찍 들어갔죠, 초등학교를. 그러다 보니까 남들보다도 어린 나이에 먼저 하게 되는데...

양: 아, 그러니까 고등학교를 일단 졸업을 하시고 대학 들어가자마자?

김: 가자마자 운 좋게 우리나라 최초의 FM방송의, 시험 방송하는 데 심부름꾼으로 일자리를 얻게 되죠. 대학에서 방송국 알바를 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또.

양: 그럼요, 지금도 그만한 아르바이트가 없죠, 또.

김: 최고죠, 그렇게 시작이 됐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최동욱 선생님께는 죄송스럽지만 거의 1년 차이로 제가 방송 맛을 봤죠. 그리고 중간에 15년 정도 공백이 생겨요. 개인적으로. 방송 데뷔하고 군대 가고 그 다음에 갔다 와서 금방 안되니까고생하고 이러면서 14~5년 세월을 보내다가 1980년에 방송을 하게 되는데 재밌는게 그 당시에 프로그램 이름을 뭐로 할까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탑툰쇼라고 해달라고 했어요.

양: 아, 최동욱 선생님의?

김: 역사적인 프로그램이니까, 또 제가 제 우상이 진행했던 프로그램이고. 그렇게 해서 본격적인 방송 DJ로 활약한게 80년부터입니다. 그 때까지는 방송 데뷔했고 군대 갔다왔고 세상에 이런 저런 경험하고 그랬죠.

양: 이런 저런 개인사가 있으셨고.

김: 네, 경험하고 방황하고 전문DJ를 목표로 해서 열심히 뛰던 시절이 70년대였죠.

양: 어떻게 보면 준비기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김: 그렇습니다. 준비를 철저히 하고 오래 하고, 한 눈 안 팔고. 강남의, 요즘 뭐 70년대 강남 얘기가 나오는데. 바로 그 때 (제 모습이) 그 친구들이죠. 우리 강남가서 돈 벌자. 부동산~

양: 아, 그 때 그런 얘기가 나왔어요?

김: 우리들 주변에, 나이 스무 서너살이니까 방황하고 갈등하고 그러죠. 잠깐. 돈 벌까? 아니야. 나는 돈 보다는 DJ를 할거야. 그래서 그 때 주변에서 깡투자하던 친구들 돈 많이 벌고 배가 엄청 나오고 벌써 죽은 친구도 있고, 또 지금 병 들어서 병석에 누워있고 그 중에서 제가 제일 건강해요.

양: 음악을 사랑하셨기 때문에요?

김: 아니죠, 돈을 많이 안 가져서. 왜 그런거 있잖아요. 아마 불경에도 그런 말 있을거예요. 많이 가지면 많이 잃어버리고 많이 안 가지면 많이 얻는다. 이런 얘기도 있잖아요. 무소유, 정말 살아보니까 중요한 거에요. 그걸 몰라요, 근데 저도 젊어선 잘 몰랐다가 나이 드니까 알겠더라고요.

양: 예, 그런데 선생님은 원래 DJ를 팝DJ로 시작하셨던거예요?

김: 전문, 전문 팝DJ죠.

양: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 존함 앞에는 최초가 너무 많이 붙어요.

김: 제가, 좀 그렇죠. 최연소, 최초의 팝DJ, 그 다음에 최초의, 최장기 프리랜서DJ...

양: 그럼 처음부터 가요나 이런 쪽은 아예 생각도 안 하시고 팝으로만?

김: 왜 그러냐면요, 가요 보다도 팝송이 저의 삶의 이정표였어요. 뭐였냐면 팝송 속에는 내가 괴롭다. 그러면 팝송 하나 찾아들으면 거기에서 위로가 나와요. 시를 읽는다든지 좋은 책을 읽으면 거기에서 길을 안내해주듯이,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지만, 저의 삶 속에서는 팝송에 길이 많아요. 욕심 낼 때, Dust in the wind 들으면 그 욕심이 싹 사라져버려요. 그리고 어떤 친구, 인간의 우애, 의리 이런 걸 생각할 때는 Heart of gold 노래를 들으면 그렇지, 맞아. 진실한 마음 중요해. 뭐 이렇게 그런게 너무 많아서 저 개인적으로 팝송은 저에게 있어서 학문이었고 모든 거였어요.

양: 그럼 여기서 첫 번째 노래 한 곡, 선곡해주시죠.

김: 그러니까 제가 다시 DJ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그러니까 긴긴 세월 그 DJ자리를 기다리고 기다린 나에게 아주 얘깃거리가 많은 친구죠. 레이프 가렛의 노래를 먼저 듣겠습니다. I was made for dancing.

-I was made for dancing- 

김: 이 친구 때문에 제가 성공의 문을 열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운이라고 봐야될지, 아니면 우리가 인연이라고 봐야될지. 그런데 이제 인연이죠. 삶이란건 운명이고 이런데, 제가 DJ로 막 돌아와서 탑툰쇼 시작을 하는데 첫 번째 날라온 팝 뉴스가 레이프 가렛의 첫 번째 내한공연이 결정됐다는 거예요.

양: 아, 그때요?

김: 레이프 가렛이면 그 때 여고생들이 난리가 났어요. 그 때 중고등학교에서는 가요보다도 팝송이 더 인기였죠.

양: 그렇죠.

김: 거의 뭐 2:8, 3:7 이 정도로 팝송 애호가들이 많았기 때문에 레이프 가렛 잘생겼죠, 난리가 난거예요. 그 때 제가 방송을 하고 있으니. 그런데 상대국에서 김기덕 씨가 날리고 있었잖아요. 제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 분이, 김기덕 씨가 막 피어나는거예요. 그 때 막 폭발 직전이었다고. 근데 거기에 내가 끼어들었는데 어떻게 해? 딱 떠오른게 레이프 가렛을 활용하자. 그래서 레이프 가렛 주간 기획한 사람한테 가서 이거 내가 다 홍보해주겠다 해서 이래가지고 레이프 가렛의 모든 정보를 내가 독점하게 돼요. 독점 특종이 되는거죠. 그러니까 서울 지역, 아니 전국의 여고생들의 레이프 가렛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탑툰쇼를 들어라. 그래서 방송 끝나면 새내기 DJ에게, 방송국에 전화가 한 1~2시간 반 정도는 제 전화가 쇄도한 거죠.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이 친구 덕을 본 거예요.

양: 아, 개인적으로 만나보신 적은 없죠?

김: 아니요, 봤죠.

양: 아, 언제요?

김: 지난 번에도 왔다 갔죠, 작년. 재작년에. 와서 만났죠. 저한테 꼬박꼬박 sir, sir이러고. 존칭을 붙이고 그러더라고요.

양: 실제로 나이가, 연배가?

김: 어리고요, 어리죠. 지금 50대 좀 넘었을 거예요.

양: 아, 그렇군요. 그런 인연이 있는 곡이었군요.

김: 그렇습니다, 저한테는 참 은혜로운 노래죠.

양: 그래서 이제 이 곡으로 뜨셔서...

김: 그렇죠, 김광한이라는 DJ가 있다는 게 금방 알려지게 되고 상대 방송국에서 긴장을 조금씩 하게되고 하지만 그는 계속 강하게 나갔고, 저는 계속 힘들게 따라갔는데 1등보다 2등이 좋더라고요.

양: 그러니까 그 때 당시 80년대에, 저희도 학생 때, 팝송프로그램 하면, '2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하고, 선생님의 팝스다이얼, 이렇게 자주 들었죠. 시간대도 똑같고. 그런데 색깔은 조금씩 달랐던 것 같아요.

김: 그렇죠, 색깔. 어떻게 보세요?

양: 그 때 솔직하게 제가 생각해보면, 훨씬 팝스다이얼이 더 정통 팝송 프로그램이었죠. 훨씬 더 전문성이 있는.

김: 그러니까 2등만 했지. 하하.

양: 그런데 그때 또 이런 게 있었어요. 그 때만 해도 저희들이 아날로그 시대라서 팝송을 녹음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녹음할 수 밖에 없었는데, 팝스다이얼이 음악나올때 멘트를 잘 안섞어서 녹음하는 저희들에게 환호를 받았던 기억은 납니다. 노래나오는 데 DJ멘트가 섞이면 그 노래 녹음 못하지 않습니까?

김: (그런 대목에선) 나도 욕많이 먹은 것 같은데... 하하.

양: 노래 많이 자르셔서요?

김: 그럼요, 바가지로 욕 먹었죠. 왜냐하면 저는 어떤 DJ 타입이냐면 좀 웨스턴 스타일이었어요. 그래서 막 신나게 짠짠짠 거리고 뭐 레이프 가렛의 I was made for dancing 듣겠습니다, 이게 아니라 그냥 음악 탁 틀어놓고 레이프 가렛의 I was~ 이런 식이었거든. 그래서 욕을 좀 많이 먹었죠. 저도.

양: 예, 그런데 당시에 팝송 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 땐 인터넷도 없었잖아요.

김: 공부라기보다는 굶주린 늑대처럼 팝송을 찾아헤매는,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로 이 서울 시내만 돌아다니면 됐죠.

양: 주로 어디를?

김: 그러니까 뭐 자료를 구하려면 은행으로 가고, 은행에 가면 온갖 인쇄물이 다 있었어요. 지금과는 완전히 천지차이지만, 당시에는.

양: 자료를 찾으려고 은행을 가요?

김: 신문, 주간지, 월간지가 다 있었어요. 쫙 보면 그 안에 팝송이야기, 해외 토픽, 그런게 있으면 쭉 눈치 보면서 찢어서 스크랩 갖다 두고 그렇게 해요. 그 다음에 청계천 가서 중고판 사 모으고, 그리고 미군 방송 열심히 듣고. 그리고 국내 라디오가 주로 심야 라디오가 유명했으니까. 밤을 잊은 그대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 이런걸 계속 들으면서 아는 노래 나오면 돌리고, 모르는 노래 나오면 노래 제목이 뭔지 기다렸다가 또 메모하고, 또 돌리고, 왔다갔다 하면서 밤새워 라디오를 듣고, 메모한거 정리하고, 스크랩 신문지 찢어오고 그런거 읽어보고 쭉 펴서 잘 붙이고 뭐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까.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말이 있잖아요. 성공하고 싶으면 생각을 바꿔라,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들고, 그러면 운명이 바뀐다. 성공한다. 이런 말이 있는 것처럼 그게 반복되다 보니까 습관이 들어요. 왜 공부 잘하는 애들 보면요, 부럽죠. 저 놈은 어떻게 저렇게 공부를 잘하나. 그건 습관이예요. 습관 들어버리면, 습관 들어버리면 못 막아요. 그러니까 선과 악을 선택할 때 내가 악을 선택하냐, 선을 선택하냐 할 때 악을 선택하든 선을 선택하든 성공해요. 습관이 들면. 무섭죠 습관이. 그래서 악한 버릇을 가진 사람이 선한 버릇으로 바뀌려면 지금까지 지내왔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잘 될 수 없는거죠. 그렇게 습관이 들다 보니까 공부가 저절로 된 거예요.

양: 네, 그런데 언뜻 또 궁금해지는게 영어가, 그러니깐 영어 hearing이 굉장히 잘 되시고 되셨던 거죠?

김: 역시, 역시 기자는 질문이 다르다. 사실 공부를 못했어요, 학교에서. 특히, 수학 공부를 못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영어공부는 잘했더라고. 대학의 점수도 보니까, 제가 시험볼 때 장학생은 mbc 부산국장까지 했는데 그 친구가 1등만 하고 나는 2등만 하더라고. 그게 다른 점수가 나빠서. 근데 영어가 괜찮았어요. 그런데 그 영어가 괜찮은게 무슨 학문적으로 공부를 해서 괜찮은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팝송을 많이 들어서 그런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양: 그러면 선생님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때부터 팝송을 들으셨나요?

김: 그럼요, 가사 보고 배우는게 아니라 듣고 배운거예요. 그러니까 어린애가 말 배우듯이. 팝송 이런거 듣고 있으면 다 들려요. 그러니까 미국 가서도 겁이 났는데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그냥 말이 되더라니까. 좀 엉터리도 있겠지만, 말이 엉터리면 어때요. 그래서 그런 것이 나에게 팝송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많이 있었고, 영어는 그냥 들리니까 자꾸 들으니까 듣고 그 다음에 판에 보면 뒤에 가사가 써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들으니까 그냥 공부가 돼요. 그래서 제가 앞으로 할 일은 팝송으로 영어 장사하는 것, 가르쳐주는 것, 그거 해서 먹고 살려고 해요.

양: 옛날에 오성식씨인가 그런 거 한 번 했었잖아요? 

김: 본격적으로 안하고, 저는 이제 전문적으로. 농담이예요. 하하.

양: 그러셨군요, 선생님, 김기덕 선생님 얘기가 나왔으니까 두 분 라이벌 구도가 한 10년 가신거죠? 그러니까.

김: 그렇죠. 10년 이상 갔죠.

양: 개인적으로는 친분이 좀 있으세요?

김: 없어요, 사적으로는 없고 공개석상에서는 있는 것처럼 하고. 솔직히. 방송이 요즘은 거짓말 하면 안돼요. 옛날에는 밤낮 감기걸리지 마세요, 이런 헛말만 했는데 이제는 그러면 안돼. 솔직히 말해야 재밌있어 한다고요.

양: 예, 저는 이런 게 늘 혼자 궁금합니다. 남진-나훈아 선생님. 김광한-김기덕 선생, 그리고 허구연-하일성 선생님 등등의 이런 분들, 이런 분들이 과연 서로 친할까, 안 친할까 저는 늘 궁금해요.

김: 안 친해. 사실 말씀드리면 안 친한데, 그 안 친한 것이 사회에서 안 친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일이 바쁜데 뭐 친하고 안 친하고 (그런 거 신경쓸 겨를이 없었죠). 그러나 심성은 다 착하죠. 그리고 조금은 안 친해야지 재밌잖아요.

양: 그렇죠. 그리고 두 분끼리 아주 친하다고 하면 좀 이상해요, 그것도 좀.

김: 그래요, 라이벌이라는게 왜 라이벌인데. 여러 사람한테 보여지기 위해서 그러는건데.

양: 거리감도 있어야 좀 신비스럽고 그렇습니다.

김: 알리와 조지가 게임 앞두고 기자 앞에서 싸우잖아요. 그거 진짜 싸우는 게 아니거든. 자기들 돈 많이 벌게 해주는 팬들 위해서 쇼도 한 번 해주는거지. 그런데 저도 김기덕씨하고 쇼 좀 하고 싶었는데 이게 잘 안되더라고요. 그러다가 몇 년 전에 '놀러와' 인가 그 프로그램에 나가서 한 번 쇼를 했는데 제가 조금 더 흥분했지.

양: 왜요?

김: 그 쪽에서 안하니까. 내가 흥분했지. 그래야 재밌어 할 것 아니야.

양: 네 그렇군요. 하하. 이 쯤에서 두 번째 곡 선곡해 주시죠. 2부 마지막 곡이 될 것 같은데.

김: 음, 제가 결혼할 때 구애 노래로 불렀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 can`t help falling in love.

-can't help falling in love-

양: 설날 아침 '양창욱의 아침저널' 3부입니다. DJ 김광한 선생님과 함께 설날특집 '우리들의 추억 속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어린시절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정말로.

김: 네, 두란두란, 컬쳐클럽, 레이스 가레트가 나를 세상에 널리 알려주는 역할을 해주고 그 다음에 비주얼 시대의 음악, 팝음악이 오디오에서 비디오 시대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뮤직비디오라는 미디어에 제가 손을 대면서 김기덕씨의 독주를 막을 수 있었죠. 영상의 도움이었어요. 제가 미리 일찍이 영상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던 거, 그래서 뭐 오프라인으로 나가서 라디오만 방송하는게 아니라 바깥으로 나가서 거의 매 달 방송 끝나면 여의도에서 차에다 장비 싣고 전국을 다니면서 소위 뮤직비디오 쇼를 합니다. 제가. 그러니 젊은이들이... 설명이 필요 없잖아요.

양: 열광할 수 밖에 없었겠네요.

김: 좋아하는 두란두란이 화면에 나타나지,

양: 그것도 역시 최초로 시도하신 거네요.

김: 그럼요, 그것도 무료로 하니까 내 돈 써가면서. 그래서 제가 된거죠, 사실은. 그러면서 쇼비디오자키까지 이어지게 되는거죠. 이, A-Ha의 Take on me 노래만 하더라도 그 때 제가 처음으로, 미국 해외여행 금지가 88년에 풀려서 그 이전까지는 아무나 못 나갔죠. 김포공항에 가서 언제 비행기타고 외국 가보나 하는 그런 바람을 가졌는데 85년 3월에 드디어 여행을 갑니다. 그것도 자비로.

양: 아, 자비로 가셨어요?

김: 그럼요, 지금은 뭐 방송국 직원들 다 뭐, 회사나 언론인협회 이런데서 돈이 나오잖아요. 방송협회 등. 근데 그 때 저는 제 돈 거금 천만원 썼습니다. 85년 당시 천 만원. 방송장비, 녹화장비 300만원, 그리고 700만원어치 자료들.

양: 근데 그 때 왜 가셨던 거에요?

김: 방송자료, 팝송 DJ가 본고장을 가봐야죠.

양: 그 때 처음 가신거죠?

김: 네. 내 돈 들여가는데도 되게 힘들었어요. 허락을 안 해줘가지고. 지금 생각하면 화가 나. 좌우간 그렇게 해서 일본, 하와이, 미국, 미국 7개도시 돌고 온 게 오늘날 저의 팝송 DJ하는데 많은 영양제가 된 거죠. 천만원이 아니라 거기의 몇 배를 번거죠.

양: 얼마나 체류하셨던 거에요?

김: 약 한 달 돌면서 방송을 한 거죠. 현지에서 전화연결 하고요.

양: 현지에서 또 돌면서 방송하시고, 예.

김: 거기서 레코드사에 갔더니 반가워하면서 저한테 선물을 주겠다 하면서 A-Ha의 Take on me 뮤직비디오를 준거에요. 비디오 테이프를. 이게 세계에서 제일 먼저 너한테 주는거다. 그래 가지고 갖고 와서 방송에서 틀었는데 그 기분은 저만이 알죠. 지금 이런 얘기 하면은 뭐야, 우리 지금 유투브 보면은 다 있는데 뭘 미국까지가 가냐, 젊은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양: 아니요, 저는 공감해요.

김: 실감하진 못하지만 우리 양창욱 앵커는 공감하실거에요.

양: 네. 왜냐하면 듀란듀란, 아하, 이런 수 많은 음악들, 중고등학생 때 독서실에서 항상 저와 함께 있었던 음악이거든요. 이걸 들으면서 제가 수학을 풀곤 했었는데...

김: 영상쇼할 때 듀란듀란 틀면은 듀란듀란 팬들이 꺄악 거리고, 컬쳐클럽 팬들은 우우우 이러고, 파가 갈라져서.

양: 네, 그렇죠. 컬쳐클럽, 참 이쁜 그룹이었죠.

김: 제 자랑 좀 더 할게요. 지금 팝 아이돌들 무대 공연하면 소리 지르죠? 저는 이미 옛날에 이미 다...

양: 네, 30년 전에 이미 다...

김: 뭐 30년전까진 안됐고, 25년 정도. 다 받았어요. 저 혼자서 영상 소개하면 난리나죠. 그리고 그들의 열광이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깐, 다 나한테 오지.

양: 네, 그 분들이 지금 다 40~50대겠네요?

김: 그런가?

양: 이런 얘기는 드리면 안되는군요, 죄송합니다.

김: 아니에요, 저는 아직도 소녀처럼 보이고 이런 이벤트 현장, 음악감상 이런거 하시면 오시는데 제 눈엔 아직도 전부 소녀에요. 소녀고 오빠고 그러니까, 그래 이러는데 눈물도 나. 듀란듀란 팬클럽 25년만에 만났는데 와, 눈물이 나데요. 그들을 보니까. 참 고맙더라고. 너희들이 아직도 그렇게 좋아하는 열정이 살아있구나, 그 가운데는 듀란듀란 팬클럽에 누구누구누구 이름 댈까 말까, 누구누구누구는 결혼도 안 하고 있어요, 이런 얘기들을 해요.

양: 아직도요?

김: 왜, 자기는 결혼이 필요 없다는거에요. 열심히 봉급 모아서 매년 듀란듀란 공연있으면 팔로우해요. 따라다니면서 보고...

양: 세계를요?

김: 그럼요. 유럽 다니면서 보고...

양: 정말 열성팬이시네요.

김: 그거는 칭찬해줘야돼요, 그런 열정은요.

양: 그러네요, 그런데 쇼비디오자키 MC를 하셨던 모습도 저희들한테는 많이 각인이 돼있고 기억이 나는데 그 때 팝 DJ로 활동하시다가 그런 코미디프로그램 MC로 간다, 했을 때 주위의 평판이나 이런 것은 어땠나요?

김: 안 좋았죠. 무슨 김광한이 니가 목걸이하고 반짝이 옷 입고...

양: 네, 의상 독특하셨죠.

김: 실망이 아주 보통이 아니었죠. 그런데 나는 얼굴이 잘나지도 않았으니까 의상으로 튀어보려고 했는데 이게 세련되지 않으니까 처음부터 금방 되겠어요? 그래 가지고 청취자들 많이 놓쳤죠.

양: 아, 그걸로 청취자들 좀 놓쳤어요?

김: 그럼요, 싫어하고.

양: 그런데 그 때 쇼비디오자키가 워낙 인기가 좋아가지고.

김: 근데 제가 하는게 인기보다도 개그맨들이 잘한건데 거기에 제가 등장하면 옆에 픽쳐 인 픽쳐로 영상이 나오잖아요. 옆에. 그거 보려고 오는 친구도 있었고, 그런 걸로 했는데 문제는 DJ가 쇼프로그램에 이제 MC를 봤다 이런게 역사적인 하나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고요, 뮤직비디오를 소개해줬고 등등 그런 것들이 저에게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살 수 있게 하더라고요.

양: 그 때는 평판이 좀 그랬군요. 왜냐하면 선생님에 대해서는 다른 기대치가 있으니.

김: 처음에는요 원래 그게 코미디프로그램이었는데, 코미디프로그램 인기 코미디언 네명을 메인 MC로 썼는데 이게 지리멸렬해요, 한 4~5주 지나가니까. 그래서 급히 응급처치된게 더블 MC를 쓰기로 했는데 더블 MC가 아니라 김광한이 써라, 이런 애기가 나와가지고 한게 적중하게 된 거예요.

양: 하여간 엄청나게 이 프로그램은 인기를 얻었죠.

김: 미국 프로그램, 일본 프로그램 좋은 걸 따다가 제 아이디어를 넣어가지고 거의 한 45~50% 육박하는 그런 거였고, 그 덕에 제가 뭐 CF도 몇 개 해가지고, 셋방살이 면하고 집도 사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거죠.

양: 아,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생각나는 질문인데 선생님, 돈은 많이 버셨어요?

김: 돈은 많이 벌었죠. 엄청 벌어서 그 돈, 저 혼자 안 쓰고 신문배달 고학생들 장학금도 주고, 연예인 중에서 자선공연한 게 제가 최초라고, 전 말하고 싶어요.

양: 아, 그것 역시 최초시군요.

김: 그럼요. 김장훈씨도 좋은 일 많이 하지만 나는 그 어려운 시기에 제가 먼저 했어요. 그래가지고 현장에서 벌어서 베풀고, 갖다 주고, 매일 매일 수입 올라오는거 방송에서 오늘은 200만원, 오늘은 150만원 해서 350만원 들어왔어요. 이러면서...

양: 전액 다?

김: 그럼요, 그리고 이제 찾아주는 연예인들한테 기름값, 그 때 많이는 못 주고 여의도 오는거니까 5만원씩. 제 돈으로.

양: 그럼 선생님 돈이 더 많이 들어갔겠네요?

김: 경비는 제 돈으로 쓰고 수익금은 100%프로 기부하고, 원래는 자선공연 이런거는 경비는 거기서 쓰고 나머지를 기부하는데 저는 그냥 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니까. 뭐, 그런거 했고 그러다 보니까 아까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많이 안 가지니까 건강하게 이렇게 살아주더라고요. 물질을 많이 가졌으면 건강이 많이 나빠졌을 것 같아요.

양: 예, 저는 돈 욕심이 있는데 돈이 잘 안 모여요, 잘.

김: 돈을 모으려고 하면 돈이 안 모이더라고요. 잊어버리면 와요. 근데 또 재밌는게 뭔지 아세요? 돈 없어서 괴로워하고 그럴 것 없어요. 자기가 하는 일 열심히 하면 꼭 생겨요. 이상하데.

양: 네, 물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김: 네, 그거는 뭐 어떤 논문을 쓸 수도 없는건데 그냥 생겨.

양: 여기서 다음 노래, 또 소개를 해주시죠.

김: 듀란듀란 노래죠. 정말 미남, 꽃미남의 시초. 아이돌 듀란듀란의 Rio.

-Rio- 

양: Rio 정말 오랜만에 들어봐습니다.

김: 오늘 설날 아니예요? 지금 쯤이면 좀 일찍 움직이신 분들은 차례를 끝냈고, 광한이가 왜 아직도 안 오냐 기다리는 분은 아직 차례 안 지내셨고...

양: 하하. 연휴가 길어서 이번에 또 차례 마치고 따로 생각하시는 계획들이 많이 있으시더라고요.

김: 그리고 또 연휴가 있으니까 주말에 올라오시는건 좀 편안하실거예요.

양: 그런데 제가 생각을 해보면 요즘 세대들은 팝송을 잘 안 듣는 것 같아요. 선생님.

김: 그건 가요가 좋아지니까.

양: 아, 그런가요. 저희는 일일이 가사를 적으면서, 외우면서 듣곤 했는데.

김: 그런데 한 가지가 빠진거죠. 팝송이 주는 상상력을 못 느끼니까 그게 좀 아쉬워요. 그러니까 상상력을 무슨 책이라던가, 다른 미디어를 통해서 얻었으면 좋겠는데 음악감상은 눈으로 보이는 그런 눈으로 감상하는 것 말고 가슴으로 감상하는 음악을 찾아 들으면 좋겠어요. 우리 가요에도 그런게 있는데 안 들어요. 화려한 것만 보고 그러는데 그러지 말고 팝송이든 가요든 나의 상상력을 자극해주는 음악, 그것을 찾아 들었으면 좋겠어요. 클래식도 좋고. 그런데 팝송이 꼭 외국곡이라는게 아니니까. 싸이가 강남스타일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퀸이니 뭐 흑인음악이니 그런 것들을 다 들었기때문이죠.

양: 네, 그런게 다 자산이 돼서, 예.

김: 싸이는 흑인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오늘날 싸이가 된거예요

양: 그렇군요, 그런데 요즘 보면, 전문 팝 디스크자키 뿐만 아니라 전문DJ들, 전문적인 음악적 소양이나 자질을 갖춘 그런 디스크자키도 없는 것 같아요.

김: 없고, 또 방송국에서 기회도 안 주니까 예를 들어서 불교방송에서 심야에 출연료를 조금 줘도 틀거예요. DJ들이. 그런거 한 3~4시간씩 해봐요, 얼마나 좋아요.

양: 예, 그렇죠. 여하튼 요즘 추세는 팝송들도 잘 안 듣는 것 같고, 전문적인 음악적 소양을 갖춘 디스크자키도 없는 것 같습니다.

김: 그렇다 보니 참 음악이라는 가치를 조금 덜 느낄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사회, 경제, 문화 속에서 문화가 마지막에 나오지만 음악이 인성을 만드는데 정말 중요하고요. 역사적인 인물들은 많은 인물들이 음악을 통해서, 문화, 특히 그 속에 있는 음악을 통해서 어떤 소양이 갖춰졌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되거든요.

양: 네, 그렇군요. 선생님, 시간이 다 되가는데 제가 꼭 드려야 될 질문을 잊을 뻔 했어요. 가장 좋아하는 팝송이 뭐예요?

김: 가장 좋아하는 팝송은 뭐 다 좋아하긴 하지만, 흑인들의 아픔, 노예 진실의 절규, 블루스를 제일 좋아해요.

양: 곡으로는요?

김: 곡은 뭐 한 두곡이 아니니까, 아까 얘기한 우리 아내에게 결혼해달라고 불렀던 그런 노래 정도. Can't help falling in love 같은거.

양: 그렇군요, 어쨌든 설날 아침에 선생님, 이 이름만으로도 우리나라 디스크 자키계를 대표하시는 선생님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니까 참 푸근하고 영광스럽고 그렇습니다.

김: 저도요, 미래의 양창욱씨 걸음걸음을 지켜보겠어요. 앵커, 양창욱!

양: 네, 감사하고 뭉클합니다. 끝으로 청취자 여러분들에게 새해 인사 한 번 더 해주시죠.

김: 여러분 고향가시거나, 혹은 일찍이 차례지내고 오시는 분이나 모두 안전운전하시고요, 건강하시고요, 그 다음에, 음악 많이 사랑해주세요. TV보다도 라디오 많이 들어주세요. 특히 불교방송이요! 여러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양: 예, 마지막 곡 하나 선곡해주시죠.

김: 마이클 잭슨이 아주 어렸을 때 불렀던 노래죠. Ben이라는 건데요. 쥐 한 마리와 어린 소년의 소통, 이것이 우리 삶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인간과 동물의 소통,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쥐 한 마리, 그리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병든 소년. 둘의 우정을 그린 영화의 주제가입니다. Ben 들려드릴게요. 안녕히 계세요.

양: 예, 설날특집, '우리들의 추억 속으로', 오늘 설날아침에는 그 두 번째 시간으로 8, 90년대 전설의 DJ, 김광한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내일 아침 이 시간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양창욱 / wook1410@hanmail.net

양창욱  wook1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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