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욱(이하 양): 2일 '양창욱의 아침저널'[FM 101.9 MHz (서울)] 1부, '불교를 말하다' 시작해보겠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가면 '나눔의 집'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존 할머님들이 살아계신, 지내고 계신, 그런 곳이죠. 모두 다 여기서 살고 계신건 아니고요. 생존자 가운데 아홉분 정도가 이 곳에 머무르고 계신다고 합니다.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님 전화연결 돼있습니다. 소장님 나와계시죠?

안신권(이하 안): 아, 예. 안녕하세요.

양: 네,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 감사드립니다. 우선 이 나눔의 집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거잖아요.

안: 예, 맞습니다.

양: 원래부터 여기에 있었습니까?

안: 아, 아닙니다. 1992년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고, 이 분들이 당시 생계 조차 막막하다. 당시 불교인권위원회 회장이신 송월주 큰 스님 등이 전 국민 모금 활동을 통해서 서울 서교동에서 전셋집으로 개원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 혜화동, 명문동을 거쳐서 1995년 12월에 여기 경기도 광주로 영구 이전했습니다.

양: 원래는 마포 서교동에, 서울에 있었는데 이것이 이제 월주스님 등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경기도 광주의 나눔의 집으로 옮겨와 둥지를 틀었군요.

안: 네.

양: 제가 조금 전 생존해 계시는 할머님들 가운데, 아홉분 정도가 이 곳에 계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맞습니까?

안: 아, 지금 6월 11일날 김외환 할머니가 타계하시고, 아홉분이었는데 또 그 사이에 서산에 계시던 하수연 할머님이 들어오셨어요. 그래서 지금은 열분입니다.

양: 아, 지금은 열분이 계시는거군요.

안: 네, 맞습니다.

양: 지금 대부분 할머님들 연세가 참 많으시죠.

안: 그렇죠, 평균 90이고 초고령자로서 노인성 질환과 장애가 있어서요. 병원진료를 많이 다니고 있습니다. 메르스 때문에 자제를 하고 그렇지만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해서 국내외 증언을 다니십니다.

양: 그러시군요. 어떻게, 어떤 활동을 주로 하시고, 고령이신데, 어떤 생활을 하시는지 참 궁금해요.

안: 올해는 병원 진료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관내에 병원에 다니시면서 한 달에 한번은 서울에 가시고 그리고 증언을 많이 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증언을 많이 다니시고 올해도 우리가 7월 11일부터 18일까지 미국을 가고요, 9월부터는 일본의 도쿄나 교토, 오사카, 홋카이도, 오키나와 증언을 통해서 일본 전후세대에게 이런 역사적 사실을 또 알립니다.

양: 그렇군요, 국내외적으로 증언활동에 많이 주력을 하시는군요. 보통 한 번 밖으로 나가시면 할머님들께서 연세가 많으셔서 많이 힘드시겠어요.

안: 그래서 저희 열 분이 계시지만 움직일 수 있는 분이 네 분 정도 되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또 해외만 나가시면 또 할머님들이 힘이 난다고 하셔서...

양: 그건 또 어떤 이유일까요?

안: 아무래도 이 문제를 꼭 해결하고 알려야겠다라는 의지가 강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양: 예, 그런 의지 때문에...

안: 그래서 오히려 저희가 시차 때문에 적응을 못하는데 어르신들은 시차적응도 잘하시고 식사도 잘하시고 아주 건강하게 증언을 하십니다.

양: 네, 그렇군요. 참 반가운 말씀입니다. 소장님께서는 이 나눔의 집과 어떤 인연으로 소장님까지 맡게 되셨습니까?

안: 저도 스님의 소개로 인연이 닿았는데 저도 처음에 나눔의 집이 언론에 나오고 해서 여러 가지로 풍족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까 여러 가지 어려움이 크더라고요. 스님께서 사회복지 공부를 하니까 여기 와서 일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양: 아, 여기서 스님은 월주스님을 말씀하시는건가요?

안: 예

양: 예,예. 그래서 인연을 맺게 되셨군요. 지금 가장 나눔의 집을 운영하시면서 힘든 점, 어려운 점은 어떤게 있을까요? 방금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저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국민적 관심도 높고 늘 주목도 받고 그래서 여러가지로 풍요롭지 않을까, 생활하시는데 넉넉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얼핏 들었는데, 네...

안: 이게 첫 째, 여기 나눔의 집을 국가가 운영하는 줄 압니다. 그런데 저희가 민간이다보니까 국가 지원은 제한되어 있거든요. 그런 어려움이 있고 두 번째는 이게 24년 정도 지속되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느냐, 마치 남의 얘기 하듯이 하고.

양: 예, 그 고통과 슬픔에 무뎌지고 무감각해지고 무관심해 지는거죠.

안: 네, 그 다음에 가장 중요한건 할머니들이 시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외교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변하지 않으니까 할머니들이 역사의 한을 품고 가시는게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데 정부가 힘들더라도 좀 더 많은 노력을 해서 일본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하는, 그런게 중요한거 같아요. 그리고 일반 국민들은 이게 당시 태어난 여성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안이니까 이게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할머니, 나의 어머니, 다시 말하면 우리 미래의 딸들의 얘기다, 이렇게 인식하는게 중요한 것 같은데 아직까지 우리 국민들이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양: 그렇군요. 이게 세월이 너무 많이 감으로써 무관심해지고 관심이 멀어지고 그런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인데. 이런 것들을 국가차원에서 추모 공원화 시켜주면은, 굉장히 의미가 있고 되새기는 맛도 있고 그럴 것 같은데 이 추모공원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안: 저희가 추모공원과 기념사업을 하는 것은 저희가 할머니들을 모시고 미국에 갔을 때, 홀로코스트 센터가 그런 역할을 하더라고요. 미국인들한테 역사나 인권의 소중함을 알려주면서,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교육하는데 큰 역할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시아의 인권과 교육의 허브는 나눔의 집이다, 왜냐하면 할머니들이 산 역사가 있고, 인권의 소중함을 알리는 역할을 하니까. 이런 역사를 통해서 아시아의 많은 이들한테 인권의 소중함과 역사의 중요성을 알리겠다, 그런데 이게 민간차원의 시설이다보니까 국가지원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막상 제가 예산 때문에 국회를 방문하면,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역예산에 밀립니다. 이게 광범위한 범위에서는 이거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양: 말들을 다 그렇게하죠.

안: 네,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은 지역예산에도 밀리는 그런 형국입니다.

양: 예, 그렇군요. 위안부 협상이 진전이 있을 것이다, 없을 것이다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고요. 일본 산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문제도 성과가 있을 것인지, 마지막까지 지켜봐야하고 현재 한일 간 가장 쟁점이 되는 현안들은 현재 그런 상황인 것 같은데, 저는 오히려 나눔의 집의 이런 추모 공원화 사업 이런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이게 더 궁금했어요, 소장님.

양: 그쵸, 그런게 가장 중요하죠. 왜냐하면 이런 역사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잊혀지잖아요. 추모기념사업을 통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고 이거는 그대로 역사에 남아야하거든요. 역사의 소중함은, 우리가 미국에서 요꼬 이야기를 일본 사람이 썼는데 그 요꼬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 사람은 가해자고 일본 사람은 피해자로 변질돼 있거든요. 현장에서 올바른 역사를 배우면 왜곡된 역사의식은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양: 예,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저희들도 함께 노력을 하겠습니다.

안: 예, 고맙습니다.

양: 네, 고맙습니다.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님이었습니다.

 



양창욱 / wook1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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