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진규 희망연구소 소장
양창욱 : 5월 29일 금요일 '양창욱의 아침저널'[FM 101.9 MHz (서울)] 3부입니다.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마음 편하게 마냥 그렇게 행복하게 사시는 분들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늘 버겁고 힘겹고, 하루하루 일상에 쫓기면서 사시는 분들이 대부분인데요, 저도 물론 그렇고요. 오늘 이 분 말씀 들으면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금요한마당, 주말이 좋다'에서는 희망연구소 소장 서진규 선생님 모셨습니다. 선생님, 나와계시죠?

서진규 : 예, 안녕하세요.

양창욱 : 예, 아침 일찍 감사드립니다.

서진규 : 아유, 고맙습니다.

양창욱 : 요즘은 강연활동에 가장 바쁘실 것 같습니다.

서진규 : 예, 그게 주 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창욱 : 언제부터 이게 업이 되셨죠?

서진규 : 99년에 제가 처음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그 때 알려지고 나서, 책이 나와고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 다음에 이제 자동으로 따라오는 게 강연 초청이더라고요.

양창욱 : 맞습니다. 책이 히트하면, 강연하셔야되요. 강연하고 나서 책이 나가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그 반대 경우는 많더라고요.

서진규 : 예.

양창욱 : 선생님, 그럼 요즘은 일주일에 몇 번이나 강연을 하고 계십니까?

서진규 : 요즘은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제일 먼저 자르는 게 교육 프로그램이더라고요.

양창욱 : 아, 그렇습니까.

서진규 : 요즘은 그렇게 막 바쁘지는 않습니다.

양창욱 : 아 강연활동이 예전에 비해서 조금 좀 줄어든 그런 상황이지만, 그래도 뭐...

서진규 : 예전에는 뭐 하루에 두 개, 어떨 때는 세 군데 이럴 때가 많았어요.

양창욱 : 그러시구나. 그럴 때는 오히려 너무 피곤하고 그러실 수도 있었겠어요.

서진규 : 예, 좀 힘들었지만, 그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양창욱 : 선생님, 저술활동을 99년에 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거죠? 방송활동 보다? 어떻게 되죠, 순서가?

서진규 : 순서가 방송이 먼저였어요.

양창욱 : 아, 방송을 먼저 하셨고, 방송활동 하시고 그다음 저술활동, 책이 나오고, 강연활동을 하시고, 이렇게 순서가 되는군요?

서진규 : 방송이라도 하나에요. 사실. 그 전에 매거진 같은 데서 인터뷰가 좀 있었고요.

양창욱 : 아, 인터뷰, 예예...

서진규 : 그런데 KBS 일요스페셜 있잖아요. 거기서 그 때 마침 98년, 99년 IMF로 한국이 굉장히 어려웠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그런 매체들이 참 좋은 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양창욱 : 그렇습니까.

서진규 : 그러면서 힘든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 주기 위해서 찾아낸 스토리가 바로 제 스토리였어요.

양창욱 : 예, 희망연구소는 언제 설립하신 겁니까?

서진규 : 희망연구소는 좀 형식적인 면이 많아요.

양창욱 : 구체적인 활동을 한다, 이런 거 보다는...

서진규 : 예, 그렇죠. 대외적으로 세금문제 관계로 이런 게 필요하다, 해야 된다, 이래서 한 거고.

양창욱 : 하하, 정말 솔직하십니다. 세금문제때문에 또 이걸 하시고 계시고...

서진규 : 예.

양창욱 : 자, 이제부터 선생님 삶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씀을 나눠보겠습니다. 제가 한 번 주욱~ 프로필이나 이런 걸 사전에 봤는데, 정말 기구하시고, 드라마틱하십니다. 어떤 시절 얘기를 가장 들려주고 싶습니까? 오늘 아침에는?

서진규 : 글쎄요. 뭐 옛날 얘기부터 시작하면 우리가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할 시간이 별로 없지만요, 어릴 때 굉장히 형편이 어려웠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고, 그런데 사실은 저는 지금 돌이켜볼 때는 참 기구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전체적으로 보면 저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양창욱 : 왜 그렇게 판단하십니까?

서진규 : 지금 제가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이유도 뭡니까. 제가 젊어서 기구하고 힘든 시절 없이 뭔가를 지금 이 정도로 이뤘다면 별로 스토리 감도 아니죠. 그리고 또 더 중요한 것은 스토리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스토리가 사실은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아주 돈 많고 편하게 사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많거든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아, 나도 그러면 이 힘든 시절이 나한테 자양분이 되고 미래에 큰 꿈도 이룰 수 있고 행복한 시절이 올 수 있겠구나’는 하는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잖아요. 제가 그 증거가 될 수 있잖아요.

양창욱 : 그렇죠. 더군다나 선생님이 삶에서 직접 체험하신 거를 들려주신거기 때문에 저희들에게는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고요.

서진규 : 예.

양창욱 : 선생님, 그런데 제가 선생님의 지난 날들을 주욱 살펴보니까 제 나름대로, 포인트라고 하기에는 좀 뭐하지만, 어쨌든 무척 궁금한 대목들을 발견했어요. 우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가난하게 보냈다는 거는 뭐, 선생님 연배러 보면, 흔한 일이 아닌가 이렇게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전쟁 전후라 으례 그러려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미국에 단돈 100달러 만 들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런 지점에서는 다르게 생각이 들더라고요. 굉장히 어린 나이신데 그 때가.

서진규 : 그런데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가난했던 사람들은 미국에 대한 동경이라든가 미국 사람들에 대한 동경, 부러움 이런 게 좀 많았어요. 6·25 때도 뭐 미군들이 와서...

양창욱 : 네, 초콜렛 주고.

서진규 : 예, 초콜렛. 또 길가다가도 미군이 지나가면 ‘헬로우 껌, 헬로우 초콜렛’ 하면 툭 던져주고, 그 때 우리가 살 수도 없는 그런 걸 정말 쉽게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부유한 사람들이다,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릴 때 뭐라고 할까요. 확고하진 않지만 어떤 동경 같은 게 있었어요.

양창욱 : 그러셨군요.

서진규 : 그래도 저한테는 뭐 미국 갈 길은 없었죠. 사실은.

양창욱 : 그런데 스무 살 때 정말 비행기 타서 가셨어요. 영어도 안되고 그런 상황인데 무작정 가셨다... 이게 정말 쉽지않은데...

서진규 : 그런데 부처님도 그러셨지만 그런 말이 있잖아요. 한쪽 문이 닫히면은 다른 한쪽 문이 열린다고. 그 당시에 제가 그래도 겨우 길을 뚫어가지고 고등학교까진 졸업을 해요. 원래는 우리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보내고 말라 그러셨는데.

양창욱 : 아유, 예... 가난해서, 집이 어려우니까...

서진규 : 그렇게 했는데, 졸업하니깐 가발공장, 직공, 식당 종업원, 식모살이 이런 삶을 살게 되잖아요. 어릴 때부터 그래도 저는 미래에 박사도 되고, 정의의 사도가 돼서 잘못된 이 사회, 이거를 확 뜯어고친다,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이러고 자라왔는데, 그나마 사회에서 밑바닥으로 치는 거기에서 제가 막 버둥거리고 있으니까 완전 죽고싶은 시절이었죠. 엎친 데 덮친다고 당시 연애를 했는데 실연을 해요.


양창욱 : 아, 그러셨군요.

서진규 : 재밌는 게 위기가 기회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너무도 현실이 어려운 데다가 실연까지 하고 나니까 진짜 죽을 용기도 생기고, 그런 각오까지도 생겼는데, 그래도 겁이 나서 빨리 못 죽고 쉽게 죽을 방법 찾아다니다가 미국 가정에서 식모 구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게 되죠. 

양창욱 : 아, 그래서 미국행을 택하게 되셨군요.

서진규 : 그렇죠.

양창욱 : 예. 거기서 그래서 열심히 일을 또 하시고, 결혼까지 하고 이러시다가 제가 또 궁금해지는 대목이, 거기서 이제 또 미군육군 사병으로 입대하십니다.

서진규 : 예.

양창욱 : 이게 미국가신지 얼마나 있다가 육군 사병으로 입대하신 거죠?

서진규 : 6년 후에.

양창욱 : 6년 후에. 20살, 21살 때 가서 6년 만에 미군 육군 사병으로 입대를 하는 데, 이게 정말 힘듭니다. 미국 육군 사병들... 제가 미군 부대, 카투사를 나와서 아는 데, 사실 한국에서 복무하는 카투사들은 편하지만 미국 육군들은 본국에서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국인 여성의 힘으로 사병으로 입대해 마치기가 정말 쉽지 않았을텐데, 계기가 뭐였죠? 미국 육군으로 가셔야 했던...

서진규 : 그것도 참 웃기다고 하면 웃기는 계기죠. 제가 사랑 때문에 결혼을 하기는 했는데 결국은 매 맞는 아내로 전락을 하잖아요.

양창욱 : 그렇죠. 예.

서진규 : 매를 맞으면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거기서 그냥 그대로 겁에 질려서 계속 매 맞는 아내로 머무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분노 같은 게 막 싹트면서 복수를 계획하게 되고, 결국은 복수의 방법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게 잠이 들었을 때 그 사람을 찔러 죽이는, 그런 상상을 합니다. 그때도 하늘이 도 저를 도운 것 같아요. 그럴 수 있었는데, 능히 그 분노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는데, 마침 그때 저한테는 얘기가 생겼잖아요.

양창욱 : 예, 그랬군요.

서진규 : 그 모성애라는 것이 세상에서 어떨 때는 가장 큰 힘 가운데 하나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딸을 보면서 딸 신세를, 딸의 인생을 완전히 망치고 싶지 않다는, 그래서 딸한테 맹세를 하고 거기서 피신할 기회를 찾는 데 그 때 마침 군대를 들어가게 돼요.

양창욱 : 예, 많이 힘들셨죠. 들어가셔서.

서진규 : 예, 아주 처음에 입대했을 때는 아기 난 지 8개월, 유산한지 1개월, 그러고 또 28살이었잖아요. 만으로 저보다 열 살이 어린 훈련병들하고 같이, 키도 큰 애들하고 같이 훈련을 받는데, 윗몸일으키기 한 번 못하고, 구보 3분을 못 버티던 그런 체력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데, 그때는 완전히 죽을 지경이었지만 사람의 결심이 얼마나 큰 힘을 가져오는지... 그래서 저는 성공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항상 주장을 하거든요. 그때 제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모성애, 그리고 정의의 사도가 되겠다는 꿈, 또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너무 나 자신이 가엽잖아요. 솔직히 불쌍하고.. 그런 가여운 나 자신에 대한 연민, 또 오기, 이 사회에 대한 오기, 이런 것들을 다 활용했어요. 그러고 막 쓰러져 있을 때 스스로에게 ‘너는 이 세상에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너는 큰 인물이 돼서 너처럼 억울한 사람들을 네가 구해줄 것이다’ 막 이런 식으로 자기를 영웅화시키기도 하고...

양창욱 :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 스스로를 다잡으셨군요.

서진규 : 예, 그런데 그것들을 다 자기가 만들어내 하는 건 줄 알면서도 이게 또 먹혀요 인간에게는. 다시 일어나서 목숨 걸고 뛰고 그러다가 두 달 보병 훈련 끝날 때는 제가 200명 중에 1등으로 졸업을 하죠.

양창욱 : 예, 참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 극복하려고 스스로 만들어낸 강인한 의지나, 기른 신념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 세월들을 다 돌파하고 극복하셨네요. 그래서 장교까지 되시고 결국에는. 그렇게 군 생활을 20년 하신 거죠?

서진규 : 예, 20년 했습니다.

양창욱 : 예, 20년을 하시고... 그러고 나서는 하버드 대학교에, 하버드 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 하십니다.

서진규 : 하버드 대학교 석사는, 군에 있을 때, 군에 있는 지역전문가라는 프로그램 중에 하나가 석사학위까지 보내줘요. 대학교를...

양창욱 : 아, 네. 그래서 그때 미국 대위 신분으로, 그 때가 이제 마흔두 살, 42세 때 공부를 시작하시게 되는 군요.

서진규 : 하버드를 생각했던 것은, 그 전에는 제가 하버드 갈려고 생각도 안 했는데, 지역전문가 도전하는 과정에서 미군에서 이런 식으로 저한테 얘기를 했어요.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출신 여자기 때문에 너는 틀림없이 실패할 거라고... 왜냐하면 일본 남자들이 나를 아주 멸시하고 무시하고 그래서 분명히 실패한다... 그래서 처음엔 떨어뜨렸잖아요. 저를. 그래서 제가 워싱턴 D.C 가서 설득해가지고 겨우 하루 걸려서 시험 케이스로 뽑힌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일본 남자들에게 대항을, 대항을 한다보기 보다도 여하튼 그들이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무기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그 때 떠오른 무기가 일본사람들은 영어에 약해요. 그래서 영어권, 당시 이미 저는 일본어를 공부해가지고 일본어는 아주 원어민처럼 할 수 있었거든요

양창욱 : 아, 이미요. 그 당시에?

서진규 : 네, 그래서, 그러면 또 한 가지, 그들의 약점은 바로 하버드에 대한 것이다. 그래가지고 무기를 갖추느라 하버드를 생각하게 되고 하버드에 두 군데에 도전했는데 운좋게도 두 군데 다 합격해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마흔 셋에 시작을 하죠. 스무 살 어린 천재들하고 똑같이 경쟁을 하는데, 이게 공부의 비법이나 삶의 비법도 자기 마음가짐이에요. 항상 부처님 말씀하시는 것 있잖아요.

양창욱 : 예, 그럼요. 마음먹기에 달려 있죠.

서진규 : 그렇죠. 제 마음이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공부가 절대로 필요하다, 하버드 졸업장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공부가 잘 돼 가지고, 2년 후에는 A- 학점을 따면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잖아요.

양창욱 : 예예. 그렇군요.

서진규 : 그리고 이제 어릴 때부터 꿈이 박사였기 때문에 마침 하버드에 들어온 김에 신청을 하자 그래가지고 첫 해는 떨어졌지만 이듬해 32명 지원했는데 딱 2명 뽑았음에도 합격을 합니다. 그래서 박사과정에 들어서게 되죠.

양창욱 : 그렇군요. 그래서 박사는 2006년에 결국 따시고.

서진규 : 군대 제대하고 나서.

양창욱 : 아까 힘든 시절 선생님을 지켜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모성애라면서 따님 말씀을 하셨는데, 그 따님께서도 하버드에 재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모녀가 함께 하버드에 다니는 그런 진기록도 나옵니다. 그쵸?

서진규 : 우리 딸이 그 때 일요스페셜 PD가 물어봤어요. ‘넌 어릴 때 꿈이 뭐였니?’ 그랬더니 그 아이는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의 복제인간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양창욱 : 예예, 아유... 참, 이쁜 말이네요.

서진규 : 엄마가 하버드를 갔기 때문에 저도 하버드 가겠다는 결심으로 준비를 하고, 처음에는 떨어졌어요.

양창욱 : 아, 그랬군요.

서진규 : 미국 대통령상까지 탄 애가 하버드에는 떨어지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제가 미군을 20년으로 제대하고, 하버드 박사과정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는 거죠.

양창욱 : 아, 또 그게 그렇게 계기가 되는군요.

서진규 : 제가 거기 가서 공부하는 동안 딸이 다시 도전을 해가지고 하버드로 3학년부터 전학을 와요. 그때부터 우리 모녀는 하버드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하죠.

양창욱 : 최초의 모녀 하버드 재학생으로...

서진규 : 예.

양창욱 : 그랬군요, 아휴, 선생님 말씀을 좀 더 듣고 싶은데, 정말 선생님 인생 전체가 저희들에게 다 귀감이 되는 주옥같은 말씀들인데, 시간이 다 돼서 오늘은 여기서 좀 줄여야겠습니다.

서진규 : 예예.

양창욱 : 고맙습니다. 선생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서진규 : 예, 감사합니다.

양창욱 : 예. 지금까지 희망연구소장 서진규 선생님과 말씀 나눠봤습니다.
 

양창욱 / wook1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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