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욱 : 2일 '양창욱의 아침저널' [FM 101.9 MHz (서울)] 1부, '불교를 말하다' 시간입니다. ‘법화경’에 대해서 여러분들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법화경’이 부처님 스스로도 최고의 경전이라고 칭송을 한 적이 많다고 하네요. 최고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데 오늘과 내일 ‘불교를 말하다’에서는 ‘법화경’을 좀 더 쉽게 현대사회에 접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공부 해보겠습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이기운 교수님과 전화연결 돼 있습니다. 교수님 나와 계시죠?
 
이기운 : 예, 안녕하십니까. 이기운입니다.

양창욱 : 예, 아침 일찍 감사드립니다.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경전들이 참 많잖아요? 어떤 것들이 주로 있죠?

이기운 : 뭐, 크게 분류한다면은 초기 불교 경전들로는 아함경류들이 있죠. 그걸 보통 이제 빨리어 경전을 ‘니까야’라고 하는데 그래서 한역 경전으론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 뭐 이런 경전들이 있고, 그다음에 이제 대승불교 경전들로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뭐 이 가운데 반야경에는 이제 금강경, 반야심경, 잘 아시는. 이런 경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창욱 : 예, 그런 경전들이. 그런 경전들이 다 부처님 말씀을 다르게 전한 건가요? 아니면 다른 내용으로 전하는 건가요?
 
이기운 : 예. 각각 경전마다 이제 의미가, 의의가 있는 거죠. 아함경류들은 주로 이제 우리 생사고해의 문제, 이런 문제를 해탈하는 그런 법문들로 주로 돼 있고 대승경전들은 이제 보살도를 닦아서...

양창욱 : 저, 교수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전화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저희가 전화를 다시 드리겠습니다.
 
이기운 : 아, 그래요?
 
양창욱 : 예, 전화 상태가 지금 안 좋아서. 저희가 전화를 다시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전화 끊고 좀 기다려주십시오. ‘법화경’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던 도중에,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이기운 교수님과 ‘법화경’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전화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지금 전화를 다시 연결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다시 전화 연결 됐습니다. 제 말씀 잘 들리시죠?

이기운 : 예, 저는 괜찮습니다.

양창욱 : 예예. 그래서 그 경전들이 각기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부처님 말씀들을 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기운 : 예. 그래서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아함경류는 주로 이제 우리가 인생, 삶 속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생사고해를 어떻게 벗어날 거이냐, 이제 이런 법문들이 많이 들어있고, 대승경전류들은 이제 바라밀행, 우리가 육바라밀, 십바라밀 이렇게 얘기하는데 바라밀행, 보살도를 닦아서 불도에 들어가는, 성불에 이르는, 이런 법문들이 주로 주류를 이루고 있죠. 그런 차이가 좀 있습니다.
 
양창욱 : 예. 그렇다면 오늘 공부할 ‘법화경’은요?
 
이기운 : 예. 그래서 ‘법화경’은 금강경도 그렇지만 많은 불자들이 읽고 공부하고 있고 또 뭐 돌아가신 분들을 천도하는 그러한 경(經)으로도 많이 읽히고 있고. 어떻게 보면 가장 친근한 경전 중에 하난데 이 ‘법화경’은 대승경전들의 모든 특징, 이런 것들을 어떻게 보면 통합하고 있는 그런 경전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죠.

양창욱 : 예. 근데 이게 참 ‘법화경’의 특징이 제가 좀 얇게 알고 있는 바로는, 문장이 아름답다는 거, 흔히. 참 좋은 말씀들이 많다는 거. 우리 일반 불자들이 느끼기에, 그래도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 같아요. 혼자는 쉽지 않고 이제 제대로 공부를 하려면 도움이 필요한 현실인데 이 ‘법화경’을 대승불교 정점에 핀 아름다운 연꽃이다, 이렇게 표현하신 분도 많더라고요.

이기운 : 예. 그거는 이제 뭐 ‘법화경’이라는 그 경(經) 이름이 “삿다마 푼다리카 수트라”거든요. 삿다마라는 것은 묘법이라는 뜻이고 푼다리카가 이제 백련이란 뜻입니다, 백연꽃. 그래서 부처님의 진실한, 부처님의 본마음. 어떻게 우리 중생을 계도할 거냐 하는 부처님의 이상에 나오신 불법, 그 근본의 뜻을 그 묘법으로 표현했고 그 묘법은 이제 비유로 푼다리카, 그 백연꽃으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런 연꽃에 대한 그런 말씀을 한 것 같고, 대승불교의 정점이라고 보는 것은 대승 모든 경전들이 다 보살도를 닦아서 불도에 들어가는 그런 법문을 다 말한다 그러면 이 ‘법화경’에서는 대승의 보살뿐만 아니라 성문연각, 우리가 생사를 해탈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을 근본 경전에서는 많이 말씀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승들, 성문연각들도 다 불도에 들어가는 법문이다. 그래서 흔히 ‘법화경’은 “회삼귀일의 법문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는데 이승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다 불도로 인도하는 경(經), 이런 이제 법문을 ‘법화경’에서 설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대승불교의 정점에 있는 그런 법문의 경전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 같아요.

양창욱 : 예, 그렇군요. 이 ‘법화경’에 있는 내용들, 구체적으로 우선 몇 구절씩만 소개를 좀 해주세요. 문장들을.

이기운 : 예. 우선 이제 ‘법화경’에는 설법 체계가 이렇게 부처님의 법문을 그대로 비유나 어떤 설명 없이 그대로 전하는 법설의 법문이 있고, 그거를 이제 비유적으로 풀어서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인연법을 들어서 설명하는 법문이 있고. 이렇게 세 가지 체계로 돼 있습니다.

양창욱 : 예예, 비유를 들어서.

이기운 : 예. 그래서 그중에 이제 이렇게 비유를 드는 그런 내용들이 굉장히 우리 삶에 와 닿고 우리 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그런 법문들이 아름다운 비유로 많이 들어있는데, 그게 이제 대표적으로 “삼계는 화택이다” 이런 표현이 있거든요?
 
양창욱 : 예.

이기운 :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이제 욕계, 색계, 무색계,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 세상은 삼계화택, '불타는 집'과 같다.
 
양창욱 : 아아.
 
이기운 :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은 생각이 나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생사고해의 삶 속에 빠져있는데 이게 곧 불타는 집 속에 있는 우리 중생들...
 
양창욱 : 아, 그렇군요.
 
이기운 : 모습이다, 이렇게 이제 비유를 하죠. 또 장자궁자 비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래는 부처님의 아들이었는데 장자가 옛날에 아들을 잃어버려요.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이 아들을 찾게 되는 과정에서 그 아들을 처음에 이 아들을 만나게 되니까 그 아들이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죠. 거지가 돼 있어서. 아버지는 부자가 돼 있는데. 그래서 이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똥 치우는 일, 밭가는 일, 집안일 시키는 일 하고 나중에 모든 재산과 재물을 물려주게 되는데 그 과정이 우리 부처님이 우리 중생을 제도하는 모습과 똑같다. 그런 모습을 장자궁자로, 장자는 그니까 부처님이고 궁자는, 거지는, 거지 아들은 우리 중생을 의미한다는 거죠.

양창욱 : 아, 예예.

이기운 : 그니까 우리가 갖가지 삼계윤회 속에서 갖가지 행위를 통해서 선업, 악업을 짓고 이렇게 살아가다 보니까 우리가 부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거죠.
 
양창욱 : 그렇죠, 예예.
 
이기운 : 우리는 본래 불성을 가진 부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뭐 누구든지 다 성문이든, 아라한이든 부자들,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다 남녀노소가 다 부처가 될 수 있다 이런 법문을 장자궁자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양창욱 : 예, 알겠습니다. 교수님, 내일 또 계속 이 ‘법화경’ 공부 이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기운 : 예, 감사합니다.
 
양창욱 : 지금까지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이기운 교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양창욱 : 6일 ‘양창욱의 아침저널’ [FM 101.9 MHz(서울)] 1부, ‘불교를 말하다’ 시간입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불교를 말하다'에서 법화경에 대해서 공부를 했었죠. 이 법화경 말씀이 현대사회에 어떻게 접목이 될 것이냐,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고 얘기를 들어봤는데 오늘 좀 이어가보겠습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이기운 교수님 오늘도 연결돼 있습니다. 교수님 나와 계시죠?

이기운 : 네, 안녕하십니까. 이기운입니다.

양창욱 : 예예. 지난주 목요일 바로 그 다음날 모시려고, 금요일 날 모시려고 그랬었는데 아주 급한 현안이, 사정이 생겨서 오늘로 또 하루 밀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법화경에 대해서 얘기를 나눌 때 이 얘기를 하다가 시간이 다 돼 못 여쭤봤습니다. 이웃 종교인 기독교 신약성서가 법화경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주장도 있던데 이게 맞습니까?

이기운 : 예. 그 여부를 떠나서 이제 이러한 문제가 생긴 게 러시아의 니콜라스 노토비치라고 하는 분이 인도, 네팔 등을 다니면서 이제 고증을 통하여 예수의 기록, 이런 것들을 찾았다 그러죠. 여기에서 이제 사본을 찍고 이러면서 이런 것을 바탕으로 해서 국내 모 교수님이 불교 경전, 특히 불교의 법화경과 기독교 성서를 비교하면서 그게 영향을 줬다 이런 말씀을 한 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법화경의 장자궁자의 비유가 기독교의 누가복음의 뭐 탕자의 비유라든가 구원실성 법물에 대한 법화경의 얘기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런 표현에 영향을 줬다, 또 삼신불 사상이나 미륵사상 등 이런 관계를 이제 말씀을 한 바가 있는데...

양창욱 : 아, 이게 한두 개가 아니군요.

이기운 : 예. 뭐 많은 매스컴에서도 얘기가 됐었고 저서도 나와 있고 그렇습니다. 근데 저는 이런 문제를 이렇게 생각하는데 문화는 일종의 흐르는 거죠. 지금도 우리가 서양 문명들이 많이 흘러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500년이나 앞선 불교에 그런 좋은 사상이나 말씀이 있었다면 후대의 기독교의 경전이 편찬되는 과정에서 당연히 이런 말씀들이 흘러들어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양창욱 : 그렇군요.

이기운 : 그래서 오늘날 뭐 우리 불교 경전에도 인도 전통 사상들이, 이런 것들이 흘러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양창욱 : 네, 그렇죠.

이기운 : 그래서 다종교 사회에서는 오히려 이런 사상들이 서로 공통된 어떤 연결고리의 사상들이 있다면 종교 화합에도 오히려 긍정적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양창욱 : 참, 끝까지 찾아가보고 결국 이렇게 더 깊이 공부해보면 정말 항상 종교는 뭐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역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문제죠, 결국에는. 이 법화경을 현대 사회에 접목시키는 노력들이 참 많습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법화경의 어떤 부분, 어떤 특징, 어떤 말씀들이 현대사회에 도움이 되고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귀중한 것들이라고 생각됩니까?

이기운 : 예, 그렇죠. 현대사회는 많은 문제들이 있죠. 뭐 이들의 문제의 본질을 파고 들어가면 현대인들의 어떤 탐욕심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재산과 권력에 대한 탐욕, 또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남보다 더 높게 올라가려고, 서로 이런 이익을 추구하다보니까 너나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번뇌가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는데, 법화경에 ‘제법실상(諸法實相)’ 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양창욱 : ‘제법실상’... 예.

이기운 : 예. 이 세상을 십여시로 보자는 거거든요. "여시상, 여시성, 여시체, 여시력, 여시작, 여시인, 여시연, 여시과, 여시보, 여시본말구경", 그래서 여시로 시작됐다 해서 여시, 십여시 이러는데 이것은 세상을 바르게 관찰하자는 거거든요, 살펴보자. 진실한 모습을 보고 뭐 우리가 다툼이 일어날 때 상대방이나 그 사건에 대해서 진실한 모습을 보고 그 사람, 그 사건의 성품, 그 원인, 결과, 이런 것들을 잘 살펴보고 그걸 이해하고 서로 배려하고 그러다보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서로 간에 다툼의 원인 이런 것들을 이제 알 수가 있게 되고. 그럴 때 이제 사물의, 사건의 진상을 바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이제 법화경의 ‘제법실상’, 이런 것을 굉장히 좀 눈여겨봐야 될 사상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양창욱 : 그렇군요. 근데 이게 참, 뭐 어떤 경전도 마찬가지겠지만 좀 쉽게 접목시켜서 좀 공부를 하려고 하면 어려워요. 이 법화경도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희 일반 재가불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쉽게 공감하면서 우리 생활에 또 이렇게 녹여낼 수 있고 그럴 수 있을까요?

이기운 : 글쎄요, 그 방법이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법화경은 특히 이제 육근청정법문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모든 법, 불경을 설한 근본 취지 이런 것들이, 부처님의 본마음이 잘 들어가 있다, 그래서 모든 경(經)들을 다 꿰뚫는 법문이다,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는데 근데 법화경은 우리가 살아가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이런 문제를 청정히 하는 법문, 다시 말해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듣고 맛보고 이러면서 업을 짓고 살아가는데 법화경은 이런 안·이·비·설·신·의, 이런 육근을 청정히 하는 법문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래서 우리 중생들은 육안(肉眼)으로 보고 육이(肉耳)로 듣고 그러니까 우리 고깃덩어리 눈으로 보고 듣고 그러기 때문에 탐(貪)·진(瞋)·치(癡)를 낸다는 거죠.

양창욱 : 예, 그렇군요.

이기운 : 그런데 법화경을 듣고 부처님 말씀을 잘 실천하면 이런 육안이 천안(天眼)으로 바뀝니다. 천안은 착한 마음으로 본다는 거죠. 아까는 볼 때마다 탐·진·치를 냈는데 이제는 볼 때마다 착한 마음으로 보고 듣고 맛보고 이렇게 이뤄진다. 그다음 단계는, 법화경을 읽기 시작하면 착한 마음이 지혜로워진다는 거죠. 그래서 혜안(慧眼)으로 보고 혜이(慧耳)로 듣고 혜비(慧鼻)로 냄새 맡고 혜의(慧意)로 생각하고, 또 한 단계 나아가면 지혜로운 마음이 법안(法眼)으로 갑니다.

양창욱 : 아, 그렇군요.

이기운 : 다음으로는 보살의 마음인데 그래서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보살의 마음으로 보고 듣고, 또 한 단계 나가면 이제 불안(佛眼)으로 본다. 불안으로 보고 불이(佛耳)로 듣고 불비(佛鼻)로 냄새 맡고 불의(佛意)로 생각하면 볼 때마다 부처님과 같이 불이로 듣고 불안으로 보고 불의로 생각하고 알게 된다는 거죠. 법화경은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직접 살아가는 수단인 ‘안·이·비·설·신·의’를 청정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제 부처님의 법문을 실천하면 불국토 육근청정을 통해서 불국토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런 세계를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양창욱 : 예. 많은 법문들 중에서 지금 현대인들이 가장 가슴에 꼭 좀 품고 갔으면 하는 구절, 법문 있으면 좀 들려주세요, 끝으로.

이기운 : 예예. 법화경 중에 그런 얘기가 있어요.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서 가르침을 펴자." 이런 말씀이 있는데 이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현대사회에서 자꾸 ‘탐·진·치’를 내다보니까 조금만 자기 이익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상대를 억누르고 해치고, 그리고 이익을 위해서 조금도 참지 못하고 부귀영화에 끊임없이 집착하는데...

양창욱 : 맞습니다, 예.

이기운 : 대자비심을 가지고, 여래의 방이란 건 자비심을 갖자는 거거든요. 서로에게 좀 자비심을 가지고 보자 이런 말씀이고. 인욕으로 옷을 삼자는 것은 서로 좀 참고 인내하면서 좀 세상을 살아가자 이런 말씀이고, 그래서 공(空)으로 자리로 삼자는 것은 무차별심, 우리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남녀노소, 정당, 보수, 진보, 너무 차별을 두고 보니까 자꾸 사이가 벌어지는 거죠. 그래서 차별 없이, 집착 없이, 부귀영화에 자꾸 집착함으로 해서 모든 문제가 생기는데 무집착, 무소유, 무차별 이런 마음을 좀 갖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양창욱 : 예. 아휴, 오늘 아침에 정말 공부 잘 했습니다, 교수님. 다음에 또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기운 : 고맙습니다. 네.

양창욱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이기운 교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양창욱 / wook1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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