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역할 할 때가 가장 마음 편해"

▲ 원로배우 박병호 선생님과 부산 삼광사 주지 무원스님

 양창욱 : 2일 '양창욱의 아침저널' [FM 101.9 (서울)] 3부, 목요일 3부는 그립고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보는 시간 마련하고 있습니다. ‘목요스페셜 - 그 사람, 지금’. 오늘은 어떤 배우보다도 스님 역할이 잘 어울리시는 원로배우 박병호 선생님과 만나보겠습니다. 선생님 나와 계시죠?

박병호 : 예, 여보세요.

양창욱 : 예. 제 목소리 잘 들리십니까, 선생님.
 
박병호 : 잘 들립니다. 예, 안녕하세요.
 
양창욱 : 예예. 아침 일찍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박병호 : 네, 고맙습니다.
 
양창욱 : 예. 보통 지금 시간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나시죠, 선생님?
 
박병호 : 저는 한 4시 반? 5시면 일어나요.
 
양창욱 : 아, 4시 반이나 5시오. 일어나셔서 가장 먼저 뭘 하십니까?
 
박병호 : 뭐 여기 저기 손볼 게 많아가지고 책도 좀 보고 아침에, 대개 마음을 좀 이렇게 다스리는 데서부터 시작을 하죠.
 
양창욱 : 예. 아니 근데 실례지만 주무시는 시간은 몇 시 정도죠?
 
박병호 : 뭐 이것저것 뒷마무리하고 하루 일과에서 이제 뉴스, 저는 그 시사뉴스를 좋아해요.
 
양창욱 : 아, 예.
 
박병호 : 그거 보고 나면 한 10시, 10시 반 이렇게 되죠.
 
양창욱 : 아, 잠을 많이 주무시지 않으시군요? 한 6시간 전후로.
 
박병호 : 하하, 그 정도면 충분하죠.
 
양창욱 : 예. 아, 시사프로그램을 좋아하시는 군요, 뉴스 같은 거. 아침저널도 시사프로그램인데.
 
박병호 : 예. 하하.
 
양창욱 : 몇해 전에 남해로 귀농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박병호 : 예예. 2008년 8월 15일에 여기 이사를 왔어요.
 
양창욱 : 아, 올해 됐군요. 벌써 한 7년 정도.
 
박병호 : 7년이 좀 넘었죠.
 
양창욱 : 예, 오래 됐습니다, 그 전엔 서울에서 사셨습니까, 그러면?
 
박병호 : 서울에도 살았고 뭐 안산에서도 살았고. 네, 그랬습니다.
 
양창욱 : 근데 왜 귀농하셨던 거죠, 그때?
 
박병호 : 뭐 귀농이라기보다도 뭐 귀촌 쪽인데. 농사짓는 것은 아니니까. 근데 사실 ‘나’라고 하는 그런 어떤 오만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양창욱 : 아, 예.
 
박병호 : 그냥 ‘나’다 그러는 거하고 순수 ‘박병호’하고 이렇게 좀 분리를 하고 싶어가지고 그래서 한마디로 하면 ‘나’로부터의 해방이랄까? 그래서 이제 8월 15일 날을 택했고.
 
양창욱 : 아, 8월 15일 날 이사하신 날도 특별하게 그렇게 의미가 있으셨군요?
 
박병호 : 네, 좀 그랬습니다.
 
양창욱 : 예.
 
박병호 : 그래서 이제 ‘나’라고 하는 울타리를 헐고 나니까 편안해져서 지금 아주 차분하게 살고 있습니다.
 
양창욱 : 예, 그러셨군요. 제가 가장 최근에 TV에서 선생님을 뵌 게 그 ‘정도전’ 드라마에서 무학대사 역할을 맡으신 거였어요.
 
박병호 : 하하, 네, 그 무학대사만 두 번 했습니다.
 
양창욱 : 예. 옛날에 ‘용의 눈물’에서도 무학대사를 하셨잖아요?
 
박병호 : 그렇습니다.
 
양창욱 : 예.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저는. 90년대 후반에 ‘용의 눈물’에서 봤었던 무학대사 선생님 모습하고 작년에 봤었던 ‘정도전’ 그 무학대사의 선생님 모습이 크게 차이가 안 나던데요.
 
네, 고맙습니다. 하하.
 
양창욱 : 예. 워낙 이 무학대사 역할이 잘 어울리세요. 그쵸?
 
박병호 : 근데 제가 63년도에 원효대사 역을 맡았었어요. 드라마 자체가 이제 원효대산데.
 
양창욱 : 아, 타이틀롤, 주인공을 맡으셨군요.
 
박병호 : 네. 주인공을 맡아가지고 이제 시작했고. 그게 인연이 돼가지고 쭉. 근데 원래 스님 역을 전문으로 한 게 아니라 이제 저는 뭐 멜로드라마나 청춘드라마를 주로 해왔거든요.

양창욱 : 예예, 맞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박병호 : 네. 그래서 어르신들은 잘 알죠. 그런 드라마만 150 내지 200편 이상을 그렇게 쭉 해왔는데, 타이틀 롤만. 그러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이제 69년, 70년도 그때 당시에는 이제 TBC인데 ‘연화’라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양창욱 : 다시요, 선생님. 뭐라고요?
 
박병호 : ‘연화’.
 
양창욱 : 아, ‘연화’. 예예.
 
박병호 : ‘연화’라는 드라마에서 연파스님 역할을 맡았는데 그게 공전의 히트를 했어요.
 
양창욱 : 아아.
 
박병호 :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때 제가 삭발을 했거든요.
 
양창욱 : 아아.
 
박병호 : 그 이전의 스님 역할은 전부 이제 가발을 썼죠. 고무로 된 가발을 쓰고.
 
양창욱 : 아, 예예.
 
박병호 : 너무 거북해요. 그래서 이제 깎자 그러고 깎았죠. 그때 삭발을 했습니다. 그 후에 계속, 지금까지 그 머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양창욱 : 아, 선생님 그 머리는 삭발을 하신 거군요.
 
박병호 : 네, 그렇습니다.
 
양창욱 : 저는 연세가 드셔서 이제 그러신 줄 알고. 그게 아니었군요.
 
박병호 : 그때부터 다른 드라마를 해도 그 머리로 계속 하고 그랬습니다.
 
양창욱 : 아, 그러셨군요. 그럼 80년대부터요?
 
박병호 : 아니죠, 70년대.
 
양창욱 : 70년대부터. 그럼 80년대에 활동하시기가 좀 불편하지 않으셨나요? 그때 좀..
 
박병호 : 70년대 중반에 제가 이제 그 수사물 ‘박주임’이라는...
 
양창욱 : 예, 맞습니다. 그건 제가 기억이 나요, 어릴 때.
 
박병호 : 전부 이 얼굴, 이 머리로, 이 머리스타일로 했습니다.
 
양창욱 : 예, 그러셨군요. 아니 제가 여쭤보는 게 그때 80년대 당시 대통령 머리스타일과 좀 비슷해가지고 혹시 불이익 같은 거 받지 않으셨나, 왜 그런 얘기들이 그때 많았잖아요?
 
박병호 : 전혀 불이익 같은 거 당하지 않았습니다.
 
양창욱 :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이제 그렇게 스님 역할이 잘 어울리시고 스님 역할도 많이 하시고 그러셔서 저희들은 이제 더 친근감을 느끼는데 실제로 불교에 귀의하신 적도 있으시다고요?
 
박병호 : 그게 이제 제가 왜 그랬느냐 하면은, 사실 우리 어머님이 그렇게 인연을 맺어주신 거 같아요. 우리 어머님이 딸 여덟 뒤에 나은 아들이 저에요. 시주를 하셔서.
 
양창욱 : 아이고, 예.
 
박병호 : 그러니까 얼마나 아들이 귀할 땝니까. 그러니까 이제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절에 나가기 시작해요. 그게 이제 그 인연으로 작용을 했든지 제가 이제 70년대 초에 ‘연화’라는 드라마에서 연파스님을 하고 그때 당시 그 총무원장이신 경산스님..
 
양창욱 : 경산스님, 예.
 
박병호 : 네네. 회암사에서 저기 포천, 의정부 지나면 회암사가 있습니다.
 
양창욱 : 예.
 
박병호 : 이 드라마 배경이 또 회암사였고 거기 수계식이 있을 때 제가 수계를 같이 받았어요.
 
양창욱 : 아, 예.
 
박병호 : 불명도 이제 ‘백봉’이라 이래가지고. 하하.
 
양창욱 : 아아. 그게 무슨, 법명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죠?
 
박병호 : 글쎄 그게 백봉인데, 흰 백자, 봉우리 봉자 그래가지고.
 
양창욱 : 예, 백봉.
 
박병호 : 네. 그게 큰 뜻은 없어요. 그냥 머리스타일도 이제 그렇고 그러니까 이제 부르기 좋도록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양창욱 : 예. 그래서 그러면 정말로 그때 출가를 하신 건가요?
 
박병호 : 아니죠.
 
양창욱 : 아, 예. 그건 아니시고. 요건 조금 잘못 알려졌군요.
 
박병호 : 네. 그래서 이제 반은 스님이다, 이렇게 이제 별명을 붙여주고 그래서 이제 자꾸 연결지어서 생활을 했죠. 그다음에 이제..
 
양창욱 : 예. 그러다보니 이런 얘기도 나오게 됐군요.
 
박병호 : 그럼요. 그래서 이제 예술인연합회, 뭐 봉사단체도 운영을 하고 이제 이러면서 하니까 “아, 저기 스님 왔다.” 이렇게... 하하하.
 
양창욱 : 예, 그러시군요. 아, 잠시만요. 선생님이 나오셨다니까 청취자분들이 반갑게 문자를 많이 주고 계십니다. 제가 좀 읽어드리겠습니다. 9287님, 박병호 선생님, 반갑습니다. 항상 드라마를 틀어보면 스님 역할이 너무 잘 어울리시고 잘하셨죠. 항상 건강하세요. 이렇게 문자를 주셨습니다.
 
박병호 : 고맙습니다.
 
양창욱 : 글쎄, 청취자 분들도 이렇게 느끼고 계시다니깐요! 5261님, 박병호 선생님, 정말 반갑습니다. 손주들하고 건강히 지내시는 모습, 잘 봤습니다. 더 행복하세요. 어디 TV에 나오셨던 모양이시죠, 최근에?
 
박병호 : 요번, 그저껜가 아침에 SBS 좋은아침에 손주들 돌봐주는 것이 15분 이상 방송이 나왔어요.
 
양창욱 : 아, 그러셨구나.
 
박병호 : 네네.
 
양창욱 : 알겠습니다, 선생님. 저희도 TV 있어요. 저희도 갈게요, 선생님 집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디오만 하는 거 아니에요, 저희도.
 
박병호 : 하하, 네.
 
양창욱 : 최근에 정말 이런 불교계와 돈독한 인연, 각별한 인연 때문에 그 ‘사단법인 세상을 향기롭게’ 홍보대사로도 선정이 되셨죠?

박병호 : 아, 네.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
 
양창욱 : 예. 여기 이사장스님이 옛날에 범어사 주지하셨던 정여스님이시잖아요.
 
박병호 : 네, 정여스님이 이사장이십니다.
 
양창욱 : 예. 정여스님하고 특별하게 인연이 있으신가요?
 
박병호 : 아니요, 그게 저희들이 연예인봉사대에서 중증 장애아들도 돕고 독거노인들도 돕고 뭐 소외돼있는 그 화상 환자들을 돕는 일에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서고 있다가 우연치않게 이 인연이 정여스님하고 맺어져서요.
 
양창욱 : 아, 그랬군요.
 
박병호 : 뭐, 세상 향기롭게 하는 일인데 마다할 이유도 없고 그래서 홍보대사로 위촉을 하시길래 아주 기쁜 마음으로 좀 미력하나마 적극 참여해서 이웃 돕는 일에 동참하겠다, 그런 뜻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양창욱 : 그러시군요. 아휴 근데 선생님, 참 활동을 많이 하고 계신 것 같아요. 방금도 말씀하셨듯이 연예인봉사회 후원회장도 계시고, 또 화상협회도 이끌고 계시잖아요?
 
박병호 : 이끄는 게 아니고 제가 거기 이제 고문 역할을 하면서 기회될 때마다 이제 몇 사람하고 같이 어떻게 좀 수술비 같은 것도 좀 마련해주기 위해서 이렇게 이제 왔다갔다했습니다.
 
양창욱 : 예. 사실 이 불교계로서는 참 뭐라 그럴까, 푸근하고 든든한 그런 역할을 해주고 계셔서 선생님, 참 좋습니다.
 
박병호 : 고맙습니다. 제가 받은 사랑 그 이상을 베풀어야 되는데 힘이 어디까지 닿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양창욱 : 아이고, 그러시군요. 이제 선생님, 배우 박병호로서의 얘기를 좀 여쭤보겠습니다. KBS 1기 공채 탤런트 출신이시잖아요?
 
박병호 : 그렇습니다.
 
양창욱 : 그 시절에는 사실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박병호 : 그렇죠.
 
양창욱 : 예. 사회적인 분위기나, 예.
 
박병호 : 네. 이게 피란 당시에, 6.25 사변 당시에 이제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때 시골 가서 시골 분들이 참 피란 온 사람 고생한다고 참 극진히 잘해주셨어요. 그게 고마워가지고 피란 온 애들끼리 모여서 이제 학예회 같은 거 하고 노래 재롱도 좀 부리고 그랬던 것이 시작 같아요. 그래갖고 고등학교 시절에 그 고등학교 학생들의 연극경연 대회가 있었습니다. ‘사육신’이라는 제목으로. 거기에 이제 섰었고 그러다가 이제 대학교 가서 대학 방송국 경연대회가 또 57년도에 있었어요. 그런 저런 것이 인연이 돼가지고 이렇게 모여서 동아리 연극을 하다가 61년도에 KBS 공채탤런트를 모집했거든요. 그때 개국하면서. 그때 이제 한 120:1 됐는데 여자 12명, 남자 12명 그렇게 해서 24명이 1기생으로 출발을 했어요. 그게 이제 계기가 된 거지요, 하하.

양창욱 : 예, 그러셨군요. 그러면서 이제 멜로물이나 이런 데 주로 주인공들로 그렇게 150여 편 하시고 그렇게 이제 쭉 활동을 하셨는데 제가 이제 선생님 배우 생활 얘기를 쭉 들으면서, 제가 궁금해 했던 것이 뭐 당대 최고의 스타셨죠? 배우 최민수씨 아버지, 고 최무룡 선생님.
 
박병호 : 아, 네. 최무룡 선배님.
 
양창욱 : 네, 최무룡 선생님. 그 분하고 선생님하고 친구는 아니시잖아요? 연배 차이가 꽤 나잖아요?
 
박병호 : 그럼요, 한 10년 차이 나죠.
 
양창욱 : 예. 사람들이 두 분이 자꾸 친구라고 얘기해서. 선생님하고 최무룡 선생님하고. 아니잖아요?

박병호 : 그러믄요, 그러믄요.
 
양창욱 : 예, 선배님이시잖아요?
 
박병호 : 개인적으로는 이제 형님, 형님하고 이렇게..
 
양창욱 : 아, 그렇죠. 형, 동생 하시는 그런 사이셨고. 그런데 두 분 사이가 그렇게 돈독하셨다면서요?

박병호 : 그렇습니다. 그게 이제 참 결과적으로는 이제 괴로운 그런 인연이됐지만 영화 제작 관계 때문에 좀 만났었어요. 그 당시에 제가 영화 제작을 욕심나가지고서 이제 몇 편을 했는데 그때는 이제 유행이 대명을 하는 게 유행이었어요. 물론 영화사 자체에서도 제작을 하지만은 내가 투자를 해서 하고 싶은데 나는 영화 제작사를 가지고 있질 않으니까 뭐 극동영화사나 연암영화사나 무슨 이렇게 대명을 해서 했는데 그때 최무룡 선배님이 덕영필름을 가지고 계셨어요.

양창욱 : 예, 그때 선생님이, 굉장히 크게 영화 제작에 열정을 쏟고 투자를 하셨던 그런 때라고 들었습니다.

박병호 : 거기서 이제 제가 이제 ‘구멍’이라는 거를 제작을 했는데 하다가 물론 이제 중단은 됐지만은 그것 때문에 이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조금 있었죠. 근데 이제 나중에 무룡이 형님과 우리 이걸 뭐 툭툭 털어버리고 우리 둘만 알고 넘어가자, 이래가지고 넘어갔는데 좀 힘들었었죠.
 
양창욱 : 예예. 그러니까 그 당시에 故최무룡 선생님하고 선생님하고 이제 영화제작에 많은 열과 성을 쏟았는데 이게 결과적으로 좀 안되고 실패를 하다보니까 뭐 이런 저런 문제들이 생기고 그랬던 시절 얘기지요, 그러니까?
 
박병호 : 네. 덮어두자, 그렇게 해서 덮어두고.
 
양창욱 : 예, 그렇군요.
 
박병호 : 우리 형님 돌아가실 때도 못 갔어요. 제가 태국에 있었기 때문에.
 
양창욱 : 아아.
 
박병호 : 그러다가 이제 나중에 나와서 파주에 제가 묘소를 한 번 찾아가 뵀습니다.
 
양창욱 : 예, 그러시군요. 7575님, 박병호 선생님, 예전에 봉선사에서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요즘처럼 혼탁한 세상에 좋은 일 많이 해주셔서 고맙고 또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박병호 : 고맙습니다.
 
양창욱 : 예전에는 봉선사에 자주 가셨던 모양이시죠?
 
박병호 : 봉선사가, 내 기억으로는 저쪽 광릉에 있는 쪽, 그쪽 어디 같은데 그때 아마 미룬스님이 거기 계셨었던 것 같아요.
 
양창욱 : 아아.
 
박병호 : 가끔 가고 그랬죠, 뭐.
 
양창욱 : 참, 선생님 진짜, 불교계와 인연이 남다르다, 라고 느끼는 게 참 많은 스님들을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각별하게 친하게 지내시는 스님들은 어떤 스님들이 계시죠?

박병호 : 평소에 좀  만나죠. 최근에 이제 저기 뭐라 그럴까, 송원스님도 제가 잘 알고 있고... 뭐 조화스님도 그렇고... 혜총스님하고도 또 잘 압니다. 부산의 감로사.

양창욱 : 예예, 그러시군요. 아니 근데 제가 언뜻 또 생각이 나는 게 그러면 불교계와 그렇게 인연이 돈독하고 그러면 불교방송에서 프로그램 같은 거를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렇게 진행을 하시거나 뭐 이렇게...
 
박병호 : 안 했습니다. 하하.
 
양창욱 : 예, 그거는 참 안타깝네요. 그럼 불교방송에 오늘 처음 이렇게 출연을 하시는 건가요?
 
박병호 : 그렇습니다.
 
양창욱 : 예. 아, 지금도 미룬스님께서 봉선사에 계시다고 하네요.
 
박병호 : 아, 그렇습니까?
 
양창욱 : 예. 우리 PD가 금방 찾아냈습니다. 지금 방금.
 
박병호 : 네. 아휴, 제 기억력도 괜찮네요.
 
양창욱 : 예예. 그럼요, 오늘 뭐 아주 목소리나 모든 말씀에 힘이 느껴집니다, 선생님. 정말 아주 정정하신 걸 제가 느낄 수가 있는데 다시 스님 배우 시절로 돌아와서, 이게 벌써 1960년에 데뷔를 하셨으면 반백년이 넘었잖아요?
 
박병호 : 그렇습니다.
 
양창욱 :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동료 배우들 누구 있을까요?

박병호 : 지금까지 하여튼 뭐 ‘연화’라는 드라마를 위주로 해가지고 60년대에 뭐 ‘정독 아주머니’, ‘님은 먼 곳에’, ‘서울이여 안녕’, 뭐 ‘16세 신부’. 이 ‘16세 신부’는 나중에 ‘꽃분이’라는..
 
양창욱 : 아, 예, ‘꽃분이’. 기억이 납니다.

박병호 : 그렇게 뮤지컬로 발전이 된 작품이죠. 그 다음에 수사물로는 뭐 ‘형사’, ‘특명 7호’, 내 이름 딴 ‘박주임’.

양창욱 : 예.
 
박병호 : ‘박주임’이라는 그 수사드라마가 있었어요.
 
양창욱 : 예. 그것은 어릴 때 본 기억이 있죠, ‘박주임’은.
 
박병호 : 예예. 이제 그것을 해가다가 그게 이제 중단이 되고 나중에 수사물은 계속 이어져야 된다 그래서 이제 MBC의 ‘수사반장’이 그렇게 나오게 됐습니다.

양창욱 : 그렇군요.

박병호 : 그리고 이제 그때 당시에 이제 같이 뛰놀았다 그럴까? 친하게 지냈던 배우들은 뭐 김성원, 작고한 김순철, 이묵원, 정해창, 임주환. 그리고 후배로서는 이제 백일섭, 한진희, 진진애, 죽은. 다 뭐 아주 좋은 동료들이고 후배들이고 그렇습니다. 여자는 뭐 그때 당시에 저하고 많이 상대역을 했던 나옥수, 김난영 작고한, 안은숙, 김에리사. 뭐 헤아릴 수 없습니다만 일일이 거명이 되겠습니까?

양창욱 : 예예, 그러시군요. 아, 참, 추억의 옛날 어른들 이름이 지금 다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이제 어느덧 시간이 다 돼서요, 선생님. 제가 끝으로 질문 하나만 더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인생에 있어서 배우란 무엇이고, 또 불교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간략하게 끝으로 좀 정리를 해주시죠.

박병호 : 이게 배우라는 게 고행자다, 이렇게 얘길 하고 싶어요. 왜 그러냐면 이제 수많은 삶을 이렇게 직접적인, 간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제 느꼈지 않습니까? 그걸 시청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표출을 해내는 일이 우리 일인데, 배우들의 일인데 그게 힘들어요. 그래서 고행자다, 배우란.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싶고.
 
양창욱 : 예. 그럼, 선생님 인생에 있어서 불교는 그러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박병호 : 어머님 품 속 같은 거다, 저는 그렇게. 고행자의 쉼터고. 그러니까 스님 역할 할 때가 제일 편안해요, 저는.

양창욱 : 예. 그럼 앞으로도 스님 역할을 하실 거군요?
 
박병호 : 기회가 된다면.
 
양창욱 : 예, 그러시군요. 어머님 품 속 같은 그런 것이 불교군요. 아, 이제 불교와 인연을 맺고 평생을 같이 가야 그런 느낌을 말년에 얻을 수 있고 그런 거 같습니다.
 
박병호 ; 네네.
 
양창욱 : 젊은층 입장에서는 그런 게 쉽게 와닿고 그러지는 않은 것 같아요.
 
박병호 : 그렇죠? 그렇습니다. 이게 쓴 맛, 단 맛 다 보면 그렇게 느껴지고 그게 피부로 와 닿습니다.

양창욱 : 예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시고요.

박병호 : 네, 고맙습니다.

양창욱 : 예. 또 TV나 이런 데에서 여러가지 활동 사항, 저희들이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병호 : 네, 고맙습니다.
 
양창욱 : 예,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박병호 : 네.
 
양창욱 : 지금까지 ‘목요스페셜-그 사람 지금’, 원로배우 박병호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
 

양창욱 / wook14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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