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DJ들 전문성 떨어져" "친구같고 연인같은 라디오매체 영원할 것"
양창욱 : '양창욱의 아침저널' 3부입니다. 목요일 3부는요, 그립고 보고 싶던 사람들을 만나봅니다. '목요스페셜, 그 사람 지금'으로 꾸밉니다. 오늘은 7~80년대 라디오 키드 세대들의 감수성을 자극했던 분이죠, 명DJ 박원웅 선생님과 함께합니다. 선생님 나와 계시죠?
박원웅 : 네, 안녕하세요. 박자 원자 웅변할 때 웅자입니다. 박원웅입니다.
양창욱 : 선생님, 반갑습니다.
박원웅 : 정말 오랜만에 불교방송에 연결이 돼서 반갑습니다.
양창욱 : 언제 나오시고 오늘 나오시는 거예요, 불교방송은요?
박원웅 : 불교방송은 처음이죠.
양창욱 : 25년 만에 처음 나오신 거군요.
박원웅 : 너무합니다, 하하.
양창욱 : 정말 반갑습니다, 선생님, 93년도에 '골든디스크'가 마지막 방송이었잖아요. 고별방송 프로그램. 20년이 더 지났습니다.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박원웅 : 그동안에 못 읽었던 책도 읽고 등산도 좀 다니고 심신을 단련하고 무엇보다도 소홀했던 가정 일을 많이 도왔죠.
양창욱 : 가정에 많이 소홀하셨어요?
박원웅 : 네네. 매일 밤 방송, 물론 낮에도 했습니다만 밤에 목소리가 맞는다고 그래서 밤 방송을 많이 했었어요. 그러다보니까 가정에 소홀하게 됐죠.
양창욱 : 네.. 아무래도 밤에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다 보니까. 사단법인 한국방송디스크자키 협회장도 맡고 계십니다. 이건 어떤 단체인지 소개를...
박원웅 : 옛날에도 디스크자키 협회, 이런 협회들이 있었습니다만, 본격적으로 저희가 만든 것은 2010년 고 이종환씨가 살아있을 때 저희가 제안을 해서 고 이종환, 그리고 원조격인 최동욱 선생,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사람이 만나서 이제 우리도 협회 하나 가질 때 되지 않았느냐 제안을 해서 도우미를 구하고 세 분이 열심히 만나서 의논을 한 결과 탄생이 됐는데 그 분들 중에서 이제 한분이 먼저 세상을 떠나셨죠.
양창욱 : 네, 이종환 선생님은 돌아가셨죠. 67년에 MBC 피디로 입사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PD로 입사를 하셔서 디제이로 데뷔를 하셨어요. 저도 라디오방송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흔치 않은 경우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박원웅 : 그 때는 팝뮤직이 아주 융성했던 때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대학시절에 음악감상실에 마이크가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화신 3층의 ‘메트로’라던가 또는 명동의 ‘시보네’라던가 지금 조선일보사가 있는 아카데미에 극장이 있었습니다. 그 극장이 있는데 아카데미에 또 음악감상실이 있었어요. ‘세시봉’ 또는 ‘디세네’ 그런 음악감상실이 있었거든요. 거기에서 유행처럼 모두 마이크를 썼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마이크 아나운서들이 와서 심사도 하고 그랬어요. 마이크테스트 음성 테스트를 했죠. 거기에 응모를 해서 취업이 됐어요. 그러면서 시작이 되가지고 음악감상실을 쭉 다니다가 방송사에서 팝뮤직이 유행이 되니까 거기 스카우트가 된 것이죠. 그래서 MBC에 입사하게 된 겁니다.
양창욱 : 그러면 진행자로 입사를, 스카우트가 돼야 되는데 왜 피디로 입사하게 했을까요, 그 방송사에서는?
박원웅 : 그 때 제 숨은 저거(재능)는 알고 있었습니다만, 프로듀서가 필요했던 것이죠. 음악프로듀서를 한 다음에 쭉 하다보니까 아 네가 방송을 직접 하라고 얘기가 돼서 자연스럽게 방송을 타게 되었던 것이죠.
양창욱 : 그렇게 해서 71년부터 그 전설적인 프로그램, ‘박원웅과 함께’가 시작이 됩니다.
박원웅 : 처음에는 그게 ‘밤의 디스크쇼’였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영어를 너무 쓰지 말라고 해서 그러면 제 이름을 따서 ‘박원웅과 함께’ 이렇게 가자 그래서 그렇게 됐습니다.
양창욱 : 저도 참 중 고등학교 때 많이 들었는데요.
박원웅 : 예... 그랬군요. 반갑습니다.
양창욱 : 그런데 솔직히 제 개인적 의견인데, 아주 대중적인 팝은 안 틀어줬던 것 같아요 ‘박원웅과 함께’에서는. 당시 80년대 신디로퍼나 마돈나 같은 음악은 잘 안 틀어주시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노래들은 잘 안틀어 주셨어요.
박원웅 : 왜냐하면 FM수준에 맞는 음악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저는 원칙이 서정성. 음악은 서정성이 좀 있어야된다 이렇게 생각을 했고 그리고 우리가 따라서 배울만한 곡들, 그런 곡들을 우선적으로 선곡을 했어요.
양창욱 : 당시 팝송을 소개하려면 참 공부를 많이 하셨어야 됐는데. 지금이야 인터넷도 있고 여러 가지 자료를 접하기 쉽지만 그때는 참 어려웠을 것 같은데 어떻게 공부를 하셨고 접하셨어요?
박원웅 : 그때도 잡지가 더러 있었어요. 일본잡지가 제일 손꼽는 잡지였고 그 다음에 빌보드나 캐시박스 같은 단편적인 소식을 알 수 있는 전문 음악지가 있었어요. 그런 것을 저희가 보고 많이 배웠죠.
양창욱 : 그런 것은 쉽게 구할 수 있었나요, 선생님?
박원웅 : 그런 것은 회사에서 구해줬습니다. 돈이 많이 드니까 회사에서 다 구해줬죠.
양창욱 : 아 그래서 이제 팝송에 대한 정보들이나 공부를 많이 하시게됐고. 근데 당시 쟁쟁했던 프로그램들이 많습니다. 김광환 선생님의 '3시의 희망음악' 이런 것도 있었고, '2시의 데이트' 김기덕 선생님도 있었고요. 같이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는 DJ 입장에서는 여타 다른 프로그램과 경쟁의식도 있었을 것 같아요.
박원웅 : 있었죠. 아무래도 라이벌이죠. 황인용씨가 있었고, 그 당시 김광환씨도 있었고 후배 중에서 김기덕씨 등 여러분들이 있었는데 그 분들이 있었음으로 해서 우리가 맡았던 분야, 팝뮤직 분야가 동반 성장하지 않았나. 널리 알려졌어요. 그래서 아주 좋은 이웃들이다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양창욱 : 라이벌이셨으면 그 때 서로 누가 인기가 더 많나 이런 것도 좀 생각하셨죠?
박원웅 : 생각을 하죠. 왜냐하면 그때는 개인적인 기호도 있었습니다만, 저는 음악 빛깔로 승부를 걸었어요. 그래서 예를 들자면 ‘박원웅과 함께’, ‘FM 골든디스크’ 제가 했던 프로그램들이거든요. 거기에 음악 빛깔이 다른 프로그램과는 좀 다르다 그래서 거기서 히트곡이 나오고 그랬어요.
양창욱 :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 나오셨다니까 지금 문자들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2190님 박원웅 DJ 나오셨다니 반갑습니다. 그 옛날 방송하시던 목소리 오늘 들을 수 있으니까 추억이 다시 생각납니다, 이렇게 문자 주셨습니다. 5162님, 박원웅 DJ 선생님 정말 반갑습니다. 올드팝에 정신을 뺏겨서 명동 ‘꽃다방’, ‘오비스 케빈’, ‘태평양’으로 부지런히 다녔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가 어딘지.
박원웅 : 있었어요. ‘꽃다방’은 명동극장 근처에 있었고, 거기 또 ‘시보네’라는 음악감상실이 있었는데 거긴 잘 모르시나 보네요. ‘오비스 케빈’은 유네스코회관 뒤 편에 있었거든요. 사보이 호텔 중간에 있었는데 그 업소가 상당히 명소였었어요. 그 이층에 거의 다 내로라하는 연예인들이 거의 다 나왔어요. 양희은씨나 서유석, 신중현 이런 분들이 거기서 공연을 했어요.
양창욱 : 그러셨군요. 그런데 김기덕 선생님은 SBS에서 여전히 방송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현역으로. 좀 부럽지 않았습니까, 후배이긴 하지만?
박원웅 : 부럽기는 합니다만 제 나이도 생각을 해서 거기에는 소홀했습니다.
양창욱 : 선생님 이쯤에서 선생님 옛날 목소리 그대로 해서 노래 한 곡 선곡해서 소개해 주시죠. 그런 시간을 가져야 될 것 같습니다.
박원웅 : 뭐 명곡 중에 명곡,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 이런 날 어울리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양창욱 : 예.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음악, Simon &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 "
양창욱 : '양창욱의 아침저널' 지금 3부에서 왜 팝송이 나오나 지금 라디오를 켜신 분들은 당황하실 수 있겠는데요. 오늘 '목요스페셜, 그 사람 지금/에서 7~80년대 명 DJ이신 박원웅 선생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원웅 선생님 추천으로 팝송을 한 곡 들었습니다. 명곡 중의 명곡 이죠.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브리지 오버 트러블드 워터를 들었습니다. 9287님이 지금 문자를 또 주셨습니다. 박원웅 선생님 반갑습니다. 차분한 목소리가 여전하시네요. 늘 건강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문자를 주셨습니다. 선생님, 옛날에 7~80년대는, 물론 60년대도 그렇지만 금지된 게 많았잖아요. 그래서 라디오가 젊은이들의 탈출구도 되고 그랬는데, 요즘은 라디오방송 그렇게 많이 안 듣는 것 같아요.
박원웅 : 그게 왜 그러냐면, 요즘에는 볼거리, 들을 거리 너무 많아졌어요. 그래서 영화도 좋은 것 많이 하죠. 텔레비전 보게 되면 좋은 프로그램 많이 하죠. 그리고 공연도 너무 많고 그러다보니 소홀하게 되죠.
양창욱 : 그래서 좋은 디제이들도 나온 지가 오래된 느낌도 듭니다. 후배들 보시면 어떠세요?
박원웅 : 글쎄요.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그 때는 디제이하면 음악 위주로 가야 되잖아요. 요즘에는 한쪽으로 치우쳐서 열심히 하는 분들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 최동욱 선배라던가 최경식 선생이라든가 음악에 아주 몰두를 하신 분들이고, 그래서 그런 분들을 본받아서 저희들 세대들은 음악을 특히 파고들어서 연구를 하고 그것을 또 전달을 하고 그런 역할을 저희가 했고요. 김기덕씨나 김광환씨도 그 분야에서 소홀히 하지 않았던 그런 분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양창욱 : 요즘은 가수나 개그맨, 탤런트, 배우들 이렇게 다른 분야에서 인기를 얻은 분들이 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하고 그러니까 전문성이 아무래 많이 떨어지는 걸 많이 느낍니다.
박원웅 : 그런 것은 왜 그러냐하면 프로듀서들이 우선 반짝하는 인기에 편승을 해서 프로그램이 좀 빛나야 되겠다, 이런 생각에서 명성 있는 개그맨이나 영화배우라든가 가수 이런 분들을 아무래도 프로그램에 심으려고 하는 것이죠.
양창욱 : 많은 매체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라디오 방송, 라디오 매체만큼은 가장 생명력이 오래 갈 것이다 이런 전망들이 나오고 있어요.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박원웅 : 라디오는 자기가 옆에서 들을 수 있고 걸으면서도 들을 수 있고 침실 옆에 머리맡에 놓고 들을 수 있고. 마치 연인 같은, 친구 같은 그런 것을 라디오의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라디오는 영원하다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거죠.
양창욱 : 선생님 삶에서 라디오 DJ, 또 라디오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박원웅 : 제 삶에서 라디오는 저를 세상에 알려준 매체였었고 고마운 친구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동반자로 지금까지 라디오는 나에게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양창욱 : 선생님 남은 여생의 꿈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박원웅 : 남은 여생의 꿈은 제 인생을 좀 품위 있게 마무리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단편적인 시상식 같은 것도 하나 만들어보고 싶고, 이제 막 시작이 된 협회가 있어요. ‘디스크자키 협회’. 이 디스크자키 협회를 조금 더 협회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그런 작업을 지금 하고 있거든요
양창욱 : 구체적으로 어떻게?
박원웅 : 등록된 단체로. 물론 서울시에 등록은 했습니다만, 문체부 같은 곳에 등록을 해서 협회로서의 제 모습을 갖추는 그런 기초 단계를 지금 저희가 하고 있습니다.
양창욱 : 이런 저런 노력에도 작업이 더딘 편인가요?
박원웅 : 그건 왜냐하면 자금이죠, 자금. 모인 사람들이 서로 자기 돈 내려고 선뜻 나서는 분이 안계시니깐.
양창욱 : 네, 그렇군요. 돈이 문제군요. 5948님이 지금 선생님께 문자를 드리고 있습니다. 출근길 추억의 노래 너무 좋습니다. 5261님 박원웅 선생님과 함께 하는 이 아침 가슴이 콩닥콩닥 합니다. 2557님 아침저널에서 들으니까 너무나 색다르고 좋습니다. 이렇게 문자를 주시고 계십니다. 선생님 늘 건강하시고 후배들에게 항상 길잡이가 돼 주십시오. 오늘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양창욱의 아침저널' 3부 '목요스페셜, 그 사람 지금' 오늘은 7~80년대 명 DJ이셨던 박원웅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
양창욱 / wook1410@hanmail.net
.김광환이 아니라 김광한 입니다.